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만국기 소년 ㅣ 창비아동문고 232
유은실 지음, 정성화 그림 / 창비 / 2007년 3월
평점 :
이 책에는 질투할만한 아이들이 없다.
나는 유은실 작가의 전작인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의 주인공 비읍이를 질투한다.
비읍이에게 린드그렌 선생님이라는 빽(?)이 있다는 것만이라도 이 아이는 내게 참을 수 없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비읍이가 린드그렌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하는 만큼.. 더 질투가 났다.
그런데 이 책에는 질투할만한 아이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9편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들이 비읍이만큼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다.
비읍이는 꿈을 현실로 만든.. 한편의 판타지 동화의 예쁜 주인공이었지만, 이 책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냥 현실 속의 아이들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과거의 어린 나와 지금 어른이 된 현실의 내 모습이 종종 오버랩되어 그림처럼 떠오르곤 했다.
그 모습들은 즐겁거나 예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난 책장을 덮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내 이름은 백석의 석이'
무식한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지만 마음놓고 부끄러워하기에는 철이 많이 든 아이,
이건 뭐 내 얘기가 아닌가? 이 아이가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잘생긴 천재 시인 백석과 이름이 같다고 해도
나와 똑같은 경험을 가진 이 아이를, 나와 똑같은 얘기를 하는 이 아이를 질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질투는 커녕 서른이 넘도록 이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아직도 그런 마음은 버려지지가 않는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맘대로 천원'의 나..
엄마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천원도 맘대로 못 쓰는 이 아이..
자기한테 용돈 천원을 주기 위해서 엄마가 도라지를 두근이나 까야 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 아이..
맘대로 쓰도록 허락받은 돈이지만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기에 도대체가 천원을 맘대로 쓸 수가 없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엄마가 3시간 잔업을 하면 더 받는 돈을 잘 알고 있던 나.
엄마가 사준 만두나 순대, 짜장면을 먹으면서 엄마가 얼마동안 일해서 번 돈으로 이것들을 샀는지 계산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가끔씩만 했다. 그런 생각을 오래 하는 일은 힘든 일이었기에 금방 잊으려고 했다.
'맘대로 천원'에는 내가 경험하고 느꼈어야 했으나 외면했던 갈등들. 내가 도망치지 않고 대면했어야 마땅했던 진실들이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주인공 '나'가 사 먹은 매운 떡뽁이만큼 매워서 어지럽고 눈물이 난다.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하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 '만국기소년'은 한편의 시처럼 느껴졌다.
꼭 슬픈 마술사 전설에 대한 시 같다. 입에서 꽃송이를 만드는 마술사처럼 상자로 만든 집에서 아이들을
만들어내는 아저씨. 마술사의 입에서 팡팡 터져 나와 입으로 만국기를 뿜어내는 소년, 진수..
슬픈 마술사 부자, 이들을 지켜보는 나. '나'가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진수는 끊임없이 만국기를 뿜어낸다. 슬픈 시처럼 뿜어낸다.
어렸을 때의 나는 이 이야기의 화자인 '나'에 가까웠는데 지금의 나는 어쩜 '엄마'나 '선생님'에 훨씬 더 가까워졌는지도 모르겠다.
진수의 미래가 '나'의 집 싱크대처럼 그냥 뻥 뚫릴 수는 없는 것처럼. '아이를 너무 많이 낳았다'고 아무런 생각없이 아저씨에게 말해버리는 엄마를 지켜보는 '나'의 목구멍이 그런 것처럼 내 목구멍에도 뭔가가 걸린 느낌이다.
환상이 새가 되어 날아가는 그 순간, 그 결정적인 순간에 아이는 또 한번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간다. '아저씨는 왼손으로 모자를 벗었다. 숱이 적은 머리가 드러났다. 바람이 창으로 들어왔다.
아저씨의 머리카락이 일어서서 흔들렸다. 마치 어린 새가 날개짓하는 것처럼....'(P29) -
이 부분을 읽는 내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머지 6편의 이야기들은 직접 한번 읽어보시라.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슬프고도 환한 이야기!라는 카피글처럼..
슬픈 이야기도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작가.. 유은실의 이야기에 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유은실 작가를 좋아하고,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항상 기대한다.
나는 슬픈 이야기를 슬프게 쓰는 걸 제일 싫어한다. 슬픈 이야기는 자고로 재미있거나 유머스러워야 한다.
유은실 작가는 이 법칙을 정말 잘 지키는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