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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평점 :
교통체증으로 전혀 움직이지 않는 버스 안,
하지만 사람은 없어 난 맨 뒷자리에 편하게 앉아있었다.
편한 자세만큼 마음도 느긋했다면 좋겠지만
꽉 막힌 길을 보며 슬금슬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궁금해졌다.
불편한 자세로 있는 것도 아니고
급한 약속 때문에 초조한 것도 아닌데
왜 짜증이 날까?
답은 '절대적인 수동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어딘가 도착하기 위해 버스를 탔었고
그 도착은 버스에 맡겨져 있다.
그 버스가 잘 움직이고 있는 동안은 모르지만
길 위에서 멈춰버리자 나의 이동이 버스에게 맡겨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버스가 멈춰있는 상황에 대해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즉, 외부의 영향에 의해 나의 움직임이 좌우되고 있고
그 외부에 나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리고 사람들은 책을 꺼내 읽든 음악을 듣든
다른 무언가를 하면서 그 수동적인 상태를
자신에 의한 능동적인 상태로 바꾸고자 한다.
요즘은 DMB나 PSP등 그 상태변화에 동원할 수 있는 도구들이 더욱 기술적이 되면서
좀 더 재미있는 것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알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신은 어딘가에 도착해야 하며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든 간에
그 도착이라는 대전제 안에 포함된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위의 생각을 했었던 당시에는
도착 이전까지의 시간 또한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면 아무 문제 없다고 판단했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단순히 시간을 흘려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상황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동성을 획득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이유도 고도가 누구인지도 그들에게 무엇을 줄 지도 설명되지 않는다.
단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그 시간을 보내기 위해
두 사람이 행하는 일들이 보여질 뿐이다.
그 일들이란 특이하지 않다.
자신들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잠시라도 잊고자 하는 몸부림일 뿐이고 여지없이 실패한다.
작가 자신도 고도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답했다던가.
고도에 대해 알았다면 작품에 그것을 쓰지 않았겠느냐고.
이 작품이 나에게 던진 문제는
버스의 도착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그때 손에 들고 있는 책에 가치를 둘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일에서 절대적인 수동상태를 겪는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고도의 존재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살면서 정말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단지 '기다려야만'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 가능한가이다.
기억 속에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라는 책에
이 작품이 언급된 것이 떠올라 다시 찾아서 읽어보았다.
사람은 모두 죽음이라는 고도를 기다리고
결국 인생 속에서는 우리 모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과 같은 처지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이어 하이데거의 철학이 소개되어 있었다.
사람은 무언가에 대한 기다림 속에서 권태를 느낀다.
무언가가 살아가면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면 거기서 느끼는 것은 작은 권태이고,
그에 대해서는 시간 죽이기가 가능하다.
그러나 무언가가 삶 자체의 조건 중 하나라면
그 때 느끼는 권태는 큰 권태이고 시간 죽이기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이 큰 권태에 맞선 시간 죽이기의 불가능성을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삶 자체에 있어서 중요한 것들을 기다릴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이
결국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보여주는 연이은 실패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떠할 것인가.
깊은 씁쓸을 가져다주는 의문이다.
이 의문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내릴지는 작품을 읽는 이의 자유이지만
우리가 종종 혹은 자주 그런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해주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지 고민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작품이 큰 의미를 가진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무엇이 내 삶을 힘들게 하는 가라는 질문에 대해
무엇이 아닌 삶 자체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던져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