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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10. 01. 05
저자 : 아고타 크리스토퍼
-퍼옴-
종종 TV의 고발 프로그램이나 뉴스에서는 마치 인간성이 상실된 듯한, 난폭하고 잔인하며 무도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낮에는 마냥 좋은 남편이자 아들이었던 사람이 밤에 술을 마신 후 돌변하여 아내와 어머니를 폭행했다든지, 어느 10대가 강남에서 살기 위해 엄마와 누나가 집에 있을 때 후배를 시켜 집에 불을 지르게 했다든지, 아버지가 의붓딸 혹은 심지어 친딸을 성폭행했다든지 등등. 이런 일들은 물론 끔찍한 일들이지만, 대개의 경우 '나'와는 무관하다. 나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이니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들은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고 또 그래야 마땅한 일이라는 의미다. '나'의 도덕률(혹은 '나'가 모인 '우리'의 도덕률)로 재단할 때, 그런 일들은 영원히 일어나서는 안 되고 또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결국 그 일들은 일어났다는 게 그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거짓말 하나 - '나'는 '나'가 아니다
헝가리 태생의 작가인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3부작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 1부에 해당하는 '비밀노트'에서는 온갖 비밀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쌍둥이인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가 함께 쓴 '비밀노트'에는 도둑질이나 폭력에서부터 살인과 방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이 낱낱이 기록되고, 이는 그러한 일들이 '우리'에 의해 그대로 자행되었음을 뜻한다. 그들은 전쟁 통에 할머니 댁에 맡겨지면서 할머니의 온갖 폭언과 구박에 시달리고, 선과 악의 혼돈 상황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나 그 자신만의 '비밀노트'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일들이 은밀히 숨겨져 있고, 작가는 이러한 비밀들을 감정을 배재한 채 지극히 담담하고 간결한, 그러나 대단히 매혹적인 문체로 풀어낸다.
물론 '우리'에 의해 자행된 반인륜적이기까지 한 일들은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 각각 2부와 3부에 해당하는 '타인의 증거'와 '50년간의 고독'을 통해 루카스와 클라우스의 기록들은 허구로 암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이 특정한 누군가에 의해 실제로 행해졌느냐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은밀한 '비밀(혹은 욕망)'들이 '나'의 의식 속에 존재했다는 데에 있다. 추악한 비밀들을 그저 숨겨둔 채 겉으로만 달리 행세한다고 해서 겉으로 드러난 '나'만이 그대로 '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쌍둥이들을 작중 화자로 내세워 '우리'로 서술한 것은 어쩌면 이렇듯 의식 속에 감추어둔 비밀과 행동의 이중성을 의도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이를 통해 작가는 '나'라는 존재가 지닌 모순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듯하다.
거짓말 둘 - '너'는 '너'가 아니다
2부인 '타인의 증거'에서는 유독 '타인'의 존재로부터 '나'의 존재를 증거 삼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불구의 몸을 지닌 소년은 잘 생긴 금발 소년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의 추악한 용모와 불구를 더욱 뚜렷이 인식하고, 서점 주인은 누나의 존재로 인해 자신이 글을 쓸 수 없다고 여기는 반면 누나는 자신의 희생이 모두 동생이 글을 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루카스는 클라우스가 반드시 생존해있음을 강하게 주장하며, 클라라는 여전히 남편의 잔영을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1부와는 달리 2부에서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비로소 각기 '이름'을 갖게 되지만, 이것은 '타인'으로서의 그들 각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나'의 실존을 규정짓는 하나의 표식이 되는 듯하다. 그리하여 심지어 서점 주인 빅토르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이렇게 묻는다. "내 누나의 시체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 거기에 내 것까지 보태야 하는 건가? 하지만 누가 그 두 번째 시체를 원하는 거야?"
모든 생존과 죽음은 '나' 스스로의 의식과 결정으로만 비롯되지 않고, 이러한 실존적인 문제를 결정짓는 주체는 오히려 '타인'이다.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하며, 혹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증오하며, 혹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또는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기를 원하며 '나'는 '타인'의 존재에 매달린다. '그들이', '그들은', '그들의', '그들을'. 유달리 굵은 글씨로 표시된 '그들'이라는 인칭대명사 속에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질식할 것만 같은 강박관념마저 느껴지며, 이러한 타인의 존재 속에서 독자는 문득 깨닫게 되는 듯하다. '너'는 그저 '타인'이 아니라 '나'를 규정하고 속박한다는 것을. 그것은 태생적으로 '나'와 구분되어야 할 '너'라는 존재가 지니는 모순처럼도 보인다. 요컨대, '너'는 그저 '너'가 아닌 셈이다.
거짓말 셋 - '나'는 '너'가 아니다
3부인 '50년간의 고독'에 이르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했던 사실들은 모호해지고, 모호한 듯하던 것들이 도리어 사실처럼 밝혀지기도 한다. 거짓말들이 쌓이고 모순은 중첩되며, 와중에 의미는 풍성해진다. 하지만 굳이 하나의 단어로 3부를 이야기하자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단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3부에서는 드디어 '우리'가 아닌, 또한 3인칭의 어느 '이름'이 아닌 '나'(클라우스)가 화자가 되는데, 이러한 형식 자체가 이미 분화된 혹은 단절된 쌍둥이의 의식 상태를 의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 단절을 조금 확장하면, 결국 '나는 너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원제가 '세 번째 거짓말'인 3부에서 세 번째 거짓말은 '나는 너가 아니다.'라는 당연한 전제로부터 비롯된다. 가령, 병원에서 요양 중인 아이들에게 전해진 편지에는 부모의 따뜻한 애정이 충만해 있는 것 같지만, 클라우스가 다시 멋대로 바꾸어 읽어주는 편지에는 잔인하고 냉정한 말들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설령 거짓일지라도 따뜻한 애정을 갈구하지만, 내가 원하는 감정이 상대에 의해서도 똑같이 공유된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거짓말을 야기한다. 마찬가지로, 평생 서로 함께 하기를 원했던 사라와 클라우스의 감정도, 루카스를 끊임없이 미화시키며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감정도, 다시 함께 하기를 원하는 루카스의 바람도 그래서 진실과는 멀어진다. 이는 결국 '나'의 존재는 '너'의 존재와는 다른 까닭이며, 이러한 '단절'은 현실의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인쇄소에서 찍어내는 "우리는 자유다."라는 표어가 상징하듯,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관한 냉소적인 은유로도 읽힌다.
진실 하나 - 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책 뒤에 수록된 '작가와 작품해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들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독자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그 체험들이 먼 이국의 역사적 배경 하에서 하나 같이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비추고 있는 것일지라도, 작품 속 인물들의 체험에 공감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은밀하게 자리한 추악한 비밀과 타인에 의해 강요되는 폭력과 근본적인 단절로 인한 고독 등, 인간의 존재가 초래한 그 어떤 일이든(혹은 그 어떤 거짓말이든), 그것은 결국 인간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이미 증명된 것에 다름 아니므로. 그리고, 그렇기에 그러한 체험이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말이야말로 가장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헝가리가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옛 마자르 격언에는 'Temetni tudunk'라는 말이 있다. 영어 단어 10개로도 완전한 번역이 어려운 이 말은 대체로 이렇게 번역된다고 한다. "사람을 어떻게 매장할까ㅡ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물론 되풀이된 헝가리의 폭력과 파괴의 역사 속에서 끌어올린 이 말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인간의 존재가 지닌 모순과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이 격언은 어쩐지 요긴할 것 같다. 그러니까 이 격언을 살짝 바꾸어서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는 의미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ㅡ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설령 그 세 가지 거짓말이 얼마나 참혹하고 적나라한 것이든, 그것이 우리가 이미 아는 사실이라는 것만큼은 명백한 진실이 아닐까. 그 진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을지라도.
가끔 내가 나임을 증명하기 위해 요구되는 서류뭉치라든가 플라스틱 조각을 볼 때면, 내가 아닌 그것들이 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모든 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질서 확립이라고 불리 우는 구역은 내 몸뚱이보다 그것들을 더욱 신뢰하기 때문이다. 주민번호, 은행 구좌, 직업, 졸업증명서 등등이 오히려 내 존재에 관한 더 큰 확신을 타인에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너무나 당연시 되었다. 그, 혹은 그녀의 존재는 그들의 몸뚱이가 아닌 그것들이 숨쉬어야만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실존주의는 한낱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파는 책 속에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오히려 사상가들은 이러한 세계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최소한 이 세계는 내가 나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 주었으니 말이다. 세상의 어떠한 종교도 이뤄내지 못 한 그 일을, 존재가 야기 시키는 혼란한 문제들을 이 세계가 그러한 방식으로 종결시킨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계는 아주 손쉽게 자기 존재에 관한 문제를 개인이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넘겨 버렸다. 개인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든 말든, 부정하든 말든, 수정하든 말든.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그런 존재의 인정과 부정, 그리고 수정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만큼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내용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것을 간결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한 문장들로 일궈낸 것이다. 그러한 문장들은 작가로서 미학적인 문장의 유혹을 어떻게 뿌리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만든다. 그만큼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만 보여줄 뿐이다.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보다 더욱 절제된 그녀의 문장들은 오직 사실만을 전하는 짧은 뉴스 기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심지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인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에서 만났던 ‘완벽한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아.’라는 부분에 대하여 반박을 가하고픈 생각까지 들게 한다.
‘소년이 국경을 넘고 있다. 그 남자가 앞장을 서고, 소년은 기다린다. 폭발. 소년은 다가간다. 그 남자는 두 번째 바리케이드 가까이에 누워 있다. 소년은 달린다. 소년은 앞서간 발자국을 되밟아가다가, 그 남자의 늘어져 있는 몸뚱이를 넘어서, 다른 나라 국경에 이르자, 숲 뒤에 숨는다.’
어떠한 군더더기도 없는 문장들의 연속이었다. 같은 작가의 다른 책 ‘아무튼’을 통해 만났던 문장들 보다 더욱 더 간결한 느낌이다. 하루키가 언급한 예의 문장에 ‘완벽한’이라고 불리는 수식어에 집착하지 않는 작가로서의 통렬함이 느껴질 정도다. 그 점에 대해 작가는 소설 속 문장에서 그러한 문체에 관한 자신의 생각(작품 해설부분을 보면 문체와 관련하여 더욱 확실한 작가의 생각을 알 수 있다.)을 독자에게 전하기도 한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이 책에는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 전쟁 때문에 난민이 되어 모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정착한 그녀의 삶이 상당부분 이 작품에 녹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상당히 풍성한 이야기 거리들로 담아냈다. 우선 쌍둥이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이 묘사된 책의 (상)권은 한 편의 잔혹동화를 읽는 듯 하다. 그리고 (중)권은 한 편의 전형적인 소설, 즉 쌍둥이로서가 아닌 한 명의 존재에 관한 인생역정이 펼쳐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권은 그 쌍둥이 형제에 얽힌 비밀스런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묘미를 선사한다.
그런데 그것을 크게 확대해서 보게 되면 작가가 액자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린 예의 존재에 관한 인정과 부정, 그리고 수정의 과정을 엿보게 된다. 즉, 소설 속의 누군가가 쓴 사실에 근거를 둔 이야기를 읽고는 있지만 어느 순간에 독자는 어느 것이 진실이고, 허구인지 헛갈리게 되며, 결국 이 이야기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 자문하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결국 모든 존재는 확실함 속에 불확실함을 껴안고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남겨지게 됨을 느끼기 시작한다. 자의와 타의에 의해, 이것이 나라고 하는 인정, 이것은 내가 아니라고 하는 부정, 그런 사이에서 수정되어 가는 자신들을 돌아보는 존재로서.
그러고 보면 인간은 내적인 존재와 외적인 존재, 그 각각의 두 가지가 모두 모여 이뤄진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적인 성장과 외적인 성장이 다르듯,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과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이 다르듯, 그 과정 속에서 그러한 순간에 표현되어 진 자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각인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소설에서 보면 어린 쌍둥이 형제가 힘든 삶을 이겨내기 위해 여러 가지 훈련 및 연습들을 스스로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체훈련, 단식훈련, 잔혹훈련, 구걸연습, 장님과 귀머거리 연습 등등…. 결과적으로 그것은 육체가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감정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키기 위한 그들만의 방식으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욕을 하도록 행동하고는, 우리가 정말 끄덕 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옛날에 듣던 말들이 생각났다…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 금쪽같은 내 새끼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떠올릴 적마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정신훈련을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난 너희를 사랑해. ……너희가 내 인생의 전부야.…… 반복하다보니 이런 말들도 차츰 그 의미를 잃고 그것들이 가져다주던 고통도 줄어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훈련하고 나니 이제 삼각 숄로 눈을 가리거나 풀뭉치로 귀를 막지 않아도 된다. 장님 역은 시선을 내부로 돌리면 그만이고, 귀머거리 역은 온갖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면 그만이다.’
‘우리는 뜰에서 부동자세 훈련을 하고 있었다.…… -장교님은 너희들 훈련 많이 한단다. 다른 훈련들도. 그는 너희들 혁대로 때리는 거 봤다. -그건 신체단련 연습이었어요. -장교님 묻는다, 너희들 왜 그런 거 하는가? -고통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요.’
우리는 어쩌면 미화되어 있기 만한 세상에 머물러 있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어둠을 직시하지 않도록 스스로 빛을 내어 발광하는 그런 희망과 행복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것은 허물어지기가 너무 쉬우며 그로인해 압사되어지는 일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어느 존재에게나 드리워진 운명의 장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빛도 필요하지만 어둠도 필요하다. 쌍둥이가 서로에게 빛이 되기도 하고 어둠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서로 다른 존재였지만 하나의 존재이기도 했던 그들처럼.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은 상당 부분 차가운 어둠으로 채워져 있다. 세상에 태어나 하나의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각자 애를 쓰며 살아왔음에도 서로가 그런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슬픈 아이러니로.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역설로 다가온다. 운명의 장난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존재에 햇빛 차단제를 바르는 것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