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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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인(死因)은


어렵지 않은 단어들이지만 시인의 마음을 붙잡기가 쉽지는 않다. 나같이 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첫 시집이 신동엽 문학상을 받은 시인의 시도 잘도 이해 못한다. 현대시(詩)도 현대 미술과 같이 역사적인 맥락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시어(詩語) 하나하나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을 과감히 포기하고 무심한 듯 이해되거나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상념이나 느낌을 붙잡는 게 좋겠다 싶다. 그러니까 ‘다 이해되지 않은 그 자체’로 나의 시읽기를 만족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다. 

시를 즐겨 읽는 것은 아니나 보들레르의 시가 정확히 그랬다. 그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의 당혹감을 잊을 수 없다. 왜 시를 이렇게 쓴 건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어쩌면 나의 반응이 보들레르가 의도하고 예상했던 반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모든 근대인들, 근대시에 익숙한 모든 이들에게 ‘당혹스러움의 주먹’을 휘둘렀던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시를 썼으니 그럴 것이다. 나도 그 주먹에 제대로 맞았으니, 내가 그의 시를 가장 정확히 읽은 것은 아닐지라도 가장 적절히 읽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평론가 신형철이 그랬다. 어떤 시는 제목으로 끝장나는 경우가 있다고. 그리고 시인 박준의 이 시가 그런 시라고 했다. 그러니 오늘 이 시의 제목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겠다.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 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

이곳에서 당신의 새벽을 추모하는 방식은 두 번 다시 새벽과 마주하지 않거나 그 마주침을 어떻게 그만두어야 할까 고민하다 잠이 드는 것

요와 홑청 이불 사이에 헤어 드라이어의 더운 바람을 틀어넣으면 눅눅한 가슴을 가진 네가 그립다가 살 만했던 광장의 한때는 역시 우리의 본적과 사이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고

나는 냉장고의 온도를 강냉으로 돌리고 그 방에서 살아나왔다

내가 번듯한 날들을 모르는 것처럼 이 버튼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맥주나 음료수를 넣어두고 왜 차가워지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낯빛을 여관의 방들은 곧잘 하고 있다

"다시 와, 가기만 하고 안 오면 안 돼"라고 말하던 여자의 질긴 음성은 늘 내 곁에 내근內勤하는 것이어서

나는 낯선 방들에서도 금새 잠드는 버릇이 있고 매번 같은 꿈을 꿀 수도 있었다

_ 『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전문

 

 


언젠가부터 나는 ‘믿는 사람’을 믿지 않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과 나의 믿음을 의심했다. 내가 믿는다고 고백한 그 고백의 실체와 그들이 고백한 그 고백을 날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믿는다는 사람들의 믿음은 주일성수이거나, 십일조이거나, 순종이거나, 혼전순결이거나, 기도이거나, 손을 들고 찬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일성수’는 그저 시간을 때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 출석이거나 인간관계를 끊고 싶지 않은 마음을 못이긴 것이었고, ‘십일조’는 위험 부담 없이 베풀 수 있는 기부였고, ‘순종’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목사의 말에 대해서 그런 것이었고, ‘혼전순결’은 도덕이라곤 성(性)도덕밖에 모르는 이들의 윤리적 우월감을 위한 도취였고, ‘기도’는 최근에야 유행하게 된 8분짜리 공개 강연이었고, ‘손을 들고 찬양’하는 일은 음악적 소양을 지닌 이들의 감상에 지나지 않았다. 내 의심은 정당했다. 우리의 믿음에서 나는 믿음의 실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이 지극한 사랑의 언어에 나는 황홀하다. 사랑이 고백의 언어라면 이 고백은 죽음을 동반한 고백이다. 죽음을 동반한 고백은 사랑이 죽음 같이 강하다(아8:6)는 것을 입증한다. 예수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15:13)고 했던가. 그래서 그는 인간의 친구가 되었고, 인간을 위해 죽었나.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의 믿음도, 고백도, 사랑의 실체도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나의 사인(死因)은 예수와 같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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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행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395
조용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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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한 청년의 사랑: 조용미의 "헛되이 나는"을 읽고


헛되이 나는 _조용미
  
헛되이 나는 너의 얼굴을 보러 수많은 생을 헤매었다
거듭 태어나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위미리 동백 보러 가 아픈 몸 그러안고서도, 큰엉해안이나 말미오름에서도, 빙하기 순록과 황곰 뼈의 화석이 나온 빌레못동굴 앞에까지 와서도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저 멀구슬나무나 담팔수, 먼나무가 당신과 아무 상관없다고 확신할 수 없는 이 생이다
너에게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가지 않으려고

헛되이 나는, 이 먼 곳까지 왔다

-

제목에서 사용된 ‘헛되이’와 ‘나는’은 각각 부사와 주어라는 품사의 옷을 입었다. 부사와 주어가 나란히 놓인 구(句)가 이 시의 제목이다. 우리말 문장에서 주어는 맨 앞에 나오는 것이 통상적인데 여기서는 주어가 맨 뒤에 있다. “헛되이 나는”이라는 제목은 아름다운 성경책 전도서의 한 구절을 보는듯하다. 그러나 부사와 주어로 구성된 이 제목은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의 외침과는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다. 코헬렛은 이렇게 노래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장2절) 어느 시인은 다시 보면 예쁘다고 했던가. 이 구절은 다시 보아도 어지럽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어지럽고 아득한 이유는 코헬렛이 헛되다는 말을 원인, 결론, 반복 등의 수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세계’를 완벽하게 정의했다. 그런데 코헬렛이 이 문장을 통해 ‘세계’의 헛됨을 해설했다면, 시인은 세계가 아닌 ‘나’를 해설하고 있다. 이 해설은 노래(詩)인 해설이다. 코헬렛은 세계가 헛되다고 노래하고, 시인은 내가 헛되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노래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코헬렛의 눈은 세계를 응시하고 있어 세계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시인은 세계가 아닌 세계의 주체가 되는 자신 ‘나’를 응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같은 노래를 부르는 듯하나 피치(pitch)과 옥타브(octave)가 다른 셈이다. 코헬렛이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남성의 목소리를 지닌 반면, 시인은 근대 이후 여성의 목소리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둘의 목소리가 혼성듀엣의 하모니처럼 들릴지도. 그 가락는 귀를 매혹하고, 언어는 정신을 위협한다.

코헬렛의 수사는 잔인하다. ‘~며’, ‘~니’, ‘~다’ 지속, 원인, 결과로 논리적인 빈틈이 없다. 반면 시인의 수사는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다. 시인의 헛됨이 부사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사는 문장에서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데 문장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만 필요한 품사이다. 시인은 세계가 헛되다는 것에 동의하나 ‘나’가 헛되다는 것엔 아름다운 브로치(Brooch)를 씌워주고 싶었던 것일까. 시인의 아름다움은 제목의 여백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말 문장에서 주어는 맨 앞에 나오는 것이 통상적인데 여기서는 주어가 맨 뒤에 있다. 대개의 시들이 하나의 단어 혹은 구(句)로 제목을 정하기 때문에 특별할 것이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시의 제목엔 특별한 여운이 느껴진다. 그 여운이 소위 ‘여백의 미’가 된다. 시인이 ‘헛되이 나는’ 하고는 한 숨을 쉰 뒤 문장의 나머지를 말할 것만 같기도 하고 또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을 이어서 할까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옅은 아이보리 빛깔의 화선지에 생(生)이라는 작은 점(占)을 묵화(墨畫)로 그리고 남은 거대한 여백과 같이 “헛되이 나는” 뒤에 투명한 품사들이 길게 나열되어 있을 것만 같다.

시의 제목을 자의적으로 난도질 했으나 어쩔 수 없다. 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글은 자기 길을 간다. 아니다. 어쩌면 이 글이 제 길을 가는 것이 시인의 의도일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의 잔인하고 아름다운 헛된 ‘나’는 시의 본문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자태를 드러낸다. “헛되이 나는 너의 얼굴을 보러 수많은 생을 헤매었다 / 거듭 태어나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내가 헛된 이유 먹먹하다. 내가 “너의 얼굴”을 보기 위해 헤맸기 때문이고, 너를 사랑한 죄로 이미 나는 죽었으나 다시 태어나도 또 너를 사랑할 것이기에 “너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던 것이다. 나의 생은 온통 너로 인해 헤매고 괴로워하였기에 헛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물론 나는 시인이거나 시적 화자(話者)이겠으나, 나는 엉뚱하게도 시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천년 전 이 땅을 밟은 한 ‘청년’을 떠올렸다. 나는 이 시를 그가 부른 노래처럼 들었다. 그는 사랑하고 괴로웠던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그 청년은 세계를 사랑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하나의 인간을 사랑했다. 그는 루터가 말했듯, 본회퍼가 말했듯 나를 위한(pro me)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베들레헴, 예루살렘, 갈릴리, 사마리아를 헤맨 것은 나 때문이었고, 십자가에 고꾸라진 후 다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다. 이 시는 그의 노래이다.

그러나 다시, 나는 이 시를 그 청년을 사랑한 나의 노래로 삼았다. 나 역시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헤매었고, 무거운 생을 이끌고 그를 사랑하는 일은 괴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닭이 운 후의 베드로처럼 그를 잊기 위해 멀리 도망갔다. “위미리 동백 보러” 간 곳이나 “큰엉해안”, “말미오름” 있는 곳, 심지어 “빙하기 순록과 황곰 뼈의 화석이 나온 빌레못동굴 앞”까지 나는 필사적으로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삶의 어느 곳, 삶의 어느 순간에서 만나는 그 어떤 것도 “당신과 아무 상관없다고 확신할 수 없”기에, 어디에서도 나는 당신과 고목의 뿌리처럼 땅 밑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피할 수 없기에, 당신과 나는 운명처럼, 필연처럼, 예정처럼 뗄 수 없는 사이라고. 나는 그저 프란시스 잠이 고백했던 것처럼 고백할 뿐이다. “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괴로워하고 사랑하나이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결국 나의 존재와 당위는 그로부터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가지 않으려고” 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운명이 헛헛하다.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으로 멀리 도망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품에 안길만큼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 한 채 헛되이 나는 “이 먼 곳까지” 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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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351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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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인간의 멜랑콜리

  나는 '신학도'이다. 신학교를 졸업한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나를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내 자신에게 부여한 이 정체성과 학문적인 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순전히 자의적으로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한 자기정체성이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지 못할 만큼 이유가 없지는 않다. 내가 나를 신학도라고 여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방향, 세계에 대한 인식, 사고의 패턴과 전개과정이 신학적이기 때문이다. 신학적이라는 것은 신앙적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라는 개체의 실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학도가 시(詩)를 읽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시(詩)는 신학적 혹은 신앙적 시(詩)가 아니다. 세속적이지만 아름답고, 아름답지만 세속성으로 충만한 세속의 시(詩)다. 평범한 신학도가 무슨 이유로 세속의 시(詩)를 해석해야 하는가? 그 아름답고, 세속적인 시(詩)에서 나는 신학적인 느낌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보잘 것 없는 신학도는 마치 색맹인냥 세속적인 것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보지 않는 신학적인 의미, 질감, 통찰을 본다.

  최승자의 후계자라 불리는 진은영 시인은 내 지인이 다니는 학교에서 ‘문학상담’을 가르친다. 니체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 전공자가 시(詩)를 노래하는 시인이기도 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상담하겠다고 나섰다. 시인이자 철학자에게 나는 상담받고 싶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시집인 <우리는 매일매일>에서 나는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매우 신학적으로 읽히는 한 편의 시를 발견했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_ 『멜라콜리아』 전문

  1연의 1행에서부터 나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이야기, 창세기의 사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그는 신(창조주)이다. 나는 그의 그림, 창조물, 작품이다. 신은 모든 만물을 6일 동안 만들고 마침내 인간을 만들었다. 그러자 신은 노래했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새번역, 창1장31절) 인간을 만들고 나서 신은 참 좋았다고 했다. ‘달콤하’다는 시인의 말과 ‘참 좋았다’는 말이 같은 말처럼 들리는 건 나뿐일까. 달콤하다, 참하다, 좋다, 평소 같으면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창조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별로 다른 뉘앙스로 느껴지지 않는다. 신이 만들어 놓은 피조물이 신이 보기에 좋았다면, 인간이 보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아담이 이브를, 이브가 아담을 보았을 때도 역시 참 좋고, 달콤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달콤하다는 말은 어쩌면 원래 인간에게 사용되어야 단어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이성(異性)만큼 달콤한 게 어디 있으랴.

  그러나 나는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과도 같다. 아이스크림이 달콤하다 한들 뜨거운 아스팔트 위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스크림이지만 아이스크림이 아닌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부터 시간의 흐름은 절망의 흐름과 같다. 시간이 지나도 희망은 보이지 않고 절망은 영원히 계속된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신으로부터 죽음을 선고받은 것과 같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나는 녹기 시작”한다. 녹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는 녹지 않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은 반드시 다 녹는다. 이미 그의 죽음이 판결되었다. 신은 인간을 달콤하게 만들었지만, 태어나자마자 그는 죽음을 향해 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고 말 한 것은 이런 의미이다. 뜨거운 아스팔트를 ‘타락한 세계’라고 해도 좋다. 아이스크림을 타락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이라 해도 무방하다. 타락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과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아이스크림이 무엇이 다른가. 헌데,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생의 이면에는 죽음보다 더 가혹한 현실이 있다.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는 진실이다. 타자의 타자성, 그 불가해성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보다 잔인하다. 그 누가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에 혀를 댈까. 앞서 말했지만 그것은 이미 아이스크림이 아니다. 이 단수 아이스크림은 복수의 인간, 인류 전체, 인간이라는 종의 특질을 응축적으로 지시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홀로 고독하게 죽는다.

  2연에 가면 장면이 아스팔트에서 모래사막으로 바뀐다. 아스팔트나 모래사막이나 생명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은 못된다. 다행이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신이 슬퍼하는 이유는 그가 나를 모래사막에 그려놓고는 내가 사실은 “물고기였음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가 나를 뜨거운 아스팔트에 위에다 만들어 놓고는 갑자기 내가 아이스크림임을 기억한 거다. 신의 슬픔이 잠깐이 아니라 “늘”인 것을 보면 꽤 시간이 흘렀나 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래서 신은 그토록 오랜 세월 그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인간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베풀었나 보다. 애굽 노예의 삶으로부터 해방, 산-성막-성전으로 인간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옴, 마침내 신 자신이 스스로 인간이 되기까지. 그의 마지막 한방은 '바람'이다. 바람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靈), 성령을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다. 신이 인간을 향한 구원의 손길은 최종적으로 성령의 몫이 된다. 그래서 신은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결정적인 구원을 베푼다. 그 구원은 “나를 지워준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이 동원된다. 오늘날 세계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가 있다. 교회의 세속화가 전지구화, 보편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다. 그렇지 않은 쪽이 제시하는 증거 중 하나는 비서구권에서 일어나는 오순절 계통의 기독교의 부흥이다. 오순절은 방언(황홀 상태에서 성령에 의하여 말해진다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성령의 역사(歷史)를 중요시하는 기독교의 한 교파이다. 성령의 체험을 이해하는 신학적 폭은 다양하지만 ‘활홀한 상태’는 대표적인 특징이다. 황홀한 상태란 종종 ‘나를 잊게 하는(지워주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신의 대안이다.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구원의 방편이다.

  그러나 시인은 3연에서 신을 조롱하듯 말한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사막에 그려진 ‘나’(물고기)가 바람에 지워졌다고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니! 바람을 불러서 나를 지운 건 어처구니 없는 신의 대안이었다. 신의 낙관주의는 절망을 넘어선 우울을 더 부추긴다. 신의 대안은 무용지물이다. 성령의 바람은 불었으나 삶은 여전히 비루하다. 나는 사막에서 지워져버렸고,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완전히 녹아 찐득한 껌딱지가 되었다. 구원은 없었다. 신은 유토피아(utopia)를 창조했지만, 인간은 멜랑콜리아(Melancholia)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 글이 여기쯤 끝을 맺으면 좋겠다 싶다. 강정, 밀양, 오정현, 전병욱, 국정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뜨거운 아스팔트요 모래사막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단어에 목숨을 부지하듯 아슬한 희망을 건다. “믿는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신이 믿는 것이기에. 어차피 구원은 내 몫이 아니고 신의 몫이기에. 인간이 된 신, 육체를 지닌 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피스티스 크리스투πιστις χριστου)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갈라디아서 3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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