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평과 소설을 제한 <김수영 전집2:산문>을 단속적으로 읽었다. 순수참여 논쟁 당시 김수영은 참여 쪽 인사로 분류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몇몇 글을 읽어보니 오히려 그는 당시로는 보기드물었을 상식적인 우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연전에 읽었던,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의 입장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정에 부정을 거듭함으로써 문학에서의 자유를 구가하려던 점, 순수 참여를 떠나 읽을만한 작품인지를 먼저 살폈던 점 등이 그러하다. 그에게 당시의 순수시는 난해시로, 참여시는 힘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작품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가 시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 밀고 나감은 부정의 정신이었고, 결국 자유를 향한 정신이었다. 난해시든, 참여시든,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그는 무엇보다도 양심있는 작품을 요구했다. 요컨대 그에게 양심은 자기검열 없는 반동성이었다. 그 반동성은 반동을 반동하는, 계속되는 반동이다. 박인환으로 대표되는 <포즈>를 줏대로 하는 시인들과 검열에 주눅든 또는 정치적 격문에 도취된 시인들이 그의 경멸의 대상이 된다.
기본적인 정치적 자유조차 억압되어 있는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가해지는 자발적 자기검열을 향한 격분이 그의 참여시 옹호로 이어졌나 보다. 김현의 말대로 그는 자유를 자유 그것으로 말하지 않고, 자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말함으로써 자유를 지향한다. 정치적 자유가 지적됨은 따라서 당연하다. <내용>과 <형식>에 대한 김수영의 정의가 사실 내게는 조금 모호하게 느껴졌지만, <형식>이 아무리 자유롭다 하더라도 <내용>은 <형식>의 부자유를 끊임없이 지적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에 공명했다. 논리적인 동조라기 보다는 감정적인 공감이다. 누구든 그가 문인이라면, 예술가라면 자유를 향한 민감한 촉수가 그의 예술가 됨의 기본요건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완벽한 자유의 구가가 불가능한 꿈이라 하더라도, 자유의 불가능을 지적함으로 자유의 새 지평을 열어주는 역할을 예술가는 마땅히 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김수영에 이르러 자유는 자유의 불가능으로 가능하다. 시가 배고프게 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자크 마르땡의 언사처럼, 자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위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엔 김현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그는 어느 글에서 질문의 가능성에 삶과 문학의 의의가 내장되어 있음을 지적한 적이 있다.
김수영은 사물을 가급적 외부에서 보려고 한다. 거리를 두고 남의 시를 보듯 자기 시를 보고 싶어 하고, 객관의 눈으로 사물의 됨됨이를 따지려 한다. 그 외부는 냉담하고 거침없는 필설의 대상이 된다. 그는 시를 밀고 나가야 하며 당세 한국의 문화적 풍토를 밀고 나가야 한다. 여유가 없다. <번역자의 고독>에서 말해지는 한국 번역의 실상은 그를 자포자기하게 하며, 어느 시월평에서와 같은 자탄을 자아낸다. 그의 대답은 <모르겠다!>이다. 절망의 수렁을 한마디 입바른 소리로 나무라는 <고급속물>들과 싸우기에도 넌더리가 난다. 하지만 그는 생계를 위해 번역을 계속 할 수밖에 없으며, 이 땅에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 자탄과 더불어 밀고 나갈 것이다. 그 누구도 맡기지 않은 짐에 내리 눌리며 탄식할 것이다. 사물의 자발적 탈각을 조장할 것이다. 이것은 밖, 밖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의 눈은 밖에 있다. 아니다. 그는 사물을 가급적 내부에서 보려고 한다. 내부의 모습은 쓸쓸하고 그만큼 상스럽다. 가족과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이 내부의 모습이다. 담배값의 메모와 양계에서 비롯되는 생계의 지리함과 잡다함은 소설의 세계다. 이 세계는 아늑하고 여유있다. 이것은 악인가. 그렇지 않다. 인정할만한 여유다. 이 또한 사랑의 지평 위에 놓여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긴장을 놓치는 것만 같고, 시를 쓰는 데 특별한 애로를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이 또한 세상의 한 풍경이라면 인정할만하다. 인정할만한가. 자유의 억압을 목전에 두고 주저할 수 있는가. 이게 양심인가. 그의 산문은 이 딜레마의 자장 위에 놓여있다.
그는 <시는 행동>이라 말하지만, 그 행동은 다분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그 행동은 자유를 향한 행동일텐데, 시 속에서의 행동으로 생각된다. 그는 천상 시인이다. 그의 양심이 정치적 양심이라기보다 시인의 양심을 지칭하듯, 시인의 양심이 시를 벗어난 양심이 될 수 없듯, 그의 행동은 시적 행동이다. 그 행동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고, 시 속에서의 부정의 정신, <反詩論>의 태도다. 결국 정신과 태도가 행동을 결정한다. 사르트르의 시에 대한 입장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나로서는 이런 그가 잘못됐다고 생각지 않는다. 시라는 <형식> 속에서 최선을 다한 그이기 때문이다.
(이어령이 그 문체만으로 당대 문학판에 기여한 바 크다는 평판을 어디에서 들었던 것 같다. 산문 속에 인용된 몇몇 글을 보니 그 평판이 과연 옳다. 문법적 오문도 많을 뿐더러 포즈만 가득하다고 느껴지는 문장들이 많다. 어느 글에서는 김수영도 이 대열에 예외가 아닌 듯한 인상을 준다. 일본어 세대인 탓도 크리라. 한국어에 설어 원고 한 장 쓰는데 사전을 두 세번을 뒤적여야 한다고 김수영은 불평하고 있지 않던가. 동년배 문인들. 이어령, 유종호, 박이문의 노고가 새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