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 - 영혼과 매혹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한재호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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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을 앞두고도 손택은 나이 든 여성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앤드루 와일리는 말한다. ˝만년에도 손택은 여전히 스물한 살 같았습니다. 언제나 모르는 것에 관심이 있었죠. 많은 사람이 만년에 이르면 자기가 아는 것에 의존하죠. 하지만 수전은 어제 태어나서 여전히 온 세상이 신세계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손택은 나이를 ‘기괴한 것‘이라고 불렀다. 그는 평생 해온 일을 여전히 하고 있었다. 손택은 60대 후반에도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며,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예술과 정치의 새로운 발전을 접하고 흥분할 줄 알았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살았다.(p.399~400)

신좌파와 과감히 결별한 뒤 정치적 방향성을 새로이 정하려는 욕구도 분명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대규모 정치운동을 지지하는 대신, 이제 그는 좀더 현실적인 프로젝트에 가담했다. 다른 작가들과 함께 전 세계의 수감된 작가들의 글을 읽는 공개 낭독회를 조직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수감된 헝가리 소수당 지도자 미클로시 두러이와 터키에서 수감된 평화운동 당원 알리 타이군, 폴란드에서 투옥된 문학 교수 즈비그니에프 레비츠키, 대한민국의 김현장가 김남주를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감동적인 서한의 초안을 작성하고 서명해 편집자에게 보냈다. 또 헝가리의 시인 겸 정치가 샨도르 레자크를 박해하는 데 항의했다. 벵골 시인 다우드 하이더를 방글라데시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는 데 항의하는 운동도 벌였는데, 방글라데시에서는 이슬람교도 민병대가 그를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다. 네이딘 고디머는 이런 현실 참여가 손택에게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도덕적 의무였다고 말한다. ˝수전은 자기가 가진 지성의 힘을 수많은 대의명분을 위해 싸우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단지 개인으로만 살아가기를 거부하기로 했죠. 이것은 수전에게 실존적인 딜레마였고, 그는 다른 작가들과는 달랐어요. (...)단순히 작가로만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편견과 억압에 저항하는 일에 공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책임감을 느꼈어요.˝(p323~324)

* 수전 손택(1933~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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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역사 - 현대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만든 근대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 2
전우용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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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모양처賢母良妻(wise mother and good wife)'는 유교 가부장제가 만들어 낸 이상적 여성의 전형이 아니었으며, 설령 그렇다 해도 신사임당은 그 기준에 맞지 않았다. 유교가 여성에게 가르친 기본 덕목은 '삼종지도三從之道'였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자식에게 순종하는 것이 여성이 평생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이다. 순종은 자아를 용납하지 않으며 독립적 사유를 배척한다.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질은 '말 잘 듣는 것'뿐이다. 그에 반해 현모양처는 여성이 도달해야 할 지향점과 길러야 할 자질을 제시하며 남편과 자식을 보조하는 형식으로나마 여성에게 자율과 능동의 영역을 허용한다.

현모양처론은 중세 유교의 덕목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창안되어 20세기 초 한국에 유입된 천황제 국민국가의 여성관이다. 일본 천황제 국민국가가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은 남성이 나라에만 충성할 수 있도록 뒤에서 가정을 맡아 꾸리며 자식을 충성스러운 미래의 신민臣民으로 기르는 일이었다. 현모양처라는 용어는 성인 남성을 가정에서 완전히 이탈시켜 천황에 직속된 신민의 일원이라는 자격만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가정에 생긴 '권위의 공백'을 제국 신민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자각한 여성의 자발적 헌신으로 메우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p.76~77)

쌀은 밀, 옥수수와 더불어 세계 3대 곡물로 꼽힌다. 오늘날 전 세계 경지 면적의 약 20퍼센트가 논이며, 세계 총 농업 생산고의 약 26퍼센트가 쌀이다. 쌀은 다른 곡물에 비해 인구 부양력이 특히 커서 쌀을 주식으로 삼는 지역은 어디나 인구밀도가 높다. 당장 세계 최고의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중국,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일본 한국 등이 주된 쌀 소비국이다. 밀은 경작 면적에서 32퍼센트로 1위지만 전 세계 인구의 10퍼센트 정도만이 주식으로 삼는 데 비해, 쌀을 주식으로 삼는 인구는 전 인류의 35퍼센트에 달한다.

쌀 경작은 적도 부근의 아시아에서 기원했고, 지금도 전 세계 쌀의 90퍼센트가 이 지역에서 생산된다. 한국은 쌀 생산 지대의 맨 북쪽에 해당한다. 한반도 사람들이 쌀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00년경이었고, 쌀을 주식으로 삼은 것은 그로부터 1,000여 년 뒤였다. 그런데 한반도는 벼농사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여름이 짧고 강수량이 적은데다가 벼가 한창 생장할 5~6월에는 가물기 일쑤고, 수확을 앞둔 8~9월에는 수시로 태풍이 밀어닥쳤다. 그래서 한반도에 정착한 고대인들의 최대 실수는 쌀을 주곡으로 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동남아시아 아열대 기후 지역에서는 1년에 2~3차례나 수확하는 쌀을 한 번밖에 수확하지 못했으니,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들이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p110~111)

* 왕조나 영웅으로 대변되는 역사는 넘친다. 이 책은 근대를 살았던 이름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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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윤고은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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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난 이십대였어. 힘 쓰는 거 하나는 자신 있었다구."
그 힘도 이미 잘못 고정한 것을 고치는 데는 소용이 없었다. 에이미는 결국 그 문짝 때문에 당신을 떠났다. 에이미가 떠난 과정보다는 에이미가 떠나고 남은 빈자리에 대해 당신은 오래, 공들여 묘사했다. 에이미는 잠깐 당신의 삶에 나타났던 신기루였다. 당신이 그 집을 나와야 에이미가 다시 그 집으로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한 당신은 그렇게 집을 떠나, 몇년 만에 거리로 나섰다. 그때 머물렀던 곳이 여기 썬셋 비치 부근이었는데, 매일 바다에 나와 앉아있는 게 일이었다.

"그때 나를 구원한 건 파도였어. 나도 파도 타는 법을 배울 수 있었지. 그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빌리였어. 빌리는 하와이에 온 다음 써핑을 많이 배웠던 모양이야. 우리가 처음 만난 게 바로 여기, 써핑 포인트였지. 그때 빌리는 파도 위를 날고 있었고,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어."(p.57~58)

당신 역시 『넥스트 호놀룰루』를 활용하는 노숙자 중 한명이었다. 당신은 어제의 기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건 파라세일링을 하다가 죽은 남자에 관한 것이었다. 신혼여행이었기 때문에 유족들은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쌍의 남녀가 구명조끼를 입고 하늘로 솟아올랐는데, 마치 거미처럼 보이던 그들이 바다 위를 달린 지 이분 만에 사고가 났다. 파라세일의 줄이 근방을 달리던 제트스키와 얽히면서 생긴 사고였다. 남자는 죽고 여자는 가까스로 살았는데, 남겨진 여자의 모습은 절반의 확률로 살아난 것을 안도해야 하는지, 절망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사고경위서라든지 사망확인서, 방부처리확인서 같은 서류들을 여자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줄거리를 한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사소한 일들로 죽는다. 사십년째 반복해 걷던 산책로에서 죽기도 하고 파도를 즐기다가 죽기도 하고 다이빙을 하려던 찰나에 죽기도 한다. 말싸움이나 교통사고, 식중독, 개에 물리는 사고로도 죽는다.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예츠할 수는 없다. 예측하지 못하게 태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은 예측하지 못한 일들로 죽는다. 이곳이 낙원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없다.(p.48~49)

* 표제작 「알로하」의 일부를 옮겨다 적는다. 표제작 알로하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라 생각하며 읽었다. 한국소설의 무대가 된 배경을 찾아가며 기행을 했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코로나가 끝나면 하와이를 찾아가고 싶다는 즉흥적인 욕구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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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산 - 이제는 안다. 힘들어서 좋았다는 걸 아무튼 시리즈 29
장보영 지음 / 코난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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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견 출판사는 그 어떤 모험도 실수도 허락하지 않았다. 원로 문인들이 쓴 장편소설을 중쇄하며 현상 유지에 만족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내삶도 굳어갔다. 매달 말이면 한 달을 일한 대가로 월급이 들어왔고, 저녁 6시 30분이면 퇴근해서 이런저런 강의도 들었다. 또 주말이면 어김없이 산에도 올랐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출근길에 마시는 아메리카노 같은 거였다. 잠시는 잊을 수 있고 벗어날 수 있지만 그저 그때뿐인 것들, 나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앞으로의 내 삶이 두려웠다.

한 달 뒤 나는 회사를 나왔다. 한 번도 멈춘 적 없이 달려온 삶이었다. 대학 시절에는 휴학 한 번 하지 않았고, 졸업과 종시에 대학원에 입학했고, 또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했다. 그렇게 정해진 모범 노선에서 단 한 번 이탈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왔다.

그런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크고 높은 산에 가고 싶다는, 언제나 내 마음 가득 차올라 있던 그 소리를. 나는 생각했다. 산은 눈으로, 추억으로, 상상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심장으로, 가슴으로, 두 다리로 올라야 한다고.

이튿날, 네팔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일주일 뒤에 떠나는 일정이었다. 준비도 계획도 오래전부터 되어 있었다. 공과금이 다달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카드에 여윳돈을 채워뒀다. 집주인에게 사정을 전해 두 달 치 월세를 미리 입금했다. 그동안 돌보지 못한 집 안 구석구석을 정리했다. 마음을 다잡으며 매일 일기를 썼다. 미용실에 들러 그동안 기른 머리로 짧게 잘랐다. 그리고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에게 나의 근황을 알렸다. '네팔에 간다'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때 얼마나 두근대던지. 얼마나 세상에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p.32~34)

* 『아무튼, 택시』를 읽고 난 뒤의 아무튼이라 그런지 등산을 하는 심정으로 우직하게 쓴 글이라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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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쓰고 바다가 그려주다 - 홀로 먼 길을 가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함민복 지음 / 시공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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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제법 까부는데......"
"물이 까분데야?"
고 선장이 한마디 던지자 말이 재미있던지 자선이가 웃으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도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이상했어. 뱃사람들은 바다에 대해 항상 겸손하거든. 그러다가도 파도가 일단 일면 바다를 낮춰 보는 거 있지. 어차피 헤쳐나아가야 할 파도라서 그런가 봐. 바다를 낮춰 말하며 자기가 강하다고 자기 최면을 거나 봐. 일종의 주술 같아."
모시조개를 냄비에 넣고 왈가닥탕을 끓였다. 매운 고추와 파를 넣고 살짝 더 끓인 뒤 불을 껐다.
"추운데 국물 좀 드세요."
해가 안 나고 바람이 불면 한여름에도 바다는 춥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도 바람이 조금만 나도 갑판에 친 그늘막 아래는 추워서, 편히 쉬려면 머리나 다리 쪽 중 한쪽을 그늘 밖으로 내놓아야 한다. 갑판에 둘러앉아 조개 국물과 소주로 속을 풀었다.(p.30~31)


***
긍정적인 밥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주인집 아주머니가 주말에 와 텃밭을 가꾸며 심어놓은 옥수수 대궁들이 장마철 비바람에 일제히 쓰러졌다. 옥수수 대궁들을 줄로 잡아매며 강제로 일으켜 세우다 뿌리가 끊어져 그만두고 동네 친구 세 명에게 물어보았다. 두 명은 못 일어난다고 했고 한 명은 스스로 일어선다고 했다. 판단을 내릴 수 없어 할머니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냥 내비려둬. 옥수수들이 다 알아서 일어나. 괜히 강제로 일으켜 세우면 옥수수통 끝 알이 잘 여물지 않고 쭉정이가 돼. 주접이 든다구."
땅바닥에 쫙 깔렸던 옥수수 대궁이 삼사 일 지나자 할머니 말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옥수수들이, 지게꾼이 지게 작대기로 땅을 짚고 일어서듯 겉뿌리를 뻗어 땅을 짚고 일어섰다. 쓰러지며 뿌리가 많이 끊어진 대궁은 비스듬히 일어섰고 그렇지 않은 대궁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툭툭 털고 곧게 일어섰다.(p.210~211)


* 함민복을 읽으면, 한창훈이 생각나고 또 곽재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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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21-08-21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주접든다, 저럴 때 쓰는 말이군요! 어르신들 살아있는 말 들으면 들썩들썩 마음이 나대요. 책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

2021-08-23 0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