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히 가십시오'

직원 누나의 평범한 인사말이

왠지 모르게 이젠 가라는 듯한 말로 느껴져버려서,

서서 물건을 담지도 못한 채 그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울림으로 그런 문장을 들어버리면

빨리 나가서 안녕히 가지 않으면 안될 듯한 느낌이 든다.

친절과 예의로 사람을 날려버린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근데 곰곰 생각해보면 그건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보내버리기 위한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말을 한 누나의 피로랄까, 체념 같은 것이 은연중에 묻어 있는 쪽이었다.

사람들은 생각지 못한 자리에서 그런 감정을 접하게 되고는 당황해서 그 자리를 뜨게 된다.

휴우 하는 한숨 뒤에 잘가라는 말을 들어버리고서 계속 있기는 어색하니까.

더구나 계산도 끝났으니 가는 게 도리에 맞기도 하고.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절차에 어긋남은 없는 것이다.

헌데 그 누나는 자신의 인사말이 사람들을 날려버리고 있다는 것을,

즉, 자신이 그렇게 자기 기분을 드러내고 있다는 걸 알았을까?

아마, 몰랐을 것 같은데.

그럼 나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많이 있을까?

좋은 기분이라면 모르겠지만

힘든 기분이라면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나눠주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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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켠다.

텔레비전이 가해주는 자극은 참말로 일방적이어서

그에 맞서 뇌를 뒤룩뒤룩 움직인다는 건 꽤 힘들다.

 

이렇게 뇌를 멈춰주는 도구가 바로 옆에 있다는 게 다행이다. 

텔레비전이 없다면 사람들은 항상 삶의 고통을 되새김질하면서 살아야겠지.

잠시만, 잠시만 텔레비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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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강남역에 나갔다.

시간대가 맞으면 강남CGV에서 오늘 개봉한다는 '행복'도 보고,

교보에서 구하던 책 산 다음 커피나 한 잔- 정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휴일의 강남역은 만만치가 않았다.

 

먼저 강남CGV는 나에게 맞는 4시 시간대뿐만 아니라

다음 시간대 매진, 다다음 시간대 잔여 1석이어서 여지라는 것이 없었다.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힘든 거였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다만 우연히 4시 시간대 '행복'에서 무대인사를 하기 위해 극장으로 들어오던 임수정을 보았다.

사실 보았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흘끗이었다.

보디가드들에게 둘러싸여 들어서던 화장 짙은 여인을 보았다 정도?

같이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이 예쁘다고 종종거리는 동안

난 그녀의 정체를 계속 추측하고 있었고,

CGV 안에 들어서서 황정민이 무대인사가 있으니 입장해 달라고 직접 안내방송을

하는 것을 듣고서야 임수정임을 알았다.

다시 저 쪽으로 지나가는 임수정과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는 확신했고.

 

하지만 나에겐 거의 임수정의 잔영과 사람들의 환성을 접했다는 것에 가까웠는데,

예쁘다고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반응에 편승하여 나도 예쁜 임수정을 보았다고

생각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조금 들었다.

 

그 순간 '호밀밭의 파수꾼'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 콜필드가 클럽에서 만난 세 명의 여자를 놀려주기 위해 그 중 1명에게

뒷쪽으로 게리 쿠퍼가 지나갔다고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다.

여자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지만 애당초 그 자리에 없었던 게리 쿠퍼를 볼 수 있을리 없다.

콜필드는 자신이 말했을 때 곧장 돌아봐야 했다고 능글거린다.

그리고 일행인 나머지 두 여자를 만난 앞서의 여자가 게리 쿠퍼가

나타났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두 여자가 그를 보았느냐고 묻는다.

이 부분이 걸작인데, 앞서의 여자는 '흘끗' 보았다고 대답하고

뒤의 두 여자는 진심으로 부러워하며, 콜필드는 어이없어 하는 것이다.

 

자아, 그 꼴이 되지 않기 위해

임수정을 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두 눈 멀쩡히 뜨고 날려버렸음을

맘 속으로 순순히 인정하고,

사람들의 반응에 편승하려는 마음도 버리고 CGV를 나왔다.

 

이후 책은 구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에 물려 커피는 그냥 미뤄버렸다.

강남역에는 정말 선남선녀가 많다.

매력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그 앞에서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무언가에 매료된다는 건 그런거니까.

선남선녀, 즉 매력적인 시각정보가 너무 많은 그곳은 참 힘들다.

그냥도 인간은 정보의 덩어리인데 매력은 그것의 해석과 수용을 강요한다.

인간정보의 차단이 힘든데 끝도 없이 사람은 많고.

어느 순간에는 어지럽다.

 

결국 책만 손에 든 채 탈출.

오늘 원했던 일정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말았다.

공휴일의 강남역은 만만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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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장면이 화려하긴 하나 전체적으로는 그다지..'를 총평으로 하겠다.

 

인상 깊은 포스터와 배우/스탭의 면면은

게이샤라는 소재에 별 관심이 없는 이라도 끌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 또한 그런 이유로 이 영화를 보았는데,

사진가 출신 니나가와 미카 감독이 그려낸 시각적인 화려함,

시이나 링고의 강렬한 음악,

츠치야 안나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리는 교태도

결국 이야기 자체가 재미없으니 살아나지가 않는다.

안타까워!!

이렇게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데, 더 좋을 수 있었는데!!

 

영화는 어린 시절 팔려서 유곽으로 들어온 '키요하'가

사랑에 배신당하며 산전수전 겪은 후 오르는 과정과

그 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전기가 되는 사건들의 개연성이 약해서 공감하기가 힘든 면이 있다.

특급 게이샤의 도발에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는 장면도 그렇고

이전까지 애정전선을 납득할만한 형태로 드러내지 않던 세이지와의 일로

키요하에게 어찌보면 가장 큰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저버리는 점도 그렇고.

 

각 요소들이 워낙 괜찮기 때문에 한 본 보아도 좋은 영화지만,

단지 더 나을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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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여동생과 오랜만의 미술관 나들이를 다녀왔다.

전부터 가고 싶었던 비엔나미술사박물관전.

사실 미술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그래도 전시회라도 몇 번 기웃거리고,

인사동 화랑이라도 들락거렸던 덕에

아름다운 것 봤을 때 아름답다고 감탄할 줄은 알게 된 것 같다. 

그런 내 눈에 이 전시는 참 호사였다.

 

사실 이 전시는 아름답다기 보다는 인상깊다는 쪽에 가까운데,

이 전시가 다루고 있는 시기의 그림이

약간 과장된 형태와 집중된 조명, 강한 색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성경이나 그리스로마 신화 등 격정적일 수 있는 테마를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반라가 등장하는 그림에서는 육체가 정말 강렬하게 그려져 있어서

사건과 철학적 테마를 그 강렬함으로 인식시켜 주고 있다.

눈으로 철학적 테마를 인식한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호사가 맞다;

 

또한 다른 형태의 그림들도 수준이 높았다.

늙은 여인이라는 작품은 작품명 그대로 한 노파의 초상화인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세한 주름과 모공까지도 보여서 세밀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당대에는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비견되었다가 점차 인기를 잃었다고 했는데,

난 오히려 이 작품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모나리자로부터 그 드높은 칭송만큼의 감흥을 얻지 못했었는데,

신비로운 미소는 정말로 신비로운지 모르겠다. (무지의 탓이겠거니 해야지)

 

마지막으로 바로크 미술에 공통된 테마인 '바니타스'(인생무상)의 중요성이다.

과장되고 화려하여 자칫 겉모습으로만 끝날 수도 있는 바로크 미술에

정신적인 균형을 잡아주는 건 아무리 화려한 인생이더라도 시들어버린다는 저 문구.

얀 브뤼겔의 '작은 꽃'이라는 정물화에서는 사철의 꽃들이 모두 아름답게 피어있는 와중에도

시들어 땅에 떨어진 꽃의 모습이 이 테마를 잘 드러내주고 있는데,

생의 양면을 한 그림 안에 담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각을 장악하는 강렬한 그림들과 그 안에 담긴 테마들.

대형 전시 중에도 그 내용이 빈약한 전시들이 많은데

비엔나미술사박물관전은 무척 풍요로운 전시였다.

연휴의 하루를 쪼개어 다녀온 보람이 있는 전시였기에

다른 분들께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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