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 마종기 시작詩作 에세이
마종기 지음 / 비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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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의 강 /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치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시읽는_신학도‬


*죽고 사는 일이 가벼워진 세상이나, 나는 홀로 이 무게를 견디며 살았다.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 역시 한없이 무거운 일임을 믿는다. 큰강 하나 만들기에도 부족한 인생이라, 가벼운 세상에서 무거운 삶을 사는 이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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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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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밤 /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 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개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개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길을 나는 걷고 있는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시읽는_신학도‬


*이 시는 첫 연으로 충분하다. 사랑은 그런 거다. 너에게 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쳐도 너에게로만 가는 나의 길. 신을 떠나려고 몸부림치는 이들을 보며 내가 애달픈 공감을 느끼는 이유도 그와 같을 것이다. 그 몸부림이 실은 신을 향하는 것으로 보이니까. 니체야말로 자신의 온몸으로 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한 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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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시 석문면 통정리, 석문교회 

저희교회는 충남 당진시 석문면 통정리에 있는 '석문교회'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가려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당진행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30분 가서 당진버스터미널에서 내립니다. 그리고 30분마다 한 대씩 있는 고대-석문-왜목마을로 가는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석문면사무소있는 통정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내리면 걸어서 2분만에 저희 교회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꽤 먼 거리인데요. 더 중요한 건 터미널에서 석문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930분이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930분이 되면 차 없이는 다닐 수가 없게 되죠. 석문면은 당진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자전거길이나 인도가 없거든요. 무조건 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차를 타고 들어간다고 해도 통정리에 930분 이후에 불이 켜져 있는 상점은  단 하나있는 편의점뿐입니다. 거리에 가로등이 없기 때문에 달빛을 보고 걸어야 하고요. 930분 이후로는 갈 곳도 없습니다. 얼마나 시골인지 아시겠지요?

 

어린이 도서관이 필요한 귀엽고 순수한 아이들 

마을주민 대부분이 나이가 많으시다보니까 상대적으로 어린아이들, 중고등학생들을 보기가 힘들어요. 가까운 곳에 작은 초등학교가 하나 있고요. 중학교를 가려면 역시 걸어서는 갈 수 없는 곳, 차를 타고 가야해요. 고등학교는 당진시까지 가야하고요. 그래서 어린이와 중고등학생들이 매우 적답니다. 초등학생은 10-14명 정도이고, 중고등학은 2-3명 정도예요. 초등학생들은 전부 마을 앞에 있는 시골 초등학교에 다니고요. 그래서 아이들이 서로 아주 잘 안답니다. 매일 만나는 거죠. 그래서 그런지 서로 경계심이 별로 없고 허물없이 밝고 친하게 지낸답니다. 어린 주위에 중고등학교가 없다보니까 중고등학생들은 더 보기가 힘들어요. 목사님 딸, 장로님 아들, 목사님 딸 친구가 전부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은 수줍음이 많아요. 언제 어디서건 말없이 조용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많으면 서로 신나게 대화할텐데, 오빠 하나에 여동생 둘이라 서로 어색한가봐요. 그래도 아이들 얼굴에 어두운 구석이 없어요. 그만큼 마음이 순수한다는 거겠죠?

 

아이들에게 책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있는 마을에는 도서관이 없습니다. 당연히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도 없고요. 책을 읽을 공간도 없습니다. 도서관을 가려면 당진시내까지 차를 타고 20분은 가야합니다. 작은교회프로젝트를 통해 시골의 작은 교회에, 순수하고 수줍음 많은 우리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더 넓은 세계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깊은 신앙의 우물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아래 사진은 '사도신경' 암송대회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가졌던 '미니올림픽'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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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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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인(死因)은


어렵지 않은 단어들이지만 시인의 마음을 붙잡기가 쉽지는 않다. 나같이 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첫 시집이 신동엽 문학상을 받은 시인의 시도 잘도 이해 못한다. 현대시(詩)도 현대 미술과 같이 역사적인 맥락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시어(詩語) 하나하나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을 과감히 포기하고 무심한 듯 이해되거나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상념이나 느낌을 붙잡는 게 좋겠다 싶다. 그러니까 ‘다 이해되지 않은 그 자체’로 나의 시읽기를 만족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다. 

시를 즐겨 읽는 것은 아니나 보들레르의 시가 정확히 그랬다. 그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의 당혹감을 잊을 수 없다. 왜 시를 이렇게 쓴 건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어쩌면 나의 반응이 보들레르가 의도하고 예상했던 반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모든 근대인들, 근대시에 익숙한 모든 이들에게 ‘당혹스러움의 주먹’을 휘둘렀던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시를 썼으니 그럴 것이다. 나도 그 주먹에 제대로 맞았으니, 내가 그의 시를 가장 정확히 읽은 것은 아닐지라도 가장 적절히 읽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평론가 신형철이 그랬다. 어떤 시는 제목으로 끝장나는 경우가 있다고. 그리고 시인 박준의 이 시가 그런 시라고 했다. 그러니 오늘 이 시의 제목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겠다.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 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

이곳에서 당신의 새벽을 추모하는 방식은 두 번 다시 새벽과 마주하지 않거나 그 마주침을 어떻게 그만두어야 할까 고민하다 잠이 드는 것

요와 홑청 이불 사이에 헤어 드라이어의 더운 바람을 틀어넣으면 눅눅한 가슴을 가진 네가 그립다가 살 만했던 광장의 한때는 역시 우리의 본적과 사이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고

나는 냉장고의 온도를 강냉으로 돌리고 그 방에서 살아나왔다

내가 번듯한 날들을 모르는 것처럼 이 버튼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맥주나 음료수를 넣어두고 왜 차가워지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낯빛을 여관의 방들은 곧잘 하고 있다

"다시 와, 가기만 하고 안 오면 안 돼"라고 말하던 여자의 질긴 음성은 늘 내 곁에 내근內勤하는 것이어서

나는 낯선 방들에서도 금새 잠드는 버릇이 있고 매번 같은 꿈을 꿀 수도 있었다

_ 『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전문

 

 


언젠가부터 나는 ‘믿는 사람’을 믿지 않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과 나의 믿음을 의심했다. 내가 믿는다고 고백한 그 고백의 실체와 그들이 고백한 그 고백을 날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믿는다는 사람들의 믿음은 주일성수이거나, 십일조이거나, 순종이거나, 혼전순결이거나, 기도이거나, 손을 들고 찬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일성수’는 그저 시간을 때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 출석이거나 인간관계를 끊고 싶지 않은 마음을 못이긴 것이었고, ‘십일조’는 위험 부담 없이 베풀 수 있는 기부였고, ‘순종’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목사의 말에 대해서 그런 것이었고, ‘혼전순결’은 도덕이라곤 성(性)도덕밖에 모르는 이들의 윤리적 우월감을 위한 도취였고, ‘기도’는 최근에야 유행하게 된 8분짜리 공개 강연이었고, ‘손을 들고 찬양’하는 일은 음악적 소양을 지닌 이들의 감상에 지나지 않았다. 내 의심은 정당했다. 우리의 믿음에서 나는 믿음의 실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이 지극한 사랑의 언어에 나는 황홀하다. 사랑이 고백의 언어라면 이 고백은 죽음을 동반한 고백이다. 죽음을 동반한 고백은 사랑이 죽음 같이 강하다(아8:6)는 것을 입증한다. 예수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15:13)고 했던가. 그래서 그는 인간의 친구가 되었고, 인간을 위해 죽었나.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의 믿음도, 고백도, 사랑의 실체도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나의 사인(死因)은 예수와 같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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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행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395
조용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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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한 청년의 사랑: 조용미의 "헛되이 나는"을 읽고


헛되이 나는 _조용미
  
헛되이 나는 너의 얼굴을 보러 수많은 생을 헤매었다
거듭 태어나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위미리 동백 보러 가 아픈 몸 그러안고서도, 큰엉해안이나 말미오름에서도, 빙하기 순록과 황곰 뼈의 화석이 나온 빌레못동굴 앞에까지 와서도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저 멀구슬나무나 담팔수, 먼나무가 당신과 아무 상관없다고 확신할 수 없는 이 생이다
너에게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가지 않으려고

헛되이 나는, 이 먼 곳까지 왔다

-

제목에서 사용된 ‘헛되이’와 ‘나는’은 각각 부사와 주어라는 품사의 옷을 입었다. 부사와 주어가 나란히 놓인 구(句)가 이 시의 제목이다. 우리말 문장에서 주어는 맨 앞에 나오는 것이 통상적인데 여기서는 주어가 맨 뒤에 있다. “헛되이 나는”이라는 제목은 아름다운 성경책 전도서의 한 구절을 보는듯하다. 그러나 부사와 주어로 구성된 이 제목은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의 외침과는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다. 코헬렛은 이렇게 노래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장2절) 어느 시인은 다시 보면 예쁘다고 했던가. 이 구절은 다시 보아도 어지럽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어지럽고 아득한 이유는 코헬렛이 헛되다는 말을 원인, 결론, 반복 등의 수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세계’를 완벽하게 정의했다. 그런데 코헬렛이 이 문장을 통해 ‘세계’의 헛됨을 해설했다면, 시인은 세계가 아닌 ‘나’를 해설하고 있다. 이 해설은 노래(詩)인 해설이다. 코헬렛은 세계가 헛되다고 노래하고, 시인은 내가 헛되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노래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코헬렛의 눈은 세계를 응시하고 있어 세계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시인은 세계가 아닌 세계의 주체가 되는 자신 ‘나’를 응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같은 노래를 부르는 듯하나 피치(pitch)과 옥타브(octave)가 다른 셈이다. 코헬렛이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남성의 목소리를 지닌 반면, 시인은 근대 이후 여성의 목소리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둘의 목소리가 혼성듀엣의 하모니처럼 들릴지도. 그 가락는 귀를 매혹하고, 언어는 정신을 위협한다.

코헬렛의 수사는 잔인하다. ‘~며’, ‘~니’, ‘~다’ 지속, 원인, 결과로 논리적인 빈틈이 없다. 반면 시인의 수사는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다. 시인의 헛됨이 부사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사는 문장에서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데 문장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만 필요한 품사이다. 시인은 세계가 헛되다는 것에 동의하나 ‘나’가 헛되다는 것엔 아름다운 브로치(Brooch)를 씌워주고 싶었던 것일까. 시인의 아름다움은 제목의 여백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말 문장에서 주어는 맨 앞에 나오는 것이 통상적인데 여기서는 주어가 맨 뒤에 있다. 대개의 시들이 하나의 단어 혹은 구(句)로 제목을 정하기 때문에 특별할 것이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시의 제목엔 특별한 여운이 느껴진다. 그 여운이 소위 ‘여백의 미’가 된다. 시인이 ‘헛되이 나는’ 하고는 한 숨을 쉰 뒤 문장의 나머지를 말할 것만 같기도 하고 또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을 이어서 할까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옅은 아이보리 빛깔의 화선지에 생(生)이라는 작은 점(占)을 묵화(墨畫)로 그리고 남은 거대한 여백과 같이 “헛되이 나는” 뒤에 투명한 품사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을 것만 같다.

시의 제목을 자의적으로 난도질 했으나 어쩔 수 없다. 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글은 자기 길을 간다. 아니다. 어쩌면 이 글이 제 길을 가는 것이 시인의 의도일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의 잔인하고 아름다운 헛된 ‘나’는 시의 본문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자태를 드러낸다. “헛되이 나는 너의 얼굴을 보러 수많은 생을 헤매었다 / 거듭 태어나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내가 헛된 이유 먹먹하다. 내가 “너의 얼굴”을 보기 위해 헤맸기 때문이고, 너를 사랑한 죄로 이미 나는 죽었으나 다시 태어나도 또 너를 사랑할 것이기에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던 것이다. 나의 생은 온통 너로 인해 헤매고 괴로워하였기에 헛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물론 나는 시인이거나 시적 화자(話者)이겠으나, 나는 엉뚱하게도 시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천년 전 이 땅을 밟은 한 ‘청년’을 떠올렸다. 나는 이 시를 그가 부른 노래처럼 들었다. 그는 사랑하고 괴로웠던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그 청년은 세계를 사랑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하나의 인간을 사랑했다. 그는 루터가 말했듯, 본회퍼가 말했듯 나를 위한(pro me)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베들레헴, 예루살렘, 갈릴리, 사마리아를 헤맨 것은 나 때문이었고, 십자가에 고꾸라진 후 다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이 시는 그의 노래이다.

그러나 다시, 나는 이 시를 그 청년을 사랑한 나의 노래로 삼았다. 나 역시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헤매었고, 무거운 생을 이끌고 그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닭이 운 후의 베드로처럼 그를 잊기 위해 멀리 도망갔다. “위미리 동백 보러” 간 곳이나 “큰엉해안”, “말미오름” 있는 곳, 심지어 “빙하기 순록과 황곰 뼈의 화석이 나온 빌레못동굴 앞”까지 나는 필사적으로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삶의 어느 곳, 삶의 어느 순간에서 만나는 그 어떤 것도 “당신과 아무 상관없다고 확신할 수 없”기에, 어디에서도 나는 당신과 고목의 뿌리처럼 땅 밑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피할 수 없기에, 당신과 나는 운명처럼, 필연처럼, 예정처럼 뗄 수 없는 사이라고. 나는 그저 프란시스 잠이 고백했던 것처럼 고백할 뿐이다. “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괴로워하고 사랑하나이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결국 나의 존재와 당위는 그로부터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가지 않으려고” 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운명이 헛헛하다.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으로 멀리 도망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품에 안길만큼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 한 채 헛되이 나는 “이 먼 곳까지” 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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