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마음으로 강남역에 나갔다.

시간대가 맞으면 강남CGV에서 오늘 개봉한다는 '행복'도 보고,

교보에서 구하던 책 산 다음 커피나 한 잔- 정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휴일의 강남역은 만만치가 않았다.

 

먼저 강남CGV는 나에게 맞는 4시 시간대뿐만 아니라

다음 시간대 매진, 다다음 시간대 잔여 1석이어서 여지라는 것이 없었다.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힘든 거였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다만 우연히 4시 시간대 '행복'에서 무대인사를 하기 위해 극장으로 들어오던 임수정을 보았다.

사실 보았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흘끗이었다.

보디가드들에게 둘러싸여 들어서던 화장 짙은 여인을 보았다 정도?

같이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이 예쁘다고 종종거리는 동안

난 그녀의 정체를 계속 추측하고 있었고,

CGV 안에 들어서서 황정민이 무대인사가 있으니 입장해 달라고 직접 안내방송을

하는 것을 듣고서야 임수정임을 알았다.

다시 저 쪽으로 지나가는 임수정과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는 확신했고.

 

하지만 나에겐 거의 임수정의 잔영과 사람들의 환성을 접했다는 것에 가까웠는데,

예쁘다고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반응에 편승하여 나도 예쁜 임수정을 보았다고

생각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조금 들었다.

 

그 순간 '호밀밭의 파수꾼'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 콜필드가 클럽에서 만난 세 명의 여자를 놀려주기 위해 그 중 1명에게

뒷쪽으로 게리 쿠퍼가 지나갔다고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다.

여자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지만 애당초 그 자리에 없었던 게리 쿠퍼를 볼 수 있을리 없다.

콜필드는 자신이 말했을 때 곧장 돌아봐야 했다고 능글거린다.

그리고 일행인 나머지 두 여자를 만난 앞서의 여자가 게리 쿠퍼가

나타났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두 여자가 그를 보았느냐고 묻는다.

이 부분이 걸작인데, 앞서의 여자는 '흘끗' 보았다고 대답하고

뒤의 두 여자는 진심으로 부러워하며, 콜필드는 어이없어 하는 것이다.

 

자아, 그 꼴이 되지 않기 위해

임수정을 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두 눈 멀쩡히 뜨고 날려버렸음을

맘 속으로 순순히 인정하고,

사람들의 반응에 편승하려는 마음도 버리고 CGV를 나왔다.

 

이후 책은 구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에 물려 커피는 그냥 미뤄버렸다.

강남역에는 정말 선남선녀가 많다.

매력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그 앞에서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무언가에 매료된다는 건 그런거니까.

선남선녀, 즉 매력적인 시각정보가 너무 많은 그곳은 참 힘들다.

그냥도 인간은 정보의 덩어리인데 매력은 그것의 해석과 수용을 강요한다.

인간정보의 차단이 힘든데 끝도 없이 사람은 많고.

어느 순간에는 어지럽다.

 

결국 책만 손에 든 채 탈출.

오늘 원했던 일정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말았다.

공휴일의 강남역은 만만치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