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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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그에게 과연 무엇이 운명이었을까? 원칙으로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에서 끝가지 그것을 지키려 했고 그래서 그에게는 결국 극단적 죽음 밖에 선택할 것이 없었다. 그 어찌할 수 없음이 운명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우리는 너무나 무서운 댓가가 따르는 정도의 길을 보게 된 이다. 이것은 그의 운명이 아니다.  

그의 운명은 일생을 통해 원칙과 정의의 길을 끝가지 선택할 수 밖에 없음을 말 한 것이다. 좀 더 쉽고 편한 길을 그는 끝내 선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보다. 알아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다. 그 이길수 없는 싸움의 끝나지 않을 투쟁이 그의 숙명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역사책으로 구분하고 싶다. 성인이 되어 내가 참여하였고, 보았고, 들었던 그 역사의 기록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었고, 궁금했던 것들. 혹은 이해하고 믿었던 것들이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역사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슬퍼서 눈물이났고, 분해서 욕하고 싶었고, 미안해서 부끄러웠다.  

한홍구 선생의 <지금 이 순간이 역사>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만큼 민주화가 되었고,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질 만큼 민주화가 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어쩌면 이상일 수도 있다. 아니 '이상'이다. 결과적으로 끝내 이루지 못할 이상. 그렇다고 그것이 '가치없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의지속에서 발전하고 지켜낼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숙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현재 민주주의 제도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현재의 위정자들이 국민들에게 바라는 것이 그런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노예를 가장 부리기 쉽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노무현 대통령은 죽기전 이런말을 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일년전 그 말을 들었을때 왜 저런말을 할까? 노무현 답지 않음에 마음이 많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전 그때도 그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진보와 민주주의 가치가 더불어 훼손되는 것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자신때문에 이러한 가치 추구가 혹은 앞르로 추구해야할 세대들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 사회는 제2의 노무현, 제3의 노무현을 통해 이러한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것에 자신이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몸을 던진 것입니다.  

그는 항상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하는 열정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결과보다는 그 과정속에서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다는 확고한 생각에 그런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지더라도 의미있게 지는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이기는 것만을 강조하는 이 시대에 어쩌면 '의미있게 지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을 줄 은 모르겠으나, 그는 그렇게 져야지만, 다시 일어서 싸울 수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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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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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관찰, 공간의 느낌을 깊은 사색을 통해 잘 표현한 작품이다. 아주 오래간만에 울림이 있는 문장들의 소설을 읽게 되었다. 서사적으로 요즘 나오는 소설들처럼 흡입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나, 작가의 무게감 있는 한문장 한문장이 책장을 넘기는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현재를 살면서 과거를 생각한다. 소설의 구조도 그러하다. 현실의 깊이를 과거가 더해준다.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이 한 사람의 뒷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서 주절거려 본다. "어쩌면 삶은 쓸쓸함일지도 모르겠다." 

 미래를 살아야 한다고 여기저기서 떠 들지만, 결국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과거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의도와 의식은 상극의 관계이다. 소설의 나오는 주인공의 아내는 비중이 많지는 않지만, 그의 시선에 보여지는 아내의 모습은 아름답다. 독자로서 그의 아내를 생각할때 미안하다고 사랑하다고 보고싶다고 말하싶다. 그리고 그런 아내와 살고 싶다고 생각이 든다. 소설은 주인공의 시선과 관념을 오롯이 따라가면서 서사의 넓이와 깊이를 확장시킨다. 앞서 말했던것과 같이 현재를 통한 과거의 보기의 쓸쓸함때문이 이것이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아름답지만, 쓸쓸한...소설이다.

▲ 밑줄 긋기

울면서 걸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생의 어느 한 부분을 안다는 것으로 서로 얼굴 한 번 안 본 사이끼리 위안과 격려를 주고받습니다. 그런 소설이 되기를 바랐고, 그것이 교감되었다는 것이 기쁘고 고맙습니다. (표지 안쪽 작가의 말) 

생의 의미를 찾아 멀리 떠날 것까진 없다. 의미는 사무실 소파 아래에 뒹구는 막걸리 통에도 얼마든지 있다. 의미는 사무실 소파 아래에 뒹구는 막걸리 통에도 얼마든지 있다. 의미를 몰라 인생이 건조해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하루에 두 번씩 거리의 색채를 바꾼다. 해가 뜰 때보다 질 때가 더 갑작스럽고, 더 슬프다. 몰락이라는 단어는 석양에서 왔을 것이다.(11쪽) 


가지고 갈 수만 있다면 사치는 가져가는 게 좋다. 정신의 사치는 우울증을 막아준다.


남자가 들어왔을 때 환기를 하느라 열어놓은 창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나는 일어나서 창문을 닫았다. 창가에 서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덤덤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자기 인생을 누구에게 이해받을 필요는 없다. 이해라는 건, 자식이나 마누라가 아닌, 맞은편 막걸리 집에서 몽롱하게 취해 바라보는 어느 손님이 뜻밖에 해줄 수도 있는 일이다(15쪽) 오래된 사물에는 세월을 견뎌 온 고유한 질감이 있다.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시절들이 희미하게 번져 있어, 단지 먼저 살아냈다는 이유만으로 보는 이의 인생을 문득 긴장시킨다. 거기에 보이는 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그것들 속에 시간으로 괴어 있는 낯익은 슬픔일 것이다.(26쪽)   


나이가 마흔쯤 되면 버릇이 옹이처럼 삶에 박힌다. 무심코 반복되는 그것들 속에 욕망도, 상처도, 사는 방식도 다 들어있다.


사르트르 <구토>의 한 부분

주인공은 무심코 문고리를 잡다가 서늘하게 놀란다. 차갑고 딱딱하던 문고리가 물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사물, 아니 생물로 느껴진다. 문고리가 생물이 되고 나니 주인공 남자와 문고리는 이제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된다. 그러자 모든 존재가 갑자기 낯설어진다. 문고리가 생물이 되는 대신 정상적인 사람들은 짐짝이나 고깃덩어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그래서 구토를 하고 만다.

한 번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그 일이 돌아온다.


슈뢰딩거 고양이 실험.

우연을 운명으로 의식하는 순간 운명은 바뀐다. 안 거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것이 시작된다. 슈뢰딩거 고양이 이야기는 실종된 운명의 이야기다. 우리가 확인한 고양이의 죽음은 우리가 불러일으킨 일일 뿐, 고양아의 진짜 생사는 상자 뚜껑을 열기 전의 그 시간에 있다. 운명은 ‘모르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아는 건, 안다는 그것으로 인해 운명이 아니다.


산자가 보내지 않으면 죽은 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못 떠나는 건 산 사람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서 외롭다.


까뮈가 말했다. 부조리한 세계에서는 ‘더 잘사는 것’보다는 ‘더 많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고 말이에요. 한 인간의 도덕과 가치 체계는 축적된 경험의 양으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현대의 상황은 대다수의 인간에게 같은 양과 같은 깊이의 경험만을 부여한다. 경험이 좀 더 많아지면 가치의 목록이 달라질 것이다.


사방이 아주 고용하면 예민해지는 게 아니라 둔한 방심 상태가 된다. 그런 방심 상태가 되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띈다. ‘존재’만 하던 것들이 슬며시 자기를 드러낸다. 의미라는 것도 그럴지 모른다. 절망이나 깊은 슬픔으로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면, 현실적 의미들이 사라진 곳에서 다른 차원의 의미가 올라온다. 자각은 갑작스러워야 자각이다.


인생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나 구차한 허영, 아내를 실망하게 한 다른 큰일은 말할 것 없지만, 순간적으로 목이 메게 하는 기억은 이처럼 작은 일이다.(134쪽)  

가난은 오히려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내면에 담담한 자부심이 있으면 가난한 생활이 쓸쓸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못난 자의식으로 늘 세상과 대결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속물스러운 사람들을 경멸하며 의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초조해하며 나에게 없는 것들을 욕망했다. 아내의 인생도 그런 나를 고단하게 지켜보는 것으로 소진되었다.(182쪽) 

 마음은 슬픈데 쓸쓸하지는 않다(191쪽) 

 때로, 인생 전체가 아니라 삶의 어느 한 국면, 무엇을 견디거나, 넘어서거나, 혼자 걸어가는 어느 장면이 한순간에 전폭적으로 이해될 때가 있다. 그 사람 영혼의 한 자락이 들여다보인다고나 할까. 

(210쪽) 빛은/조금이었어 // 아주/조금이었지 // 그래도 그게/빛이었거든(230쪽)  

중요한 건, 내가 아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모호하게 사족 붙이지 않고, 부질없는 미문에 매달리지 않고, 내가 아는 표정과 몸짓들에 대해서만, 내가 명백히 아는 이야기만 쓴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하는 말들을 내가 정확히 받아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내가 쓰는 글은 '내가 아는 세계'라는 한 의미가 된다. 그것이면 된다. 한 사람을 온전히 만나면 거기에 다른 이들도 보인다. 배역이 다를 뿐 모든 사람의 욕망과 상처는 본질적으로 같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무게의 삶을 산다. (237쪽) 

랑은 하나의 시련이다.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서 외롭다.(249쪽)  

 아이는 그때 자기 생을 유예시키고 있었다. 아무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늘 혼자였다.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기 인생에 무슨 일인가 생겨주기만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온순했다. 세상은 온순한 사람은 기억하지 않는다.(281쪽) 

바람이 불었다. 목련 나무의 가지와 잎들이 후두두 흔들렸다. 수십 개의 나뭇잎들이 저마다의 몸짓과 표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뭇잎의 미세한 떨림, 그 파동 하나하나가 내 몸에 날아 들어왔다. 서서히 벅찬 감흥이 가슴에 차올랐다. 나뭇잎은 저마다 하나의 웃음이고, 뜀박질이고, 눈물이고, 기도였다. 나뭇잎 하나하나가 욕망이고 회한이었다. 살아오면서 문득 마주치곤 했으나 알 수 없었던 신비한 순간들이, 들판에 퍼져 나가는 종소리처럼 나뭇잎들 하나하나에서 무수하게 솟구치고, 몰려오고, 날아다녔다.(288쪽) 

 당신은 지금 어디 있냐고, 아내는 그렇게 나를 긴장시켰다. 이 소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설 청탁 끊긴 지 오래고 전직 소설가라는 농담을 덤덤하게 듣던 시절이다. 이번 소설이 마지막이라면 나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다.(293쪽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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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 따윈 몰라 - Who's Camus Anywa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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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마치 미츠오 감독은 사실 들어 본 적이 없는 감독이었다. 다만 그의 최근작 <까뮈 따윈 몰라>로 처음 알게 되었다. 작품의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그의 작품경력은 오래되었다. 경력에 대한 나열은 생략하겠다.


1982년 작품인 <안녕, 나의 대지여>와 1985년 <히마츠리>의 경우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문화와 차이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지식의 부족이 이 두 작품을 난해한 영화로 만들었지만, 작품의 스타일도 이해를 하는데 어려움을 주기 충분했다. 프로그램에서 본 야나기마치 미츠오 감독의 영화들은 극단적 결말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안녕, 나의 대지여>와 <히마츠리>는 더욱더 그러하다. <히마츠리>는 감독이 말하길 신의 의지, 혹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인과관계를 성립시킨다고 했는데, 사실상 이러한 이유를 영화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또한 이해하기도 어렵다. 물론 <히마츠리>라는 영화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묘사는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문학적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감독과의 대화에서 은유라는 표현으로 그 인과관계를 설명한다고 했는데, 영화의 은유와 문학의 은유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문학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보이는 은유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영화를 보면서 이것은 이해를 할 수도 있고, 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 은유를 이해 못함이 곧 영화전체의 내러티브를 이해 못하는 것으로 연결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영화의 은유는 상대적이어야 한다. 서사와 맥락 속에서 은유가 깊이를 더해주어야 한다. 은유를 이해하든 못하든 관객들은 평등하게 기본적인 이야기를 이해해야한다. 감독은 <히마츠리>라는 영화가 극과극의 평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어떻게 보면 실험적인 시도였다고 볼 수 있는 나 결과적으로는 훌륭한 영화는 아니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영화의 결말이자 최고의 사건인 자살과 살인(그것도 아이들까지 죽이는 살인)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야나기마치 미츠오 감독의 가장 최근작 <까뮈 따윈 몰라>는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영화다. <히마츠리>때와 20년의 간극이 존재하는데, 그 긴 세월만큼 영화에 접근하는 감독의 태도가 많이 변화되었음을 느꼈다. 또한 영화학과 학생으로 영화 자체가 자기반영적인 부분이 존재해 재미를 더욱 더해주었다.

이 영화의 소재 까뮈의 <이방인>은 이 책을 읽었던 읽지 않았던 영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차이가 없다. 물론 깊이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최소한 <히마츠리>와 같은 어려움은 없다.


하나의 중심사건을 둘러싸고 여러 인물들을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현재의 젊은이들에 대한 감독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각 캐릭터들을 개성 있게 잘 표현하면서도 그들을 하나로 잘 묶어내고 있다. 이 영화는 실제 살인사건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 살인사건을 까뮈의 <이방인>을 통해 영화로 형상화한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각자의 인물들은 영화로 많은 고민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다른 것들로 고민을 한다. 그들은 본질에 대한 이해보다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영화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 깊이와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항상 혼돈스러워 한다. 무엇이 진짜인지? 고민을 하지만, 결코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다. 혼돈으로 인한 분열이 각 캐릭터의 공통된 분모이자 이것이 영화의 갈등이다. 현재의 젊은이에 대한 탁월한 표현이자 감독의 관찰력이 굉장히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지막 부분이다. 살인과 촬영의 시점이 교차되는 부분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맘에 든 부분이다. 어쩌면 이 마지막 부분은 영화 내에서 도드라지는 스타일 일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시점일뿐더러 이 것이 극의 흐름에 전혀 상반되는 지점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느나 이 혼란이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또한 감독이 관객에서 강력하게 영화에 대해 말을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인물들이 겪는 혼란을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던지는 것이다. 인물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데서 직접 그런 혼란을 겪는 주체로 관객을 몰아넣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영화내의 영화촬영 장면일까? 아니면 영화내의 진짜 살인 장면일까? 어쩌면 이것은 필자의 확장된 생각일 수 있으나 이 영화에서 제시된 제재(까뮈의 이방인 혹은 실존주의)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까뮈 따윈 몰라>는 그 전 작품고의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신선한 의지와 변화된 시도 등이 필자에게는 크게 와 닿았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다음 작품에서의 발전이 기대되는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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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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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브로크백 마운틴>은 단편소설을 각색한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영화화하기 적합한 소설의 형태로 단편소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너무나 좋게 보았다. 과연 원작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 하던 차에 영화의 아카데미상 인기에 힘입어서인지 국내에도 빨리 책이 발간되었다. 하지만, 급하게 책이 나와서인지, 번역의 한계를 넘지 못해서인지 책은 실망 그 자체였다.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감정, 공간, 캐릭터 등 어느 하나 영화를 넘어서지 못했다. 물론 청각적이고 시각적인 영화가 더욱 풍부한 느낌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나,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원작과 영화를 비교해본 경험에 의하면 그것을 감안해서라도 정말 실망스런운 경우였다. 이 영화는 공간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소설은 공간적 설명보다는 이야기의 서사에 집중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는다. 브로크백 마운틴 이라는 곳이...혹은 그 지방이 미국에서 어떤 상징적인 장소인지는 모르나, 공간속에서의 인물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영화는 매 순간마다 인물과 공간을 같이 보여주고자 한다. 공간속에서의 인물을, 인물이 속한 공간을 통해 많은 것을 전달해주고 있다.

→ 소설 <브로크백 마운틴>

‘숨 막힐 듯 좁은 트레일러 사무실 안, 베이클라이트 재덜이에 꽁초가 넘칠 듯 쌓여 있고 휘갈겨 쓴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탁자~~’

; 318p

소설에서는 ‘숨 막힐 듯’ 이 제시가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력을 제공해준다.


→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작가 주관적인 공간의 느낌과 인물들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공간의 세부묘사가 소설의 공간묘사라면 영화에서는 좀 다른 방식으로 이 공간에 대한 느낌을 풀어낸다. 사실 공간에 대한 느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영화속의 인물의 행동과 트레일러 안으로 들어오기전 인물의 묘사로 인물들의 관계나 상태등을 다 설명해 놓고 이 트레일러 안에서도 공간보다는 인물의 관계 혹은 정보 전달을 주목적으로 씬을 처리하고 있다. 00:04:37

→ 소설 <브로크백 마운틴>

'여명이 흐릿한 오렌지색으로 변하며 아래로부터 젤리 같은 옅은 녹색 띠가 번져왔다. 검댕처럼 검은 거대한 산이 서서히 어슴푸레해지더니 에니스가 아침을 하려 피운 불에서 나온 연기와 같은 색이 되었다. 차갑던 공기가 부드럽게 가라앉으면 줄무늬 조약동과 보드라운 흙가루에 느닷없이 연필처럼 길쭉한 그림자가 깃들었다. 그 아래 병풍처럼 둘러쳐진 로지풀 소나무들은 거무스름한 석녹색으로 두툼하게 무리를 이루었다.~~; 321p

→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사실 소설의 묘사는 잘 와 닿지 않는다. 주로 색에 대한 묘사를 이루었는데, 색을 아무리 자세히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 색을 똑같이 생각하기는 힘들다. 언어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더욱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묘사는 더욱도 상상을 어렵게 만든다. 로지풀이 모르는 본인으로서는 단순히 밤이 찾아 왔고 조용한 공간이라는 인상 밖에 받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물론 훌륭한 음악도 큰 역할을 했다는 것에 부인할 수는 없다.) 그 공간자체가 시각적으로 제시되고 또한 그 공간의 느낌으로 충분히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고 대체하는데 모자람이 없다.

본이 아니게 소설의 영화보다 못하다는 식의 이야기로 흘렀던 것 같다. 몇 부분을 더 인용할 수도 있지만,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 이정도로 생략한다. 영화보다 뛰어난 소설도 많고, 훌륭한 소설에 훌륭한 영화가 나 온 경우도 보았다. 어찌보면 본인의 선택이 이 과제를 수행하는데 있어 적합하지 못한 소설과 영화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공간’이라는 특정적인 화두로만 애기를 했을때, 소설이 영화보다는 많은 취약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같다. 그 이유는 이미 언급했었다. 하지만 소설은 영화가 보여주지 못하는 공간의 특징과 느낌을 제시할 수도 있다. 또한 독자의 상상력으로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영화와는 달리 공간에 대한 더 큰 감흥을 제시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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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디자인하우스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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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바로 필자(키숀)가 생각하는 ‘예술의 본질’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면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미국의 미학자 웨이츠에 따르면 이 물음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예술이라는 말은 음악, 무용, 건축, 영화, 소설, 조각등 다양한 것을 지칭한다. 이것들의 모두에 공통된 성질은 없다. 이들 사이엔 단지 ‘가족 유사성’만 있을 뿐이다. 본질이 없는데 본질이 뭐냐고 묻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웨이츠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이 뭐냐고 물으며 출발했던 전통적 미학은 모두 이러한 오류에 빠져있다고 한다. 이런 걸 ‘본질주의적 오류’라고 한다. 예술에 본질이란 것이 없다면, 예술은 정의할 수 없다. 즉 ‘예술’이라는 개념은 열린 개념이다. 이것을 정의하려고 하는 순간 예술은 죽어버리는 것이다. 즉 새로운 예술이 기존의 예술 형태와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없다는 모순된 논리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예술적 창의력을 억압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예술적 개념을 닫아버림으로서 그 창의력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열어두고 창의력을 고양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억압된 질서보다는 자유로운 무질서’가 예술의 영역에서는 더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예술’이라는 개념이 필자가 생가하고 있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모든 작품들이 이야기 되고 평가되어진다. 물론 키숀의 모든 논의가 이런 전제로 인해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의 앞에서 윌리엄 에티의 ‘연인 히어로와 레안드로스’ 하워드 호드킨의 ‘사랑하는 한 쌍의 연인들’의 그림을 나란히 비교하였다. 본인도 윌리엄 에티의 그림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두 그림의 평가를 절대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앞에서 윌리엄 에티의 그림에 대한 짧은 평가를 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크 양식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구분하면서 공부하던 본인 스스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때 바로크 양식의 그림에 많은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20세기 전반의 전위적 현대미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본인에게는 하워드 호드킨의 그림은 한 낫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가지고 감히 작품들을 절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보는가? 에 따라 의미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키숀도 이러한 부분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러한 부분은 자신이 그 정도는 견지하고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그러한 부분을 넘어가고 있다. 예술작품을 보고 내리는 판단과 그것에 느끼는 감정에는 다양한 루트가 존재한다.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라는 책에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개념을 설명한 적이 있다. ‘스투디움’은 학습에 의해 가능한 영역이다. 본인이 말한 윌리엄 에티의 그림에 대한 평가는 ‘스투디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푼크툼’이라는 것은 정말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이다. 누군가가 하워드 호드킨의 그림을 보고 주체할 수없는 감정에 휩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학습을 초월한 영역이다. 사실 예술작품의 감상에는 항상 이러한 것을 기대하고 이것 이상 좋은 감상은 없다. 키숀은 예술작품의 감상에 있어서 개별적인 특수성을 많이 배제한 듯하다.


이 책의 주된 비판 대상은 ‘현대미술’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미술사는 독자적인 흐름이라 말할 수 없다. 현대 미술은 이미 20세기 전반기에 전위적인 미술운동과 함께 싹텄다. 이를테면 큐비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와 같은 추상미술 운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모더니즘 예술은 의도적인 무질서, 대상성의 파괴, 오브제의 도입, 창작의 우연성 등 전통적 예술 관념에 따르면 도저히 예술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모더니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흐름, 즉 문학, 철학, 심리학 심지어 과학의 영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대미술을 전체적 맥락의 한 부분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너무 성급한 판단을 하지 말자는 뜻이다. 키숀은 인상주의 그림, 특히 고흐의 그림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미켈란젤로와 비교하여 새롭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상파나 후기인상파의 사물에 대한 미술적 접근은 후에 인간이 세상을 바라봄에 있어 보다 다양한 시각의 확장을 가져다주었고 미술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것이 없었다면 후에 나온 야수주의, 입체주의. 표현주의도 없었을 것이며,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르네 마그리트도 없었을 것이다.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도 처음에는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변기를 작품이라 가져왔으니, 이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하지만, 수업시간에 애기했듯이 본질과 실존의 측면에서 보면 조금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 사용된 변기는 기존의 공장에서 나온 변기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외부에서 그 의미를 찾아봐야 한다. 예술계가 그 변기를 <샘>이라고 명명해주는 순간 예술작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과연 여기서 어떤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가? 바로 ‘코드’, 즉 변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관습’이다. 바로 앞서 말한 모더니즘 미술의 특징인 ‘사물의 오브제화’에 부합되는 것이다. 현대 미술에서 어느 대상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코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전환이다. 이러한 사고가 예술의 질적 저하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발전된 형태의 진화를 가져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예술의 형태는 하나로 정의되지 않고, 그 시대의 흐름에 맞게 수시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그릇된 형태로 비추어 지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흐름으로서 부정할 수 없으며 예술 발전의 한 과정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어떻게 파생되어 어떤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더니즘 미술이 추상성을 띠고 있다고 해서 이것이 모두 키숀이 비판하는 현대예술의 형태는 아닌 것과 같이 키숀이 비판하는 형태의 추상화 미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요지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키숀의 접근은 흥미로웠다. 비록 그것이 반론의 여지가 있고, 자신의 의견만을 집중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매우 가치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키숀의 지적은 반드시 현대 예술이 풀어야할 과제이기도 한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돈에 의해 전도된 예술품의 가치를 빨리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돈을 쫓는 예술작품은 결코 아름다움과 감동을 줄 수 없다.

또한 작품이란 것은 그 자체보다는 수용자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접근은 창작자에게 중요한 의미로 제공 될 것이다. 본인도 그 창작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생각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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