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된 신 - 종교는 왜 정치를 욕망하는가
마크 릴라 지음, 마리 오 옮김 / 바다출판사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마크 릴라는 『사산된 신』에서 오늘날 분쟁의 씨앗을 통찰하기 위해 해묵은 논쟁거리를 다시 꺼낸다. 그것은 지난 수백 년간 서구 철학계와 신학계를 뜨겁게 달군 ‘정치신학’ 논쟁이다. 근대 들어 철학자들은 정치에서 신학을 분리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합리적 정신이 태동하면서 정치적 결단을 하늘의 계시에 맡기는 것의 불합리함을 깨닫고 종교를 정치에서 떼어내려 한 것이다.

중세 유럽 사회를 지배한 신학-정치적 악순환의 고리를 처음 끊은 것은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였다. 홉스는 ‘신의 뜻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은 왜 종교를 믿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논쟁의 중심을 신에서 인간으로 치환했다. 그는 종교의 존재 이유를 인간의 무지와 공포에서 찾으며 종교를 오로지 인간적인 현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홉스의 영국과 달리 유럽대륙에서는 어떻게든 종교와 정치를 조화시키려는 제3의 길이 적극적으로 모색됐다. 마크 릴라는 여기서 비극이 잉태됐다고 판단한다.

프랑스 사상가 루소는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간에게 종교의 유익을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 유익이란 ‘도덕성’이다. 그는 『에밀』에서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이상 종교는 지속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정서나 양심에 뿌리를 둔 신앙은 ‘도덕 종교’로서 인간 정신에 유익하다고 판단했다. 칸트는 도덕 종교의 기반을 더욱 견고히 다졌다. 그는 기독교가 바르게만 개혁된다면 인간의 도덕성 향상에 가장 적합한 종교라고 주장했다. 칸트에게 이성적 인간은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최고의 선은 신의 존재와 인간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두 가지 공리를 받아들일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신교가 ‘절대지(絶對知)’라는 인간 지식의 정점에 이르렀으며 독일은 개신교 중심의 도덕 생활을 통해 인류의 화합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상적 바탕 위에 19세기 독일에서 낙관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종교가 바람직한 사회 건설에 기여할 수 있고 정치를 위협하거나 광신주의를 불러일으킬 일은 없다고 낙관했다. 또 이들은 예수의 신성은 부인하되 복음의 도덕적 메시지는 합리화해 근대 정치와 문화생활에 적용하고자 했다.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독일의 전쟁 기도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재앙으로 독일 부르주아 사회가 무너지면서 이를 지지하던 자유주의 신학도 함께 몰락하게 된다. 자유주의의 부푼 꿈은 궁극적인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 진정한 확신을 심어줄 수 없는 ‘사산된 신’임이 드러난 것이다. 부르주아 생활에 대한 진부한 도덕관과 역사적 낙관론으로 점철된 자유주의 신학은 애초에 “왜 기독교인이 돼야 하는가?”라는 신앙의 근본적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선 극도의 정치·사회·경제적 혼란 속에 다시 인간을 성서 속 구원의 신, 구세주 하느님과 화합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생겨났다. 독일은 자신의 몰락을 가져온 신학을 정치에서 완전히 배격하는 홉스의 지혜를 선택하기보다 새로운 신학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구원에 대한 강렬한 갈증을 해결해줄 새로운 계시였다.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고자 했던 바르트와 로렌츠바이크의 메시아주의적[]종말론적 구원사상은 독일에서 정치적 구원에 대한 신학적 필요성을 주장하는 데 악용됐고, 이는 결국 신격화된 히틀러를 만들어내며 20세기 최악의 재앙으로 이어졌다.

마크 릴라가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과 그들의 신이 사산된 역사를 되짚으면서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제3의 길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철학과 정치신학을 구분하는 강은 좁고 깊다”며 “그 물에서 파도타기를 시도하는 이들은 통제 불능의 영적 세력에 휩쓸려 내려갈 것”이라고 말한다. 신은 개인의 영성 생활 안에 머물러야 하며, 신이 정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사회는 극단적인 메시아주의가 도래할 잠재적 위협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대학신문, 2009년 9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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