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 - 이론물리학자가 말하는 마음껏 실패할 자유
김현철 지음 / 갈매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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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올라가면 마치 역병처럼 모두가 부르게 되는 노래가 있었다.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건동홍…. 어릴 때부터 내 주위의 사람들과 경쟁하길 부추기는 사회에서 이걸 외운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공부하고 싶은 전공이 뭔지도 탐구할 여유도 없이 들어가고 싶은 대학교 타이틀만 따지고 만다. 오래전 일이지만 대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당연히 인서울은 갈 줄 알았고, 2학년이 되며 경기권이라도 가면 다행이라고 했고, 3학년이 되면 지방의 자취방을 알아봐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던져댔던 고등학교 시절 말이다.


인터넷에 돌던 웃긴데 슬픈 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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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1류 명문대 나와도 앞길 암담해서 자살하는데

나도 자살해서 사회에 경각심 주고 싶다

└ 너 무슨 대학 다니는데

└└ △△대

└└└ 넌 자살해도 뉴스에 안 나와

└└└└ 그럼? 롤이나 해야지


가벼운 대화처럼 보이지만 사회에 의미 있는 죽음마저 학벌이 중요함을 드러내는 익명 간의 대화. 여기에 뭐라 말이라도 하며 그들의 삶을 긍정하고 싶지만, 나도 서연고는커녕 대학조차 나온 사람이 아니라서…. 1년에 단 한 번뿐인 시험으로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리라 믿는 우리들에게 괜찮다고 해주는 어른은 정녕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지난 10월 30일, 수능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이런 사회가 주입한 경직된 사고에서 해방시켜줄 책을 한 권이 출간되었다. 인하대학교 물리학과에 재직 중인 김현철 교수의 인문 에세이, 『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이다. 모두가 읽어도 좋은 책이지만 무엇보다도 대학 입학을 앞둔 학생들을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는데, 저자 자신이 대학 입학 과정에서 겪은 무수한 실패와 시행착오들, 그런 순간마다 느낀 감정들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일화들로 시작해, 대학 생활의 우여곡절들, 그리고 자신이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과 있었던 일들을 따뜻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인하대 출신이라는 타이틀로 동료가 수치심을 안겨줬던 기억도 고등학교 때 시를 쓰느라 성적이 바닥 쳤던 기억도 있었지만, 긴 세월 간 축적해온 지식과 지혜로 그런 순간을 긍정하고, 더 나아가 모든 학생의 삶을 긍정한다. 공부를 못할 수도 있다. 저자는 본인이 공부를 못했기에 공부를 못하는 학생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에 이 변수는 당연한 것이니 미적분처럼 잘게 쪼개서 해결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조언한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위대한 과학자들의 사례도 함께 들며 아직 학생들의 삶에 한껏 힘을 실어준다.


이렇게 다정히 건네는 문장에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 죽어버리고 마는 청춘들에 대한 마음이 배경에 있었다. 요즘에야 비교적 덜한다 하더라도 한때 수능 전후로 안 좋은 뉴스가 들리곤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사회는 좀체 바뀌지 않았다. 좋은 타이틀을 거머쥐지 못한 이들을 배척하는 우리 사회를 향한 김현철 교수의 뼈아픈 지적은 이미 한 번 그 시기를 지나온 나에게도 꽤 깊숙이 박혀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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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듯이

사회의 그릇된 규범과 전통도 깨지면 좋으련만,

변화는 요원해 보인다.

개인이 변화하지 않는데 세상이 변할 리가 없다.



전체는 단순히 부분의 합이 아니다.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룬 거대한 복잡계에서는

어느 순간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나타난다.

이걸 창발emergence이라고 한다.

사회가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화는 한 개인에서 시작한다.

세상은 변화를 거부해도 나는 변할 수 있다.

개인이 변하지 않고서 사회가 변할 수는 없다.


─ P.27-28, 「2. 실패할 자유: 시가 인생의 신의 한 수였음을」


살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 납작하게 압축된 타이틀 하나만 알고 평생을 건실하게 살았으리라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학벌이 인생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좋게 바라봐 주니까. 반짝거리는 타이틀 뒤의 이야기도 자주 들어봐야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마음껏 실패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이 넓은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로 태어난 모두가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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