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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평점 :

처음 이책의 제목을 들었을 때 최규석의 『아기 공룡 둘리의 슬픈 오마주』가 떠올랐다. 유명한 원작을 패러디해 이 시대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만화라는 점이 서로 겹쳐졌다. 그리고 책을 읽은 후에는 최근에 읽었던 최규석의 『100℃』가 생각났다. 뭔가 잘못 돌아가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라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하나는 정치를, 다른 하나는 경제를 논하고 있긴 하지만 둘 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은 같다. 지금 뭔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점도.
이책에 실린 만화들은 저자가 지난 10년간 대학 교지와 노동소식지, 학술잡지 등에 연재했던 단편들을 모아 엮은 것이란다. 머릿말에 언급된 설명을 읽으며 솔직히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 전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작가의 말처럼 지금의 현실은 너무나 놀랍게도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랜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십년 전의 그의 만화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었으니 정말이지 절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태권의 『어린왕자의 귀환』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기본적으로 생텍쥐페리의 고전 『어린 왕자』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자신의 작은별에서 평화롭게 살던 어린 왕자 대신 비정규직의 현실로 내몰린 두 청년 남수와 주영이 등장하고, 어린 왕자가 여행했던 많은 별들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폐해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별들로 재탄생하며 불후의 고전은 지금 우리 시대의 문제와 고민들을 담아낸 문제작이 됐다.
작은별에 사는 남수와 주영은 일자리가 없어 화산을 청소하고 바오밥 나무를 제거하는 '비정규직 왕자' 일마저도 짤린 후 각자 장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지나가던 은하철도의 묘령의 나그네가 알려준 자유무역을 따르다 결국 자신들의 작은 터전까지도 잃어버리고 방랑의 길에 오른다. 그후 그들은 경영합리화의 그늘을 보여주는 자본가의 별과 실업자의 별, FTA 시장실패로 홀로 남은 임금님의 별, 노동착취를 당하는 가로등지기의 별을 여행하고, 백년 전 고종의 전기 사업 민영화 과정과 자본주의의 노동 통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저자는 각 꼭지들을 통해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무한경쟁에 내몰리는 노동자들과 노동착취, 정리해고와 고용불안, 부의 불균형에 대한 문제점들과 자유무역(FTA)에 따른 각종 규제 철폐에 따른 각종 부작용, 공공부문 민영화의 위험, 노동자의 분열을 조장 등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패러다임인 신자유주의의 폐해들을 하나둘 끄집어내어 까발린다. 미처 몰랐던 부분들도 있고, 이미 알고 있지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부분들을 보며 다시금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다.
책의 끝머리엔 신자유주의의 매정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은 「어린왕자와 신자유주의 우주」와 박지원의 『허생전』을 패러디해 지금의 대한민국의 민생을 꼬집은 「민생뎐」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재개발로 자신의 작은별을 빼앗기고 밀입국해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실업을 맞고 노숙자로까지 전락했으나 로또로 인생역전을 이룬 어린왕자의 이야기나 신자유주의의 바람으로 기본 생활마저 위협당하고 분하고 억울해도 호소할 곳조차 없이 나락으로 치닫는 민생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 읽으면서도 씁쓸할 따름이었다.
얼마전까지도 신자유주의는 그저 학창시절 교과서에 나오던 여러 패러다임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열렬히 신봉하는 신정부가 들어서고 공기업의 민영화, 고용불안과 비정규직의 확산, 그리고 한미FTA 협상 등의 정책이 이어지면서 신자유주의는 어느새 우리 생활에 깊숙이 침투했다. 김태권의 『어린왕자의 귀환』은 신정부가 따르는 신자유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과 여러 부작용들을 『어린 왕자』의 패러디를 통해 날카롭게 파헤친다.
다만 간격을 두고 제각각 게재되었던 만화들을 다시 엮다보니 수정이나 보충 작업을 거쳤음에도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점은 아쉽다. 또한 방대한 내용을 짧은 지면에 압축하다 보니 기본 지식이 부족한 독자로서 간혹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본문에 사용되는 개념이나 용어에 대해서도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 '함께 고민해 보자'라는 마무리는 조금 김이 샜다. 물론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결론인지 모르겠지만 작가 나름의 대안을 제시해 주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런지.
그러나 『어린왕자의 귀환』은 우리에게 익숙한 『어린 왕자』 속의 절묘한 캐릭터 활용과 여러 상황과 대사의 재치있는 패러디를 통해 자칫 너무 진지하거나 무거워지기 쉬운 정치경제에 이야기를 한결 가볍고 친근하게 들려주어 공감을 이끌어 낸다. 물론 다루는 내용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또한 저자는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남수와 주영이라는 두 청년을 통해 먼나라 이야기 같았던 신자유주의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으며 또 어떤 문제들을 만들고 있는지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비록 명확한 자신만의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하지만,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을 유지하되 그것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친근하게 풀어낸 점은 이책 『어린왕자의 귀환』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 아닐런지. 각 꼭지마다 덧붙여 있는 우석훈 교수의 해제는 만화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의문과 갈증을 해결해 주며 이책을 더욱 깊이있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