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엮음, 김정욱 사진 / 비(도서출판b)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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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공간 / 이승훈


블랑쇼에게 문학의 공간은 죽음의 공간이다 언어는 죽음을 운반한다 언어라는 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므로 부재의 배이고 부재는 현존이 아니다 현존 너머 현존 너머 죽음이 흐른다 내가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이미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다른 곳에 있고 당신이라는 낱말만 종이 위에 뒹군다 당신은 어디 있는가


나는 염소라고 쓴다 이 염소는 어디서 오고 어디서 온 것도 아니다 갑자기 염소 생각이 나고 염소라고 쓰면 염소는 있지만 염소는 없고 봄날 저녁 염소 한 마리 운다 그러나 우는 소리 들리지 않고 염소는 보이지 않고 염소는 없다 없기 때문에 이 없음을 위해 부재를 위해 당신을 위해 우리는 글을 쓴다 염소가 나를 잡아먹으리라




*문학은 어떤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탄생했다. 어떤 것, 어떤 사태, 어떤 마음, 어떤 그대, 당신. 그러나 언어의 불가능성은 문학을 절망하게 만든다. "내가 그대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내가 부른 이름은 그대에게 닿지 못했다. 언어의 불가능성은 그대를 찾지 못해 질문할 뿐이다. 당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이 계시지 않으나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글을 쓰는 것밖에 없어서, 불가피한 절망에 잡아먹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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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시선 303
강성은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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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헤라자데 / 강성은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천년 동안 짠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툭 끊어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야기 지난밤에 본 영화 같고 어제 꿈에서 본 장면 같고 어제 낮에 걸었던 바람 부는 산길 같은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당신 피부처럼 맑고 당신 눈동자처럼 검고 당신 입술처럼 붉고 당신처럼 한번도 본적 없는 이야기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당신이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 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끝이 없는 이야기 흔들리는 구름처럼 불안하고 물고기의 피처럼 뜨겁고 애인의 수염처럼 아름답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정신도 없고 실험이라는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험적인 이야기 어느날 문득 무언가 떠올린 당신이 노트에 적어내려가는 이야기 어젯밤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내일 밤 내가 당신 귀에 속삭일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시읽는_신학도‬


*난 어쩌면 세헤라자데처럼 죽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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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을 적시며 창비시선 342
이상국 지음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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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사람들 / 이상국


나는 이 골목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利害)가 없다
그래도 골목은 늘 나를 받아준다
삼계탕집 주인은 요새 앞머리를 노랗게 염색했다
나이 먹어가지고 싱겁긴
그런다고 장사가 더 잘되나
아들이 시청 다니는 감나무집 아저씨
이번에 과장 됐다고 한 말 또 한다
왕년에 과장 한번 안해본 사람…… 그러다가
나는 또 맞장구를 친다
세탁소 주인여자는
세탁기 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나에게 들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피차 미안한 일이다
바지를 너무 댕공하게 줄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골목이 나에 대하여 뭐라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 골목 말고 달리 갈 데도 없다
지난밤엔 이층집 퇴직 경찰관의 새 차를 누가 또 긁었다고
옥상에 잠복하겠단다
나는 속으로 직업은 못 속인다면서도
이왕이면 내 차도 봐주었으면 한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는 몰라도
어떻든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고
누군가는 이 골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읽는_신학도‬


*응답하라 1988을 보고 펑펑 울었다. 그 시절의 추억과 아름다움과 가족과 사람들, 가족 그래 그 시절의 가족은 아름다웠다. 지지고볶고, 머리 뜯고 싸웠지만 생각할수록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모든 것을 긍정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그 시절에도 아름다운 사람들은 있었다. 그 시절 골목에 사람들이 있었다. 골목에서 들리던 아이들의 천전난만하고 순진한 목소리들. 그 소리만 들으면 몸이 흥분했다. 딱지치기, 술래잡기, 숨바꼭질, 비석치기, 땅따먹기, 구슬치기만으로 행복했던 그 시절. 그 시절. 그 시절.


오늘도 먼 훗날엔 추억일테고 그때도 오늘이 그리워 펑펑 울지 모르겠다만, 오늘의 추억은 오늘의 것이 아니고 1988년의 추억은 오늘의 것이니까. 오늘 내게 주어진 추억 하루치를 먹고 살아야지. 그 시절 골목이 애틋하게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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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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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시읽는_신학도‬


*사랑을 잃고, 그 사랑을 빈집에 가두어둔 시인의 마음이 아련하다. 왜 빈집인가. 빈집은 비어있다. 헌데 역설적으로 그 비어있음이 가득찬 곳이 빈집이다. 아무도 없는 집을 들어갈 때의 그 헛헛한 마음. 그 공허감은 다른 어떤 빈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특별히 강력한 감정이다. 그 헛헛함과 공허함으로 완전히 채워진 곳이 빈집인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빈집을 잠그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빈집에 가득한 헛헛함이 새어나올 수 있으니까. 겨우 무엇인가 쓰는 일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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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278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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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보석가게에서 / 김행숙


언니, 나는 비행기를 탈 거야. 나는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너무 가벼워졌어. 마리오는 아름다운 남자야.


안녕. 나는 보따리 장사를 할 거야. 보석가게에서나는 아름다움을 감정하지. 가짜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아는 건 멋진 일이야. 언니, 곧 부자가 될게. 라인 강가에서.


한국 남자를 사랑해보지 못했어. 오늘밤에도 언니는 시를 쓰고 있니? 언젠가는 언니 시를 읽고 감동하고 싶어. 안녕.


11월에 나는 마리오를 만나지. 언니는 한국어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 우리가 어렸을 때 문방구에서 마론인형을 훔치는 언니를 봤어. 눈물이 주르르 모래처럼 흘렀어.


언니,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모래는 가장 아름다운 흙의 형상이었지. 나는 매일 밤 기도를 해. 언니가 우리 집을 떠나던 날에 나는 왜 쓸쓸해 지지 않았을까? 언니를 위해 기도할게. 안녕.


‪#‎시읽는_신학도‬


*사춘기 소녀같은 시. 가볍고 재밌다. 기분 좋고, 편안하다. 괜히 웃음이 난다. 시인과 언니 옆에서 같이 수다를 떨고 싶다. 항동규가 노래한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시의 내용은 무시해도 좋다. 그저 화자의 말하는 분위기만 느끼면 된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삶을 살아가는 시인은 행복할 것만 같아서 부럽기도 하다. 이 시 앞에선 무거운 짐이 내려지는 위로가 있다. 예수도 제자들과 놀고, 장난치고, 유머를 날리고, 판타지 소설 같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재밌게 보냈겠지? 이 시가 보여주는 세계처럼.

+

이장욱 시인이 밝힌 바와 같이 “서정에서 일탈하여 다른 서정에 도달한” 시인의 행보는 “ ‘현대시’의 어떤 징후”가 되었고, 이 첫 시집을 통해 그녀는 “시를 쓴다는 것은 윤리학과 온전히 무관한 사춘기적 ‘경계’에 머문다는 뜻”임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시가 난해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그만큼 협소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가 그만큼 진부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그녀의 시는 은은하게 권유하고 발랄하게 유혹한다. ‘시뮬라크르들을 사랑하라.’ 김행숙 시의 정언명령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시만이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_신형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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