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출판사 분투기 - 작지만 강한 출판사 미시마샤의 5년간의 성장기
미시마 쿠니히로 지음, 윤희연 옮김 / 갈라파고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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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 무대인 ‘미시마샤라는 출판사의 이름은 사장인 미시마 구니히로의 성을 딴 것이다. 그는 두 군데의 출판사에서 약 7년간 근무한 후 2006, ‘어느 날 갑자기자신의 출판사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 책은 그렇게 난데없이 1인출판을 시작한 이후 약 4년에 걸쳐 좌충우돌한 출판활동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혼자서 자영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언뜻 그러하듯이 이 책의 큰 줄기 자체는 사람들에게 많이 익숙할 것 같다. 자본금은 저축을 헐어 마련한 수천만 원 정도이고 일단 장사를 시작하고 나면 대체로 반년 안에 그 자본금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혼자서는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으니 직원을 뽑아야 하는데 내 마음 같은 사람을 고르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리고 매일매일을 버티는 심정으로 보내다 보면 어느덧 장기 계획이니 비전 같은 말은 저만치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 ‘계획과 무계획 사이에서 용하게도 버텨내며 사장 포함 전 직원 7명에 교토 사무실도 내고 편집 프로덕션도 운영할 정도로 성장했다(편집 프로덕션 이야기는 책에 없지만 홈페이지에는 프로덕션에 대해서 나와 있다).

 

이 과정은 눈물 날 만큼 웃기게 묘사되어 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다음과 같은 부분을 보자.

 

법인등기를 마쳤다.

사무실도 차렸다.

첫번째 책도 나왔다.

모든 것이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다.

……고 밖에서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창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시기, 갑자기 큰 벽에 직면한 것이다.

돈이 없…….

참나, 내가 초등학생이었어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는데.

 

(망상 속의 젊고 예쁜 여선생님) “여기 3백만 엔이 있어요. 회사를 세울 때 백만 엔을 썼어요. 그러면 남은 돈은 2백만 엔이 되겠지요. 그 돈으로 책을 한 권 냈어요. 인쇄비, 인세, 디자이너에게 줄 돈 등 한 권에 드는 돈이 2백만 엔이에요. 그런데 책을 내고 난 이후 판매 대금이 들어올 때까지는 7개월이 걸려요. 그동안 잔금을 전부 지불했다고 해봐요. 그럼 남은 돈은 얼마일까요? 정답이 뭔지 알 수 있을까?”

 

(초등학교 3학년인 나) “!”

, 미시마, 정답이 뭔지 알았어요?”

, 0엔입니다.”

훌륭해요, 잘 맞혔네요. 그러면 이 회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망하게 됩니다.”

“정답이에요!”

 

분명 초등학생이더라도 쉽게 ‘정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된 나는 아슬아슬해질 때까지 예상하지 못했다. 한심하게도……

적어도 이 일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 앞으로 살려나가야 할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생각해봤다.

그 결과 이 사실에서 두 가지 명제를 이끌어냈다.

 

1. 사람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을 만한 계산도 때로 실수하는 존재이다(인류적 문제).

2. 나는 이른바 앞일을 생각하지 못하되는 대로 해나가는존재이다(개인적 문제).

 

과연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이 다음부터 회상을 해가면서 그 답을 찾아가려 한다(어느 쪽이 옳든 세상사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 같지만). (pp. 48~49)

 

 

조금 과장하자면 이런 식으로 서술되는 에피소드 덕에 10분마다 한번씩 빵빵 터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업계획서도 없고 결산서도 쓸 줄 모르고 엑셀도 못 다루는 사장에, 침울한 얼굴의 영업부 직원에, 인터넷 중독 편집자, 날마다 밖에서 사건사고와 마주치고 오는 마케팅 직원, 겨울에는 바람이 숭숭 새어들어오는 오래된 단독주택 사옥에서의 근무 풍경까지 읽고 있다 보면 피식 웃음이 나는 대목이 가득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에피소드들은 오래되고 큰 회사 위주로 빈틈없이 짜인 일본 출판계에서 작디작은 회사가 원하는 출판을 하면서 살아가기 위한 시도들과 긴밀히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저자의 출판에 대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서술한 대목들은 매우 진지하다. 저자가 처음 출판사를 만들고자 했을 때 생각한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독자와 직접 연결되는 출판사

원점회귀의 출판사

편집과 영업은 둘이면서도 하나. 양쪽 바퀴가 기능적으로 연동해야 한다. 스피드를 내려고 하든, 좁은 데서 재빨리 방향을 바꾸려고 하든 간에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작은 회사에서 하나하나 실현해가느냐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전통적으로 원고를 기획하고 그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내는출판 이야기와는 좀 거리가 있으며 필자들과의 교류에 대해서도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대신 회사로서의 출판사에 대한 경영에 보다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독자와 직접 연결된다는 부분은 홈페이지, 블로그, 무가지 등을 통한 마케팅 측면과도 관계가 있는 이야기이지만 독자를 타깃별로 너무 세분화하여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측면을 경계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작은 출판사로서 서점 영업은 도매상을 통하지 않고 직접 거래를 하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 현재로서는 반품률이 너무 높기 때문에(40퍼센트 이상) 회사로서는 신간을 많이 낼 수밖에 없고 신간을 많이 낼수록 반품되는 책도 많아지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고 반품을 없애고자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책을 내보내는 직거래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영업을 다른 회사에 위탁했지만 편집과 영업은 둘이되 하나로서 기능적으로 연동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직원을 뽑고 직접 영업을 개시한다.

 

사람을 뽑을 때도 스펙을 보지 않는다. 저자와 같이 일하고 싶다는 열정 하나만을 보거나 서점 직원으로서 POP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해서 저자가 먼저 일하자고 한 경우도 있다. 글솜씨는 뛰어나지만 인터넷 중독자인 편집자도 있고 덜렁이라서 과연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싶은 직원을 뽑기도 한다. 이렇게 직원을 채용하거나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에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좋게 말하면 개성적이고 안 좋게 말하자면 스펙상으로 결코 뛰어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일해나가는 모습이 어쩌면 일본의 젊은 독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지 않았나 싶다.

 

한 권 한 권의 책에 을 담아 만든다는 의미에서도 규모를 늘리지 않는다. 규모를 늘리지 않으면 한 권의 책이 성공했을 때의 기쁨이나 실패했을 때의 아픔이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온다는 장점이 있다. 또 한 권이 팔리지 않으면 그 다음 책을 내는 것이 힘들어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규모는 되도록 작게 유지한다는 것이 저자의 방침이다.

 

이 책에는 원점회귀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오고 아예 한 장을 할애해서 따로 이것을 다루고 있는데 저자도 말하듯이 이는 한마디로 정리될 수 없는 부분이고 그만큼 추상적인 면이 있어서 선뜻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주 넓게 이야기하자면 이 책 전체가 원점회귀로서의 출판에 대한 해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2쪽에 따르면 이 원점회귀한 권의 책의 힘을 믿는 것, 그 한 권의 책에 저자와 편집자가 최대한 열량을 담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원점회귀를 어떻게 기존 출판 시스템의 악습을 벗어나면서 미래의 출판을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구현할 것인가가 저자의 주요한 고민이며 이 책은 그 고민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중간결산형식으로 내놓은 것이기도 하다.

 

갑갑한 출판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회사를 만들어가며 세계와의 연결을 회복한 기분이 든다는 저자의 말은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말로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 책은 저자의 노력을 충분히 담고 있다. 출판에 뜻이 있는 편집자 지망생이나 혹은 자신의 출판사를 차리겠다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라면 분명 요절복통하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단 이 책이 출판계 밖 사람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공감대를 넓힐 수 있을지는 조금 의구심이 생긴다. 출판사에 관한 책이므로 출판과 출판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물건이지만 책을 만드는 산업과 이에 관련된 출판사 경영이란 정말 특수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동네 서점은 고사하고 도매상마저 거의 사라질 지경에 처해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서점 영업을 다니는 등의 이야기가 얼마나 보편성을 가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기는 한다(물론 쉽게 읽히고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도 웃으며 읽을 수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국내의 출판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지 감이 안 오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블로그 운영, 무가지 발행, (인터넷 서점과의) 직거래 등은 국내에서는 많이 알려진 마케팅/영업 방식이기도 하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음에도 경영이 어려운 회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 책이 눈앞의 이익만 좇다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고 저자가 비판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독자도 많고 출판 환경이 워낙 좋은 일본이라서 가능한 이야기'라고 이상론적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출판사이지만 나름의 새로운 성공 모델로서 참조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 재미있는 에피소드들, 저자가 사람을 기용하고 같이 일해가는 방식, 자신이 속한 업계의 미래를 나름대로 새로 구축해보려는 노력 등에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준비와 철저한 계획에 의해 실현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계획과 무계획 사이에 놓여 있다는 저자의 말과 경험은 분명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

 

 

(* 쪽수는 양장본 원서 쪽수. 번역문, 표기법, 용어 등은 번역서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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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하는 신체
모리타 마사오 지음, 박동섭 옮김 / 에듀니티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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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을 다룬 책이더라도 전혀 뇌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고 반대로 거의 알지 못하는 내용이더라도 뇌가 자극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 책은 후자이다. 이제는 이차방정식이나 삼각형(비슷하게 생긴 것)만 보아도 울렁증이 절로 생기는 수학 무교양상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읽을 수 없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고도의 수학적 지식을 설명하는 책도 아니고 수학의 역사를 다루되 그것만 나열하고 있는 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히려 수학이란 무엇인가, 수학에서 신체란 무엇인가를 제로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보는 여행”(p.2)에 가까운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학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문제의식과도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책의 전반부인 1장과 2장에서는 수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수학이 발달하는 과정은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 사고하기 위한 도구의 발달이 궁극적으로 신체와 분리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지금 수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수식과 계산만을 떠올린다. 그리고 또한 머리가 좋아야잘할 수 있는, 뇌 안에서만 일어나는 고도의 사고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애초에 수학은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사고가 아니었다. 선사시대에는 손가락이나 발가락 등 신체의 부위를 이용하여 수를 셌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종이도 연필도 없이 모래나 널빤지에 나뭇가지 등으로 그림을 그리고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증명을 했다. 이러한 신체 행위를 통해 발달한 수학은 이윽고 16세기에 기호’(+ - ÷ × )라는 도구를 얻어 보다 추상적인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하며 이윽고 17~19세기 서구 유럽에서는 수식과 계산을 중시하는 경향이 생겨난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근대 서구 수학이다.

 

근대 서구 수학은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물리적 영역에서는 실현할 수 없는 극대, 극소에 대해 사고할 수 있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물리세계의 법칙에 제약받지 않는 영역(허수 등)에까지 그 분야를 넓혀간다. 기호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유한한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표현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수학의 형식화, 공리화는 수학과 신체를 분리했고 물리적 직관과 수학자의 감각 등 애매하고 믿을 수 없는 것들에서 자립하고자 하는 커다란 움직임으로 귀결되었다. 수학의 안’(, 사고)과 수학의 밖’(뇌를 제외한 신체, 환경, 사물 등과 관련된 행위)은 점점 분리되는 쪽으로 발달했으며 20세기 전반에는 이윽고 신체를 완전히 잃어버린 계산하는 기계=컴퓨터가 탄생한다. 그때까지 인간에 종속되어 있던 수가 인간을 벗어나 수가 수를 계산하는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도로 추상화하며 발달한 수학이 나아가는 다음 단계란 어떤 것일까. 저자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앨런 튜링과 오카 기요시라는 두 수학자를 통해 그 가능성을 탐구해보고 있다.

 

앨런 튜링이 추구한 수학의 근저에는 마음이라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인간 역시 자연 규칙에 따르는 하나의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거기에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혼이 머물 수 있으며, 의지와 혼 등의 개념을 어떻게 물리적 세계의 과학 기술과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마음의 세계와 사물의 세계의 접합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것이다. 이는 나중에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인공지능의 탐구로 나아가며 만약 그러한 기계가 존재한다 가정했을 때 지능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기관과 같은 신체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년의 그는 컴퓨터와는 다른 인간이라는 기계의 구조를 해명하기 위해 생물학 연구도 하게 된다.

 

오카 기요시는 저자가 수학을 공부하게 된 동기가 되는 일본의 수학자이다. 생전에 불과 열 편의 논문밖에 발표하지 않았지만 서양에서 업적을 인정받았고 일본 정부로부터는 문화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뛰어난 수필을 써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는 어느 대학이나 연구소에 소속된 수학자가 아니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때까지 재직하고 있던 대학을 나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가서 농사를 지으며 자연 속에서 혼자 수학 연구를 계속했고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에는 출가를 하여 종교적 생활을 하기도 한다. 바쇼에 대한 심취나 수학에서 중요한 것은 오감으로 접촉할 수 없는 수학적 대상에 끊임없이 관심을 주고 그만두지 않는 것이며, “수학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은 정서라는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수학자라기보다 진리를 찾아 수행하는 선사와도 같은 이미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는 고도로 추상화된 서양식의수학을 추구한 결과 그가 도달한 지점이다.

 

저자가 인지과학의 연구성과까지 동원하여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인지란 신체 안에만 갖혀 있는 것도 아니고 뇌로만 하는 것도 아니며 신체와 환경 사이를 오고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직접적인 언급은 나오지 않지만 이런 신체와 환경 사이를 오고가는 과정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수학을 한 사람이 바로 오카이다. 오카에게 수학이란 머리로 이치를 생각하거나 눈앞의 계산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쏟아 수학적 사고의 흐름이 되는 것에 무상의 기쁨을 느끼는”(p.117) 것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오카의 학문적 태도에서 서로 동떨어진 듯한 수학신체가 어딘가에서 깊은 연결관계를 갖고 있을 것 같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오카는 안다는 것은 슬픔이나 기쁨을 예로 들자면 타인의 감정을 수치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감정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하이쿠처럼 감각의 세계가 아니라 그 안쪽에 놓여 있으면서 피아를 넘나드는 정서의 세계를 중시했다. 그는 씨앗과 토양이 없는 농업이 있을 수 없듯이 수학에서 창조란 수학적 자연을 낳고 기르는 마음에 의해 지탱되며, 마음이 없는 수학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마음의 움직임 자체를 인간의 의지로 탄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에게 가능한 것은 그것을 낳고 기르는 것뿐이라 주장한다. 그 역시 만년에는 수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관과 우주관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튜링은 마음을 만들고자 했고, 오카는 마음을 지루한 육체와 뇌에서 해방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마음이 되고자 했다. 이것이 저자가 본 수학의 가능성이다.

 

분량은 길지 않지만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우선 이 책을 읽으면 수학사에서 큰 전환이 되는 지점들을 알 수 있다. 그 지점들을 하나씩 통과하듯 읽어나가면 수학이 잃어버리는 것이 신체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중간중간에 사고라는 것이 결코 신체적 행위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대체로 인지과학을 동원한 저자의 설명이 들어간다. 그리고 튜링과 오카 기요시라는 두 수학자의 행적을 좇으면서 잃어버린 신체성을 수학이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논리를 추구하는 학문이라 하더라도 그 끝에 가서는 그것으로는 해명하기 힘든 무언가를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1은 왜 1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 그런데 '1이니까 1이다'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왜 그런지 해명하려고 애쓰는 것이 학문의 본질이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떠오르던 말이 바로 이 본질이라는 단어였다. 또한 모든 학문이 궁극에 가서는 서로 통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측면도 상기하게 만드는 책이다. ‘수학한다는 것’ ‘수학하는 사고의 근본을 탐구해보는 에세이집이면서도 이것을 수학이라는 한 학문분야에만 한정하지 않고 학문의 근본, 학문의 태도로까지 자신의 사고를 다른 지점으로 누출’(p.32)하게 만드는 힘도 있는 것 같다. 가장 기초적인 인간의 생각에 변혁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진보적이며 혁명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물리, 생물, 등에도 이런 식의 에세이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챕터씩 읽어나갈 때마다 뭔가 눈이 뜨이는 기분이랄까. 물론 설명만으로 이루어진 부분도 있고 저자 자신의 이야기나 오카 기요시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부분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전문가보다는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둔 책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다만 수학사에 무지한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저자의 설명 자체는 이해가 가지만 감각, 행위, 사고가 뇌 안에서만 일어나거나 또는 육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모로 통합되어 있는 과정이고 따라서 수학하는 사고 자체를 거의 자연과의 합일에 비견할 수 있는 통합적 과정으로 재인식하게끔 하려는저자의 사고가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또 오카 기요시의 경우 이 책만으로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 파악하기 힘들어 바쇼의 하이쿠가 보여주는 선적인 세계와 오카의 수학 사이의 관련성이 얼마나 밀접한 것인지, 혹시 비약이 있는 것은 아닌지(오카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에서 배척을 당하는데 이후 곧바로 바쇼의 세계에 심취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이 장면만 보자면 곧바로 서구에 대한 반동으로서 일본 고유의 무엇을 찾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더불어 저자가 오래 읽은 오카의 책 제목은 일본의 마음이다)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수학이라는 학문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일종의 실마리가 될 만한, 정말로 새로운 책이라면 과학 교양서뿐만 아니라 늘 인문학의 최신 경향을 보여주는 신상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인 책인 듯하다. 또 언제 나올지는 알 수 없으나 다음 작품도 주목해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 쪽수는 원서 쪽수. 번역문, 표기법 등은 번역서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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ドルフィン·ソングを救え! (單行本(ソフトカバ-))
?口 毅宏 / マガジンハウス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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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인 2019년, 당신의 생은 이미 망했다. 비정규직으로 나이 먹고 이제는 써주는 곳도 없다. 애증의 관계였던 애인은 나를 학대하고 등치기만 하다 떠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마흔이 훌쩍 넘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에 희망을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그래, 죽는 것밖에 길이 없다. 그녀는 그렇게 죽음을 결심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자살을 기도한 그녀는 30년 전의 세계에서 깨어난다. 쇼와가 막을 내리던 바로 그때로. 잡지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대중음악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으며, 쇼와 천황(히로히토 일왕)의 사망을 필두로 파나소닉 창업자이자 경영의 신으로 불린 마쓰시타 고노스케와 만화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 등이 줄줄이 사망하던 버블 붕괴 직전으로. 그녀는 생각한다. 나는 왜 죽지 않고 이 시대로 돌아왔는가. 이런 때 '당시에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떠오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녀는 그것을 하리라 결심한다. 사춘기 시절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2인조 밴드 <돌핀 송>의 불행한 최후를 저지하리라.

 

연재소설 같은 걸 읽어본 지가 까마득하니 이 소설을 읽게 된 건 전적으로 우연의 힘이다. 만약 <브루터스> 작년 신년호를 사지 않았더라면, 아니, 샀더라도 소설 첫머리에 요시다 다쿠로의 <오늘까지 그리고 내일부터>라는 노래 가사가 살짝 바뀌어 실려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일본 대중문화에서 유명했던 고유명사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을 보는 순간 단번에 낚이고-_- 말았다. 30년 전의 세계로 돌아온 그녀는 텔레비전에서 아이돌 그룹 '히카루 겐지'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등장하는 것을 보며, 당대의 여성 아이돌이었던 모리타카 지사토와 사카이 노리코의 운명이 곧 어떻게 바뀌는지를 떠올린다. 당시 그녀 또래 치고 요시모토 바나나를 읽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나중에 돌핀 송의 다큐를 만든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은 무려 소노 시온이다. 그리고 돌핀 송의 가사는 "존 어빙, 레이먼드 카버, 샐린저에다 데릭 하트필드(!) 등 현대 미국 문학에서 막대한 인용"을 한 것으로 나온다. 맞다, 직접적으로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짐작할 수 없지만 당시의 일본문학을 이야기할 때 '그'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시 일본 대중문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분명 한번쯤은 흥미를 가질 만하며 역으로 이 책에 출몰하는 고유명사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작품이다(실제로 아마존저팬의 서평을 보면 살아온 시대가 달라 공감하기 힘들다는 내용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어떤 것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원이라고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몇 종 안 되는 잡지, 신문이 전부였던 것 같다(책은 일단 빼자). 원래 청소년기가 다 그렇기는 하지만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한 불안과 자신감이 교차했고 동경하는 대상에게는 또래들과 교환하는 소문을 제외하면 마음껏 망상을 부풀릴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말 '그림'만 보며 생각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 일본 대중문화였다. 거의 모든 것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알음알음으로 잡지나 카세트테이프를 손에 넣으면서 아마 나는 살면서 두 번 다시 없을 순수한 환상을 꿈꿀 수 있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물론 다 금방 꺼지는 망상이었지만). 곧이어 다리가 무너지는 것을 시작으로 백화점이 붕괴되고 나라가 부도가 날 지경에 이르며 취직이 전쟁이 되는 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 책에서는 비록 주인공이 죽음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온전히 사회 탓으로 돌리지는 않지만 실제로 버블 시대에 어린이-청소년 시절을 보낸 일본의 많은 40대들은 90년대가 닥치자마자 이전에 없던 박탈감에 시달리게 된다. 부모나 선배들처럼 살 수 없는데도 그들과 같은 생활 수준을 스스로도 원하고 또 요구받음에도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은 버블 붕괴 직전 아무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풍요를 구가하던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이들이 품었을 법한 환상을 대리 충족시키면서도 물정 모르던 과거의 '나'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까지 몰린 현재의 '나'를 영리하게 화해시킨다. 주인공은 역사를 다 알고 있는 자신의 입장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적절히 이용하기도 하면서 돌핀 송을 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서기 시작하고, 그러는 한편 역사를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것인가도 깨닫는다. 그리고 역사를 알고 있다 해도 '현재' 자신의 모험이 해피엔드로 끝날지 아닐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타임슬립을 통해 역사를 바꾸려 하는 것은 흔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순한 과거 풍속지나 한풀이에 그치지 않은 것처럼 읽힌 것은 주인공이 얻고자 한 것이 결국 과거에 꿈꾸었던 찬란한 미래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은 지금 내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우연히 깨달을 때가 있다.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실질적인 힘과 지혜가 되었음을 알고서야 비로소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멈춰 있던 성장이 시작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무언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의 구분이 조금 더 명확해지기는 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주인공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일 년 가까이 기를 쓰고 잡지를 사본 보람은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천재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저주했다. 그러나 그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지금은 알고 있다. 나는 나밖에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사회활동가였던 부모에게 나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은 모두 쓸모없다고. 전부 무의미하다고. 못된 딸이었다고 지금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부모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네 엄마도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란다."
그분들은 하지 않고서는 못 배겼다. 그러니까 한 것이다. 그랬을 뿐인 것이다.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나는 그분들의 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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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논문 -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지적 수집품
산큐 다쓰오 지음, 김정환 옮김 / 꼼지락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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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게 뭐야! 얼마나 시간이 남아돌고 할일이 없으면 이런 것을 연구랍시고 내놓는단 말인가."

 

아마 이 책을 읽지 않고서 여기 소개된 논문들의 제목을 보았다면 분명 처음에는 나도 그런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작년에 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일반 세상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리그'를 비판하는 책인가 싶기도 했다(그런 책이 있어도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의 독서를 끝낸 지금 '할 일 없어 뵈는 연구'에 대한 인상은 완전히 깨졌다. 이 책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접할 일 없는 진기한 논문에 대한 소개서이자 그 논문들의 의의를 통해 '논문(연구)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훌륭한 안내서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몇몇 이상한 논문의 제목을 살펴보자. <경사면에 착석하는 커플에게 요구되는 타인과의 거리> <혼외 연애 계속 시의 남성의 연애 관계 안정화 의미부여 작업: 근거 이론 접근에 따른 이론 생성> <대학 축제에서 '고양이 카페'의 효과: '고양이 카페' 체험형 AAE(동물 매개 교육)가 내장객에게 끼치는 영향>. 제목만 보아도 웃음이 나거나 도대체 이게 무슨 연구인지 짐작을 쉽게 할 수 없으며 과연 정말 있는 논문인지 의심이 간다. 이 책은 연구를 하지 않는 일반 독자들에게 이 논문들의 '웃음 포인트'를 짚어주고, 무슨 연구인지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이 논문의 쓸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경사면에 착석하는 커플에게 요구되는 타인과의 거리>라는 논문을 쓰려면 경사면에 앉으려는 커플을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쉬운 관찰이 아니다. '훔쳐보기'에 가까운 행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그런 '훔쳐보기'에 가까운 행위가 어떻게 '필드워크'가 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연구 윤리에 어긋나지 않은 행위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이 논문의 동기인 '퍼스널 스페이스('타인의 존재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 거리, 공간)의 주체가 두 사람일 때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한 다음, 이 연구의 쓸모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특정한 공간에서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자리 배치 등에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기 실린 이상한 논문에 관한 이야기 열세 편을 따라가다 보면 진짜 있는지 없는지 모를 요상한 제목의 논문의 존재 여부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논문이란 무엇인가' '연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쪽으로 바뀌게 된다. 제목만 보면 어이없어 보이더라도 한 논문 안에는 새로운 사실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탐구열과 이를 위해 엄정한 과정을 거쳐나가는 노력이 배어 있다. 언뜻 쓸모없어 보이는 연구더라도 나중에는 인간 생활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하고, 순수하게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재미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 애쓴다면 우리 또한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공부/연구'에 대한 시각이 조금쯤은 달라질 것이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일본어학을 전공한 연구자이면서 코미디언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과 연관 있는 논문들을 찾다가 이런 '이상한' 논문들을 발견하고 모으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모은 논문들을 자신이 출연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소개하기도 하다가 이 책을 쓰게 됐다. 이 역시 '매우 이상한' 일이라면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도 결국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왜 이런 논문이 있는가)'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이 논문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라는 출발점에서 시작된 것이니 도대체 세상에는 왜 이렇게 쓸모없는 논문들이 많은가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한번쯤 권하고 싶은 훌륭한 '연구 성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덧 1) 내가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의 글은 두번째 칼럼 <연구에는 네 종류가 있다>이다. 그가 연구의 종류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눈여겨봐야 한다. 공부를 많이 했을수록 자기 얘기에 바빠 이런 '요약글'을 못 쓰는 양반들이 많다.

 

덧 2) 지은이가 젠더 문제를 전혀 생각지 않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곳곳에서 모태솔로 분위기를 풍기며 여자! 여자!를 외칠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개그'가 마음 불편한 사람도 많다는 것을 다음 책에서는 좀더 고려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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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의 철쭉에서 백로의 숲까지

 

이 글에서는 우선 이노우에 야스시의 초기 시 가운데  몇 편에 일정하게 드러나는 시 구성의 패턴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노우에 야스시는 산문시를 많이 썼기에 그만의 난해하고 독창적인 비유를 찾기가 힘든 작가라는 점이 '표절'을 논하는 데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어서이다. 대신 내 논리를 보강할 근거로서 시의 구성을 택했다. 당시 이노우에 야스시가 즐겨 쓴(적어도 선호했던) 패턴은 다음과 같다.

 

 

1. 과거에 무언가를 본 일이 있다.

 

 

2.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3. 지금 나는 그 무언가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한다.

 

 

이상의 시 구성을 그의 첫 시집 <북국>에 실린 서른일곱편 가운데 세 편의 시이자, <일본현대 대표시선>에도 실린 <유성> <엽총> <시리아 사막의 소년>을 통해 드러내겠다. 

 

그런 다음 현재 <히라의 철쭉>의 다른 번역문을 찾기 힘든 관계로 직접 번역을 하여 번역문을 만들어보려 한다. 단, 유정과는 다른 번역의 방법을 택할 것이다. 즉 번역자의 주관적 해석을 최대한 배제하는 '직역'을 라인 바이 라인으로 시도하겠다. 이렇게 하면 문장이 많이 이상해지겠지만 원문과 문제의 대목을 비교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자어의 경우에는 한국식으로 음을 읽고 그 외 번역어의 선택은 가급적 해당 단어를 싣고 있는 사전 페이지의 첫머리에 나오는 것으로 하겠다. 번역 대본은 1983년 신초샤에서 초판이 발행된 <이노우에 야스시 전시집>(문고본, 1999년 10쇄)이다.  

 

 

인용문의 강조는 내가 했으며 인용문 표시 및 글상자 넣기가 잘 되지 않아 인용문은 부득이 다른 서체로 구분했다.

 

 

유성


고등학교 학생시절, 일본해의 모래언덕 위에서, 홀로 망또에 몸을 감싸고 드러누워 별이 흐르는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다. 11월의 얼어붙은 성좌에서, 한줄기 푸른 빛이 반짝이며 나와 홀연히 사라지고 만 그 별의 고독한 움직임만큼, 강하게 내 청춘의 영혼을 흔들어놓은 것은 없었다. 나는 언제까지나 모래언덕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나야말로, 이윽고 떨어져내릴 그 별을 이마에 받아들일, 지상에 있어 단 하나의 인간임을,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십몇해의 세월이 지났다. 오늘밤, 이 나라의 한 많은 청춘의 유해(遺骸)ㅡ쇳조각과 기왓장으로 이뤄진 황량한 도시 풍경 위에 길게 꼬리를 끌며 질주하는 별 하나를 보았다. 눈을 감고 벽돌을 베개 삼은 나의 이마에는 이미 그 무엇도 떨어져내릴 성싶지 않았다. 그 한순간의 제전(祭典)의 무연(無緣)함이여, 전란의 황망(慌忙)함 속에 잃어버린 이내 청춘을 닮아, 그 별의 행방은 알 수도 없다. 다만, 언제까지나 나의 눈꺼풀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홀로 항성군에서 탈락해, 천체를 낙하하는 별의 종언이 지닌 그 놀라운 정갈함뿐이었다.

 

 

 

엽총


왠지 그 중년남자는 마을 사람들의 빈축을 샀으며, 그를 겨냥한 나쁜 소문들은 어린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어느 겨울 아침, 나는 그 사람이 탄띠를 꽉 매고, 코르덴 윗도리 위에 엽총을 묵직하니 매단 채, 장화로 서릿발을 밟으면서, 아마기(天城)로 가는 샛길 풀숲을 천천히 헤치고 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그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때 그 사람의 뒷모습은 지금도 내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물의 생명을 끊는 하얀 강철 기구로, 그처럼 차갑게 무장해야 했던 것은 어째서일까. 나는 지금도 도시의 혼잡 속에 있을 때, 문득, 그 사냥꾼처럼 걷고 싶을 때가 있다. 천천히, 조용히, 냉정하게ㅡ그리곤, 인생의 허연 강바닥을 엿본 중년의 고독한 정신과 육체 양쪽에, 동시에 배어들 만한 중량감을 눌러 찍는 것은 역시 저 닦고 닦아서 번쩍이는 하나의 엽총 말고는 없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시리아 사막의 소년

 

 

시리아 사막 가운데 영양떼와 함께 살고 있는 벌거숭이 소년이 발견되었다고 신문은 보도하며 그 사진을 실었다. 더벅머리 옆얼굴은 어쩐지 차갑고, 시속 오십 마일을 달린다는 아름다운 두 다리를 지닌 자태는 묘하게 슬펐다. 알아선 안될 것을 알고, 보아선 안될 것을 본 것 같은, 그때 나의 당황스러움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그 뒤 굶주린 노인을 보거나, 혹은 마음 거만하고 고명한 예술가를 만나고 있는 그런 때, 나는 문득 어딘가 먼 곳에, 그 소년의 눈길을 느끼곤 한다. 시리아 사막의 한 점을 기점 삼아, 영양의 생태를 뒤쫓아 완만하게 샘물을 돌아, 곧장 별에까지 뻗은 그 소년이 지닌 운명의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은, 다시 말해서 그 운명이 그린 순수회화적 곡선의 정갈함은, 그럴 때면 언제나, 세상 인간들을 한결같이 불행해 보이게 하는 이상한 슬픔을 애오라지 되비추고 있는 것이었다.

 

 

 

比良のシャクナゲ

 

むかし写真画報という雑誌比良のシャクナゲ写真をみたことがある

(옛날 <사진화보>라는 잡지에서 '히라의 철쭉'이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そこははるか眼下のような湖面一部が望まれる比良山界きであのりの高山植物群落その急峻斜面しくおおっていた

(그곳은 아득히 눈 아래로 거울 같은 호면의 일부가 바라보이는 히라 산계의 꼭대기로서, 저 향기 높고 하얀 고산식물의 군락이, 그 급준한 사면을 아름답게 덮고 있었다.)

 

その写真はいつか自分生活疲労しみをリュックいっぱいにまなかいに比良稜線ぎながら湖畔さい軽便鉄道にゆられこのしい山巓一角辿つくがあるであろうことをひそかにしてわなかった

(그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언젠가 내가, 인간 세상의 생활의 피로와 슬픔을 륙색 가득히 짊어지고, 눈앞에 선 히라 능선을 우러러보면서, 호반의 작은 경편철도에 흔들리면서, 이 아름다운 산정의 일각에 다다를 날이 있을 것임을, 남몰래 마음에 기약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絶望孤独ずや自分はこのるであろうと—。

(절망과 고독의 날, 반드시 나는 이 산에 오를 것이라고ㅡ.)

 

それからおそらく十年になるだろうがはいまだに比良のシャクナゲをらない

(그 이후 아마 십년이 되겠지만, 나는 아직껏 히라의 철쭉을 알지 못한다.)

 

れていたわけではな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その機会にはくなっている

(연년세세, 그 높은 봉우리의 흰 꽃을 눈꺼풀에 그리는 기회는 내게는 많아졌다.)

 

ただあの比良群落のもとでけてりをうとその自分姿とか不幸とかに無緣ひたすらなるしみのようなものにれるとなぜか下界のいからる絶望いかなる孤独なお猥雑なくだらぬものにえてくるのであった

(다만 저 히라 봉우리 꼭대기, 향기 높은 꽃 군락 곁에서, 별로 얼굴을 향하고 잠들 내 잠을 생각하면, 그때의 내 모습이 갖는, 행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와 무연한, 한결같은 슬픔과 같은 것에 접하면, 왠지, 하계의 어떠한 절망도, 어떠한 고독도 한층 외잡한 하찮은 것으로 생각되어오는 것이었다.)

 

 

 

이상이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이후 이 문제에 대해서 쓰지 않겠다. 나는 내 근거를 보강하고 싶었을 뿐이고 딱히 다른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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