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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기러기 황순원 전집 1
황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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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우리에게 황순원은 순수문학의 대표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1950년 이전까지 황순원의 작품세계는, 당초의 시적 정서가 초기 단편소설에까지 이어져서 작가 자신의 신변적 소재가 주류를 이루는 주정적 경향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비록 삶의 현장에 과감히 뛰어든 문학은 아니로되, 극한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을 가다듬으며 뒷날의 문학적 성숙을 예비한 서장 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1)그는 시대현실에 대한 인식을 위주로 소설을 써 온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정신적 아름다움과 순수성,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출발했고 이를 흔들림 없이 끝까지 지켰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2)그러나 본 과제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그의 작품 「늪」은 그의 다른 작품처럼 순수하고 아름답고 서정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모성애’인데, 타 작품에서처럼 아름다운 모성애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황순원의 소설 「늪」에서 보여지는 그릇된 모성애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어머니가 소녀에게 - 모성의 집착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다. 자신이 삶을 살아오면서 거쳐야 했던 고통들을 자식에게는 결코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러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애정이 낳은 자신의 가치관과 자식의 가치관의 동일화에 대한 집착은 사춘기 소녀의 자아 형성에 있어 결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만은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은 황순원의 작품 「늪」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작품에서 소녀의 어머니가 성에 대해 보수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다음의 1,2,3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소녀 어머니는 애 셋이나 둔 여자가 머리를 잘라 지지고 옥색 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7)

 

 2.아까부터 소녀 어머니의 흐린 시선을 느끼면서 새로이 마주 보았다. 소녀의 어머니는 곧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7)

 

 3.부인의 집에서는 지금 남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여 오랫동안 말썽이 많다가 종내 부인이 자기의 마음대로 붙고 말았다는 말을 하였다. 붙었다는 자기 말에 소녀의 어머니는 스스로 귀밑을 붉히고 이어서, 부인은 여태까지 본가에는 가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후모 밑에서 자라난 탓이라고 하였다. (8)

 

소녀의 어머니의 소녀에 대한 사랑은 소녀의 가정교사 태섭의 눈을 통해 비춰진다.

태섭은 친구 부인의 소개로 한 소녀의 가정교사 일을 맡게 된다. 태섭과의 처음 만남에서 소녀의 어머니는 둘만의 시간을 갖자마자 그에게 “애 셋이나 둔 여자가 머리를 잘라 지지고 옥색 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부정적인 느낌을 담아 물음으로써 자신의 보수적인 생각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태섭의 대답으로 그와 자신의 사상이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재보려 하고 있다. 그녀는 처음부터 태섭을 ‘흐린 시선’즉 믿음이 확실치 않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는 처음 본 남성에게 자신의 딸의 교육을 맡기는 것을 불안해 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녀가 처음 본 남성 앞에서 스스로 얼굴을 붉히면서‘붙었다’는 말을 하려 한 것은 자신의 친구이자 태섭을 소개한 부인이 남성을 제멋대로 선택함으로 인해 완전하게 행복하지는 않은 -본가에도 다니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딸의 교육을 맡기게 된 남성에게 자신의 보수적이고 부정적인 남성관이 옳음을 주장하고 이를 강하게 나타냄으로써 알아서 조심해 달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수업이 시작되면서 소녀와 태섭이 한 공간에 있게 되자 어머니의 감시하는 듯한 시선은 계속된다. 어머니의 소녀에 대한 과도한 사랑은 이처럼 비정상적인 행태로 나타난다.

 

1.소녀의 어머니는 흘깃흘깃 태섭과 소녀를 번갈아 보면서, 정신 차려 잘 배우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였다.(9)

 

2.소녀 어머니의 흘깃거리는 시선을 받아 가며 다음 날부터 소녀의 예습과 복습이 시작되었다.(9)

 

3.어머니가 자기보다 더 열심히 이쪽을 살피고 듣고 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우스워 그런다고 하며 한층 더 소리 높여 웃었다.(10)

 

4.소녀의 어머니는 또 되도록 태섭에게서 먼 거리를 잡느라고 움직거렸으나 소녀는 들어오지 않았다.(10)

 

5.소녀는 생각난 듯이, 그리고 누가 밖에서 엿듣기나 하는 것처럼 갑자기 앞 미닫이를 열었다. 뜰에서 소녀의 어머니가 김칫거리를 다듬다가 놀란 듯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12)

 

 

위 인용문에서 보듯 거의 작품의 매 장면마다 어머니의 시선은 태섭과 소녀를 쫓는다. 그러한 진득한 시선은 끝없이 지속되면서 알 수 없는 압박감을 태섭에게 주고 태섭은 은연중에 자기도 모르게 소녀의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후 소녀의 어머니는 이제는 아예 드러내고 자신의 생각을 태섭에게 말한다. 공부도 공부지만 먼저 남자를 멀리하도록 잘 가르쳐 달란 말은, 공부보다 남자를 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과 같다. 소녀의 어머니가 소녀의 가정교사에게 이러한 말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태섭은 어느 정도 자신이 지켜보았으므로 믿음이 간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직까지 소녀의 어머니는 태섭에게 ‘흐린 시선’을 보내고 이 시선에 태섭은 처음에 어머니가 먼저 시선을 피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이 먼저 시선을 피하고 저도 모르게 어머니의 의견에 동조하고 만다.

 

 소녀의 어머니는 잠잠히 한참이나 앉았다가 이번에는 나직이, 공부도 공부지만 먼저 남자를 멀리하도록 잘 가르쳐 달라면서, 사실 요새 여자 안 속이는 남자 어디 있더냐며 태섭을 쳐다보았다. 태섭은 소녀 어머니의 흐린 시선을 피하면서 저도 모르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12)

 

그러고 몇 일 뒤 소녀와 함께 외출한 태섭은 자신 모르게 소녀의 어머니가 자신들을 미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소름이 끼칠만큼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 후 어머니는 이제 자신에게 가감없이 소녀의 남자 문제에 대해 상의하고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나타낸다.

 

 태섭에게 뒤 왼쪽 과일가게 옆 골목에 어머니가 따라와 서 있다는 것을 알리고 얼마만큼은 교외로 가는 길을 가다가 보자고 하였다. (중략) 사실 소녀의 어머니는 과일 가게 옆에 서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14)

 

 소녀가 어떤 남자와 만나는 눈친데 그런 것 같지 않더냐고 하며 얼굴을 붉혔다.(중략)소녀의 어머니는 또 잠잠하다가 이번에는 혼잣말처럼, 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자기는 그 애를 놓아주지 못한다고 하고는 소녀가 올 시간이 생각난 듯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18)

 

소녀의 가정교사인 태섭에게 소녀가 어떤 남자와 만나는 문제에 대해 말하면서 그녀는 또 한번 자신에게 다짐한다. 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자기는 그 애를 놓아 주지 못한다는 말은 더 이상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한 말이 아니다. 자식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이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자식이 있는 것이다.

 

3. 소녀가 어머니에게 - 동정에서 거부로

 

 2번에서 어머니가 소녀에게 가지는 모성을 넘어선 집착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어머니의 그릇된 사랑을 소녀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소녀는 태섭에게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는데 이를 살펴보면 소녀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1.어머니가 어디까지든지 남자를 경계시킨다는 이야기로, 사실 그러는 것도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받은 타격으로 보면 마땅한 일일 것이라는 말과, 전에 아버지가 밖에 나가서 딴 여자들과 만나다 못해 나중에는 그런 여자들을 집 안에 끌어들이기까지 하던 일을 어려서 보아 잘 안다는 말이며, 그럴 적마다 어머니는 이를 갈며 밤잠을 못 자고 울곤 하여 자기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데리고 들어온 여자가 아침에 일어나면 함께 죽어 있어 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고 하였다.(15)

 

 2.요즈음도 어머니는 그때에 받은 원통함을 도리어 그때 이상으로 살려 가면서 아버지를 원망하고 여인들을 욕질하면서 으레 자기더러 남자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말라고 타이르고는 자기 하나만 의지하며 여태까지 살아오느라고 별의별 고생을 다 참아 왔다는 이야기와 (중략) 나중에는 반드시 죽기까지 모녀 단둘이 살다가 죽자고 다짐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15)

 

 3.소녀는 자기도 얼마 전까지는 어머니와 한 심정이 되어 아버지를 원망하고 여인들을 미워하면서 진정으로 일생을 불쌍한 어머니와 같이 지내리라는 결심을 해 왔으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에게 반감 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과, 요새는 지난날의 가슴 아픈 사실을 되풀이하며 자식에게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만 애쓰는 어머니가 가엾게는 생각되지만 그대로 좇아갈 마음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다.(16)

 

 4.소녀는 어머니가 졸도해 넘어진 것을 보고 의사를 부르러 달려가면서도 오히려 그러한 어머니보다도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는 아버지와 그 여인에게 더 동정과 호의가 감을 어쩌지 못했다는 말을 덧붙였다.(17)

 

위 인용문을 차례로 살펴보면 소녀는 처음에 어머니를 배신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큰 상태였다. 어린 자신이 보기에도 어머니는 피해자였고 아버지는 가해자였다. 그러한 생각은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을 낳게 되었고 이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마음은 점점 변화하게 된다. 그 주된 이유는 어머니의 자신에 대한 부담스러운 태도 때문이다. 어머니는 남편을 잃고 자식에게 인생을 건다. 이는 점점 지나쳐 져서 딸을 남편 대신 삶의 동반자로 인식하게 되고 평생을 함께 하자는 다짐을 하게 한다. 이는 소녀로 하여금 심적인 부담감을 주게 되었고, 소녀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유년기의 감정적이고 어린 생각에서 좀더 성숙하게 발전함으로써 어머니와 자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어머니는 물론, 같은 여성으로써 안타까운 상황이고, 자신에게 당신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만 애쓰는 어머니가 가엾게는 생각되지만 그대로 좇아갈 마음은 전혀 없는, 보다 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의 병을 알게 되고 아버지의 병으로 인해 생활고를 겪게 된 아버지의 또 다른 부인이 어머니를 찾아와 병원비를 애원하는 것과 이를 분함과 욕으로만 매몰차게 끊어내는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또 한번 변화하게 된다. 어머니는 무조건적인 피해자인줄만 알았고 어렸을 적에 자신이 보았던  어머니의 괴로워하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 없었으나 지금은 어머니가 졸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를 부르러 가는 도중에도 어머니에 대한 생각보다 아버지와 그 여인에 대한 동정이 더욱 커지게 된다. 소녀가 보기에는 병든 아버지를 간병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든 구해 보고자 악한 말을 들을 것을 알면서도 찾아온 아버지의 첩이 밉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만큼 소녀는 컸고 이제는 무조건적으로 어머니의 말만을 따라 알 나이는 지났던 것이다.

결국 소녀는 어머니와 자신의 가치관의 차이와 부담스럽고 정상적이지 않은 모성애을 견디지 못하고 해방구를 찾기에 이른다.

 

 

병든 아버지를 집에 들이지 않는 어머니의 졸도가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면서, 사실은 지금 소년과 자기는 어디로 떠나는 길이라고 하였다.(24)

 

  소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기네는 행복해 보이겠다고 소리치고는 빛나는 눈에 눈물을 내돋히며 풍랑이 인 바다 무늬가 있는 치마를 물결 지으면서 도어를 밀고 나가 버렸다.(24)

 

 이미 소녀는 어머니와 다른 인격체를 지닌 사람이다. 소녀는 한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소년에 대한 지극한 사랑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서 또는 어머니의 부담스러운 애정에 대한 해방구로서 소년을 만나고 있다. 해방구를 만나 그에게로 떠남으로써 소설은 종결된다. 이는 어머니의 소녀에 대한 그릇된 모성애가 낳은 결과인 것이다.

 

4. 맺음말

 이상으로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의 그릇된 애정을 나타낸 황순원의 작품 「늪」을 살펴보았다.

 결국 소녀의 어머니의 그릇된 모성은 소녀의 숨통을 조였고 소녀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차게 식어 어머니의 졸도에도 크게 연연치 않는 모습을 보이며, 병든 아버지를 집에 들이지 않는 어머니를 인정치 않게 된다. 어머니는 어머니, 나는 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소녀는 더 이상 어머니와의 관계를 지속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집을 나감으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탈출하게 된다.

 황순원에게 있어 모성은 중요한 소재이다. 그의 작품에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을 지라도 어머니는 반드시 등장한다. 어머니는 자식에 한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이이므로 따뜻한 포용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어머니의 그릇된 모성애를 보여줌으로써 올바른 모성애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1) 김종회, 「문학의 순수성과 완결성, 또는 문학적 삶의 큰 모범」,『황순원』, 새미, 1998 , 20

2) 김종회, 위의 책,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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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외롭다 문학동네 시인선 34
김승희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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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선택의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연속된 결정의 순간들 속에 우리는 잠시도 긴장감과 불안의 끈을 놓을 수 없다. 마치 잔잔한 파도 위에 떠 있는 상태인 채로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잔잔한 파도 뒤에 숨겨진 커다란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커다란 파도를 바라보며, 그것에 부딪혔을 때의 결과를 예상하면서 공포에 떨고, 절망 속에 시련을 맞이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나고자 한다.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희망은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절대적인 힘, 없어서는 안 될 그 무엇으로 인식되어 왔다. 모두들 희망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하지 않았지만 ‘희망이 있어 다행’이라며 고마운 눈초리로 안도를 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희망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진리로 자리매김하였고, 그 누구도 이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문학에서 역시 희망은 일관되게 밝고 긍정적인 존재였다. 적어도 김승희가 이 시집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김승희는 시집 <희망이 외롭다>에서 이 시대에서 희망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작가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남발되고 있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연 희망이란 무엇이고,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가 되묻는다. 희망이라는 단어만이 속 빈 껍데기처럼 떠돌아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희망이라는 껍데기 속에 진실된 희망은 존재하고 있는지, 만약 희망이 보이지 않아 되찾아야 한다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 희망을 가지기 어려운 이 시대에 희망을 버리지 못해 되려 희망이 고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가는 이 시대에 희망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쏟아내며 희망을 염려하고 있다.

 

1. ‘희망’ 그 본연의 모습

 

작가는 ‘하물며’, ‘아직’, ‘이미’, ‘어쨌든’, ‘비로소’, ‘아랑곳없이’라는 말에서 희망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아쉽게도 홀로 설 수 없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절망 끝에 달려 있거나, 절망을 외면하는 경우에 대부분 위치한다. 이토록 희망의 위치는 위태위태하다. 그러나 위태위태한 것이 희망의 본연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믿는다. ‘덜어내고도 다시 고이는 힘’인 희망은 ‘매화’처럼 ‘힘이 세’다고 말이다.

 

 

2. ‘희망’이 변색될 수밖에 없는 우울한 공간

 

그러나 이 말들은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우울해진다.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인 ‘서울’이라는 곳을 연작으로 엮어 자세히 지켜보고 있다. 서울의 현실을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희망이 결여될 수밖에 없는 이 차디찬 공간을 ‘얼어붙은 입이 자꾸 구겨지며 피가 터지도록’ 안타까워하며 아파한다. 작가는 ‘서울’이라는 공간이 ‘내가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힘든’ 공간이자, ‘자살도 깊이 들여다보면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너무 많’은 곳이라며 비판한다. 그러한 도시에서 희망은 결여되어 있다. 작가는 희망이 결여된 순간을 포착하여 시 속에 담아낸다. ‘골목마다 어린 소녀를 따라가는 성추행범이 많’고, ‘성폭행 하고 손목까지 잘라 유리컵에 꽂아놓는 미친놈이 많’다. ‘손바닥 뒤집는 거짓말’이 많으며, 그 ‘손바닥 뒤집는 그 손바닥들로 하늘이 자욱하’다. 거짓이 난무하고 범죄가 폭발하는 이 공간에서는 ‘법’도 ‘허전’한 상태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살벌한 도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차디찬 얼음같은 도시에서 끝없이 피를 쏟아내면서도 도망갈 수 없는 이유는 작가가 바로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이기 때문에, 이 우울할 수밖에 없는, 희망이 결여될 수밖에 없는 공간을 바로 응시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공간 속에서 과연 희망은 존재할 수 있는가, 또한 희망이 존재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인지, 만약 희망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면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와야 할 것인가 작가는 고민하며 도시를 서성인다.

 

3. 마지막 ‘희망’을 찾아서

 

작가는 이내 ‘낙원역’을 찾고자 한다. 끝내 그는 마지막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다.

결국 그가 택한 희망을 찾기 위한 마지막 방법은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하면 오늘이 오늘이 아니고 자기는 자기가 아니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요’ 하며 오늘의 이 세상을 부정하는 것. 작가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부인하기에 이른다. 심지어는 ‘밀가루가 바람에 날아가듯 세상의 오만가지 자아가 원심력의 궤도를 타고 날아간다 아니 궤도 따위는 없다 얼굴 없는 시간이 된다’ 며 절망적인 ‘현재’를 완벽하게 지움으로써 희망을 품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달걀’처럼 ‘냉장고 위 칸에 희고 얌전히 꽂혀 있’을 뿐이다. 시인에게 삶은 이미 냉장고 안처럼 너무나 춥다. 현실을 춥디 추운 곳으로 인식하고 벗어나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냉장고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또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희망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이내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품을 수밖에 없어서, 희망은 절망보다 더 외롭다.

 

4. 희망은 외롭다

 

작가는 이 시대에 존재하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끝내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힘겨움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절망적인 공간에 사는 우리가 모든 것을 놓아버리면 단순히 가라앉음으로써 끝낼 수 있는데, 마지막 ‘희망’이라는 말이 끝까지 남아서 놓아버리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더욱 힘겹다고 한탄한다. 작가는 희망까지도 놓아버릴 정도로 힘겨운 이 시대를 아프게 바라본다. 그러면서 끝내는 세상과 시대가 희망을 놓아버려야 할 정도로 어렵게 돌아가고 있지만, 희망은 끝까지 남아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며 위안한다. 어쩌면 희망이라는 것은, 아니, ‘이 시대의 희망’이라는 것은 그래서 더 외롭고도 힘겨울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희망을 지킨다는 것은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마음대로 중지할 수 없는, ‘희망과 나’는 끊을 수 없는 끈으로 이어진, ‘희망은 종신형’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작가에게 ‘희망은 외로운’ 것이다.

 

등단 40년을 맞이하여 <희망이 외롭다>를 발표한 김승희 시인은 작품집에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희망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희망이란 원래 그 존재방식이 위태한 것은 사실이나, 늘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의 곁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위험하고 잔혹한 이 공간은 희망을 숨쉬기 힘들게 만들었고, 이 공간 속에서 우리는 점점 희망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희망이라는 것이 끝내 놓아지지 않아, 아니 더욱 더 벅차게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려 희망을 가지고 있기가 너무나 힘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버릴 수 없는 희망은 종신형이 되고야 말았고, 이 시대의 희망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작가의 말처럼, 이 시대는 냉혹하고 잔인하다. 그래서 희망이 숨쉴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고, 희망이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하면서도 아프게 희망을 지켜내고자 하는 시인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희망이 종신형이라 하더라도, 희망이 외로운 상태라 하더라도 그래도 희망을 염려하고 외치고 있는 작가가 있어서 희망적이지 않은가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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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고백
김려령 지음 / 비룡소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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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김려령이다. 한 때 이 작가의 글을 읽고 많은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텅 빈 동굴처럼 공허한 마음이었던 나를 온기로 가득 채워주었던 작가. 그래서인지 이 작가의 신작은 더욱 기대가 된다. 어쩌면 완득이나 우아한 거짓말처럼 특유의 느낌과 위로를 기대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것 같다. 한 작가의 작품들이 비슷비슷한 느낌이라면, 그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나 이 작가만은 예외라 말하고 싶다. 그만큼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은 나에게 좋은 기억이었으니까. 분명 나와 같은 독자들이 있었으리라.

 

제목은 가시고백. 제목에서부터 뭔가 느낌이 온다. 마음 속의 가시를 고백하는 그런 글일까? 음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본다.

 

나는 도둑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누구의 마음을 훔친 거였다는 낭만적 도둑도 아니며, 양심에는 걸리나 사정이 워낙 나빠 훔칠 수밖에 없었다는 생계형 도둑도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한 도둑이다.

 

후훗, 웃음이 난다. 과연 김려령이다. 궁금증이 절로 일어나는 첫 단락이다. 입맛을 다시며 책 속으로 깊이 들어가본다.

 

1. 도둑이고 싶지 않은 도둑 해일, 두 명의 아버지를 가진 지란, 그들의 가시.

 

이 도둑은 18세 소년이다. 평범한 가정환경의 이 소년은 특별할 것 없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 단지 평범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재빠른 손을 가졌다는 것. 그 재빠른 손은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남의 물건을 소년의 주머니로 가져오는 일을 했다. 소년의 책상서랍속 수북히 쌓인 건전지는 소년의 재빠른 손의 업적(?)을 말해주고 있다. 소년은 건전지를 볼 때마다 가슴 속이 답답하다.

 

소년의 재빠른 손에 전자수첩을 빼앗긴 소년의 반친구 지란.

지란은 새아빠와의 어색한 관계를 모면하려 일부러 새아빠의 전자수첩을 빌렸지만, 그만 전자수첩을 도둑맞고 만다. 그러나 지란이 속상한 건 전자수첩을 잃어버린 것보다 새아빠와의 관계가 회복될 기회를 또다시 잃었다는 것. 이혼한 엄마를 따라 새아빠와 엄마와 살고 있지만, 새아빠를 받아들이지도, 친아빠를 용서하지도 못했다. 두 명의 아빠와의 관계가 지란 그 아이에게는 커다란 가시로 박혀 있다.

 

2. 다양한 캐릭터- 새로운 멘토의 출현

 

도둑이고 싶지 않은 도둑 해일과 아빠들과의 관계가 고민인 지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성격 좋은 욕쟁이 친구 진오, 반장병에 걸린 다영, 백설공주의 왕비같은 미연, 감정설계사 해일의 형 해철, 따뜻하지만 상처있는 담임 용창느님 등이 그들이다.

역시나 살아있는 캐릭터들이다. 그 중에서도 주목했던 점은 새로운 멘토들의 등장이다.

 

담임은 제자에게 맞은 적이 있다. 그에게는 그 일이 마음을 닫고 넥타이를 조이게 만들었던 가시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늘 적정선까지만 다가갔고, 왠지 모르게 차가운 기운을 풍기던 선생이 되어가던 그였다. 그러던 담임은 어느순간인가부터 자신보다 반친구들을 더 생각하는 반장 다영, 병아리를 키우는 해일 등으로 인해 닫혔던 마음이 서서히 열리는 것을 느낀다. 확실히 이전의 멘토들의 캐릭터와는 다른 점이다. 완벽하게 ‘주는 것’만을 행하는 멘토가 아니라, 상처가 있던 멘토(담임)가 학생들에게 치유를 받고, 또 그 자신이 멘토가 되는 모습은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소설에서 가장 호감형 캐릭터는 해일과 지란의 친구 진오이다. 진오는 쾌활한 성격에 속깊은 면모를 지녔고, 해일과 지란 옆에서 위로와 용서를 동시에 행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또래인물인 진오의 가시는 크게 찾아볼 수 없었다. 진오같은 성격의 인물의 가시. 궁금증이 생기는 설정인데 말이다.

 

또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또 한 명의 멘토가 될 수 있었던 인물 해철이다. 해일의 형 해철은 감정설계사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진 청년이다. 그러나 감정설계사라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동생 해일의 멘토가 되어주지는 못하고 있다. 단지 자신이 불행하게도 평범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동생을 평범하게 보아주는 것으로 위로를 주고 있다는 정도일 뿐.

 

3. 해일과 지란, 그들의 가시 해결 방법.

 

해일은 꼬리를 문 거짓말 때문에, 얼떨결에 달걀을 부화시키는 일을 하게 된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면서 해일의 집에 지란과 진오가 구경가게 되고, 구경 온 지란과 진오에게 훔친 건전지를 나눠주고 밥도 같이 해 먹으면서 그들은 점점 가까워지게 된다.

지란 역시 자신의 상처인 친아버지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자신의 마음을 해일과 진오에게 털어놓게 되고, 급기야 아버지의 집을 난장판을 만드는 것에 친구들을 합세시킨다.

해일과 지란은 그들을 오랫동안 아프게했던 깊은 가시를 빼내는 작업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약간의 갈등 끝에 그들의 가시는 서서히 뽑혀간다.

그런데 조금 아쉬웠던 점은 그들의 가시가 뽑히는 갈등이 그렇게 리얼(?)하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친구가 도둑이라는데 크게 충격적이지 않은가? 그 충격의 묘사가 제법 분량이 나올법도 한데, 생각보단 큰 파장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작가의 전작들이 워낙 화려했던 탓에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러나 역시 김려령이라는 말이 나오게 했던 소설이었다. 작가에게 가장 고마운 점은 역시 또 한 번 내 마음을 도닥이고 어루만져 주었다는 점. 이렇다 할 가시가 시원하게 뽑혔단 느낌은 덜했지만, 왠지 따뜻한 밥상을 받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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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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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하고 고상한 제목과는 다른 내용의 소설이기에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 작품이다.

작가는 시종일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문장은 독자를 더욱 낯선 세계로 이끌고, 알듯 모를듯한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유는 더욱 더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이 소설이 논란의 중심에 서게 한 성적 묘사는 그로테스크함과 예술성의 접점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한다.

 

- 어머니라는 이름의 면죄부, 그 아래 드리워진 폭력의 그림자

 

에리카의 어머니는 훈육이라는 명목 아래 폭력을 행사했다. 어머니는 에리카의 삶에 있어 선택의 몫을 자기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그녀의 외면에서 성적 호감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제지한다. 어머니는 ‘예술가란 성을 멀리 해야 하는 것’이라며 에리카가 예쁜 옷을 입고 치장하는 것을 천박한 일이라 인식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리카는 옷을 사들인다. 그러나 사들인 옷을 입고 나간 적은 없다. 언제나 옷은 그녀의 옷장에 방치되어 있다. 이처럼 그녀의 여성성은 어머니의 눈에 띄지 않게 옷장 안에 방치된다. 그러나 방치된 자신의 여성성이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찢겨나갈 때, 그녀는 그녀의 절대 권력자 어머니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만큼 거칠게 대항한다. 그러나 이는 오래갈 수 없다. 그녀에게 있어 어머니란 존재는 절대적인 권력자이자, 자신의 예술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연주자로서 성공하지 못한 에리카를 아티스트로서 독보적이라며 그녀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말한다. 타인은 그녀의 예술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자신만이 에리카의 예술세계를 인정하고 평가하며 공유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시킨다. 에리카는 자신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이름도 어머니로 인해 인정받고 완성된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에리카의 인간관계에서 거의 전부라 해도 될 만큼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정신병자인 남편의 부재로 인해 정상적인 여성의 삶을 살지 못한 에리카의 어머니는 딸을 자신의 남편의 위치에 자리하게 했고, 자연스럽게 에리카는 어머니로 인해 여성이 거세되고 어머니의 남편이 된다. 어머니는 에리카에게 남성은 삶에 있어 절대적 필요존재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인식시킨다.

그런 어머니의 바람을 벗어나, 자신의 ‘귀여운 회오리바람’ 에리카에게 클레머라는 남성이 다가왔을 때 에리카가 동요하자 어머니는 문을 두드리고 술을 마시며 절망한다. 그러나 에리카 역시 어머니의 틀안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클레머와의 성관계 역시 어머니와 그녀의 공간인 아파트 안에서 행해지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인다. 에리카가 자신의 방 안에 들어가 가구로 문을 막음으로써 어머니와 자신의 사이에 한 겹의 문을 쌓으려 하지만, 자신의 방 역시 완전히 독립된 공간이 아닌, 어머니와 그녀의 공간인 아파트 안에 속해 있는 공간일 뿐이다.

 

 

- 에리카의 이중성과 사도마조히즘적 성향

 

에리카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갇혀 있는 틀 안에서만 행해졌다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도, 성적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타인의 몸을 볼 때도 언제나 숨어서 몰래 행동을 취했다. 그것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해가 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권력자에게 들킬 용의가 없는 한도 내에서였다.

그녀는 삶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신의 몸을 칼로 베기에 이른다. 동시에 그녀의 몸은 그녀에게 순전히 복종함으로서 쾌락을 느낀다.그녀의 사도마조히즘적 성향은 클레머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에리카는 편지를 통해 클레머에게 상세하게 자신의 욕망 해소법을 지시한다. 클레머의 남성은 에리카의 여성을 회복하게 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클레머는 남성으로서 자존심을 다친다. 클레머는 자신의 남성이 에리카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지 못하게 되자, 결국 에리카에게 성적학대를 가하고 만다. 굴욕감과 절망감에 그녀는 한 손에 칼을 쥐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클레머에게 복수하러 나선다. 결국 자신의 어깨를 내리치는 것으로 내면의 소리를 가둬두고 만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으로 작품은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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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물레 - 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김종철 지음 / 녹색평론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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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기술과 산업문명의 발달로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추구하고 있는 우리에게 저자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가장 평범하고도 중요한 진리를 담고, 독자에게 이러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점점 다가오는 죽음은 곧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의 소멸을 의미한다. 지구상의 전 생물의 존재유무를 결정짓게 하는 환경오염문제는 그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학 기술은 만병통치의 역할을 하고 있기에 점점 극심해져 가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를 알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과학적인 기술의 방법으로 극복될 것이라 믿고 있다. 당장 코앞에 다가온 위기를 인지하면서도 대처하지 못하는 만물의 영장인 인류의 우매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간디의 물레』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 그에 대한 책임감을 표현하고, 거의 비슷한 심정을 느끼고 있는 결코 적지 않을 동시대인들과의 정신적 교류를 희망하면서, 민감한 마음을 지닌 영혼들과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나가기 위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 저자의 욕망의 산물이다. 또한, 저자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개인의 자기자신에 대한 관계의 문제와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문제라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정치 경제의 문제이자 동시에 철학과 도덕과 종교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저자의 메시지에 대해 동의하면서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생각을 간단히 표명해 보고자 한다.

「간디의 물레」에서는 간디가 인도사람들에게 서양의 산업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 물레질을 할 것을 권유했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 간디의 ‘물레’는 간디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상징적 단서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의 ‘물레’란 무엇보다 인간의 노역에 도움을 주면서 결코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인간적 규모의 기계의 전형이다. 간디는 기계 자체에 대해 반대한 적은 없지만, 거대기계에는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위계적인 사회조직,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도시화, 낭비적 소비가 수반된다는 것을 주목했다. 생산수단이 민중 자신의 손에 있을 때 비로소 착취구조가 종식된다고 할 때,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는 그 자체 비인간화와 억압의 구조를 강화하기 쉬운 것이다. 간디가 구상했던 이상적 사회는 국가체제가 아닌 마을민주주의에 의한 자치가 실현되는 공간이다. 여기에는 폭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비폭력주의자였다. 이윤추구와 물건과 권력에 대한 맹목적 탐욕은 폭력을 존재하게 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난무하고 있는 사건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을 좀 더 창출해 내기 위해 오늘도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그러한 시위로 인해 수많은 목숨이 희생당하기도 한다. 산업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은 그에 의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우리는 남을 짓밟고 서야지만 남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어쩌면 간디는 이런 사회를 두려워한 것일지도 모른다.

「환경위기의 내면구조」에서 저자는 특별히 주의할 필요가 없었던 깨끗한 공기, 물, 흙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되살리느냐 하는 것이 지금은 사활의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즘은 물을 사고 파는 시대이다. 불과 십년 전만 해도 물을 사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기도 하다. 깨끗한 공기 역시 산업문명의 발달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봄철이 되면 우리는 황사에 유의해야 하기에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황사는 점점 심각해지고 황사로 인해 몸이 약한 사람들은 목숨을 위협받는, 그래서 외출을 금해야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더욱 무서운 것은 황사가 봄철에만 오는 것이 아닌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과학의 날 행사에 ‘과학발달이 가져올 수 있는 부정한 측면’ 이란 주제에 대한 그림으로 뿌연 공기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의 모습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이것은 불과 십여년 만에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과학기술이 날로 발전하면서 우리의 목숨 또한 날로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으로부터 십여년 후에는 산소공급기를 부착하고 다니는 그런 일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2035년에 소행성과 지구가 충돌하면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이 그것을 막아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 오염으로 인한 지구의 멸망은 지금부터 우리가 하나가 되어 매일 매일을 의식하며 고쳐나가지 않으면 막을 도리가 없다. 어쩌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지구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를 제외한 모든 생물이 소멸되어 있는 지구의 멸망에 대해 국한되어 있다.

『간디의 물레』에서는 끊임없이 우리가 직면해 있는 환경오염의 문제에 대해 낱낱이 폭로하고 이에 대한 대책방안을 강구하고자 하고 있다. 또한, 대책방안으로서 생명운동, 노동운동, 녹색운동과 한살림 공동체운동을 예로 들며 이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고 있다. 생명운동, 노동운동, 녹색운동과 한살림 공동체운동이라는 것에 대해 부끄럽게도 나는 무지했다. 이번 기회로 이러한 운동들에 대해 알 수 있게 된 점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고 녹색소비자 운동에 대해 알게 되면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부분부터 고쳐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시행하고 있는 일회용품 반환운동도 일종의 녹색소비자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장 평범한 말 ‘나부터 실천하자’라는 말이 순간 떠올랐다.

『간디의 물레』에서는 비단 환경의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경제와 교육적인 면에까지 저자는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다. 경제, 환경, 교육 이 모든 부분은 서두에 밝혔던 저자의 포괄적 질문 -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 - 에 대한 여러 측면에서의 답변으로, 질문에 대해 일맥상통한다.

감명깊게 읽었던 부분중 하나로 「광우병과 폭력의 논리」를 꼽을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광우병의 발생과정이다. 과정은 다음과 같다. 광우병이 십년 전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어디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학자들이 ‘프리온’이라고 이름붙인 동물성 단백질의 작용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료문제로 인한 쓰레기 처리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인데 도살된 소나 양의 내장 따위를 가공하여 이것을 사료의 일부로 이용하는 것으로, 바로 이것이 ‘단백질 보충제’라는 것이다. 결국 광우병 또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 대가인 것이다. 초식동물에게 짐승고기를 먹인 것은 명백한 동물학대이다. 또 다른 책『슬로푸드, 슬로라이프』에서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유전자 조작식품(GMO)인 양상추와 동물의 발톱과 털, 심지어 뼈까지 갈아만드는 햄버거 안의 고기에 대해 나와 있었는데 그것은 실로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이는 처절한 동물학대이자,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순간, 자사의 이득만을 위해 전세계에 그런 햄버거를 파는 맥도날드사에 대해 굉장한 분노가 치밀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를 상대로, 아니 인류와 동물을 상대로 한 폭력인 것이다. 생명에 대한 공경까지는 고사하고라도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우매함에 대한 대가로 우리는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고, 유전자 조작식품인 양상추를 먹고, 동물의 잔해가 섞인 고기를 먹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부분에서 저자는 현 시대의 경쟁의 원리가 상호배타적이라는 것을 교육을 통해 피력하고자 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공식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정규 학교교육과정을 통해 이성적 마음과 착한 성품이 북돋아지기는 커녕, 타고난 본래의 모습대로도 보존되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단편적 지식과 정보이다. 학생들은 그것을 주입하도록 강요받고 있고 윤리적 교육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오직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학교를 다니는 목표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윤리적인 교육은 배울 틈이 없다. 참다운 교육이란 지식과 정보의 일방적인 전달을 위한 강제적 과정이 아니라 인격상호간의 자유로운 교류이다. 교육에 필수적인 것은 철저한 상호존중과 신뢰에 기초한 자유와 관용의 분위기이다. 이 세상 만가지 악의 근본인 권위주의가 끼어들면 생명의 자연스러운 성장은 꺾이고, 억압과 눈치와 파괴적 심성이 조장되기 마련인 것이다. 권력은 학교에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교사는 권력을 가진 자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교사는 마음으로서 학생을 대하고, 학생들 또한 마음으로서 교사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교육을 가져오게 하는 가장 기본적 요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그것이 누구의 탓인지 지금 우리가 처한 교육적 현실은 불행하게도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학생과 학부모가 교실에서 교사를 구타했다는 식의 기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서로가 마음으로서 대해야 할 관계가 폭력으로 인해 얼룩져 가고 그러한 관계가 점차 소원되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주소인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이기심의 발로라고 보고 있다.

저자는 『간디의 물레』를 통해 인류의 고통은 이기심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환경오염에 대한 문제, 경제의 문제, 국제관계의 문제, 먹거리에 대한 문제, 생명에 대한 문제, 교육에 대한 문제 이 모든 문제의 원천은 이기심에 있는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물질주의의 기준에 따라 측정하고 인간영혼의 가장 내밀한 가치조차도 상품으로서밖에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산업사회, 사람의 에너지의 거의 전부를 야비한 소득과 소비의 경쟁속에 쏟아붓도록 강요하는 이 가공할 만한 체제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창궐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욕망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며, 이러한 노력은 유한한 시간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지지 않는 시간까지도 포함한다. 즉, 모든 인간은 삶의 지속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죽고 만다. 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의 대가이다. 우주의 힘은 우리보다 무한하게 위대하고, 죽음은 각각의 유한한 개체와 무한한 실체의 관계 속에서 냉엄하게 기록되어져 있다. 무한한 실체란 한계가 없는 자연이며, 유한한 개체는 이 한계가 없는 자연의 지극히 작은 한 개의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에서는 이 한 개의 조각에 불과한 인류가 터전인 거대한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발생케하고 있다. 이러한 우를 더 이상 범하지 않게 되길 바라며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해 나가려 한다. 『간디의 물레』는 나에게 많은 것을 선물해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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