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물레 - 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김종철 지음 / 녹색평론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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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기술과 산업문명의 발달로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추구하고 있는 우리에게 저자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가장 평범하고도 중요한 진리를 담고, 독자에게 이러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점점 다가오는 죽음은 곧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의 소멸을 의미한다. 지구상의 전 생물의 존재유무를 결정짓게 하는 환경오염문제는 그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학 기술은 만병통치의 역할을 하고 있기에 점점 극심해져 가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를 알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과학적인 기술의 방법으로 극복될 것이라 믿고 있다. 당장 코앞에 다가온 위기를 인지하면서도 대처하지 못하는 만물의 영장인 인류의 우매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간디의 물레』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 그에 대한 책임감을 표현하고, 거의 비슷한 심정을 느끼고 있는 결코 적지 않을 동시대인들과의 정신적 교류를 희망하면서, 민감한 마음을 지닌 영혼들과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나가기 위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은 저자의 욕망의 산물이다. 또한, 저자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개인의 자기자신에 대한 관계의 문제와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문제라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정치 경제의 문제이자 동시에 철학과 도덕과 종교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저자의 메시지에 대해 동의하면서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생각을 간단히 표명해 보고자 한다.

「간디의 물레」에서는 간디가 인도사람들에게 서양의 산업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 물레질을 할 것을 권유했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 간디의 ‘물레’는 간디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상징적 단서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의 ‘물레’란 무엇보다 인간의 노역에 도움을 주면서 결코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인간적 규모의 기계의 전형이다. 간디는 기계 자체에 대해 반대한 적은 없지만, 거대기계에는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위계적인 사회조직,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도시화, 낭비적 소비가 수반된다는 것을 주목했다. 생산수단이 민중 자신의 손에 있을 때 비로소 착취구조가 종식된다고 할 때,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는 그 자체 비인간화와 억압의 구조를 강화하기 쉬운 것이다. 간디가 구상했던 이상적 사회는 국가체제가 아닌 마을민주주의에 의한 자치가 실현되는 공간이다. 여기에는 폭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비폭력주의자였다. 이윤추구와 물건과 권력에 대한 맹목적 탐욕은 폭력을 존재하게 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난무하고 있는 사건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을 좀 더 창출해 내기 위해 오늘도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그러한 시위로 인해 수많은 목숨이 희생당하기도 한다. 산업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은 그에 의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우리는 남을 짓밟고 서야지만 남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어쩌면 간디는 이런 사회를 두려워한 것일지도 모른다.

「환경위기의 내면구조」에서 저자는 특별히 주의할 필요가 없었던 깨끗한 공기, 물, 흙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되살리느냐 하는 것이 지금은 사활의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즘은 물을 사고 파는 시대이다. 불과 십년 전만 해도 물을 사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기도 하다. 깨끗한 공기 역시 산업문명의 발달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봄철이 되면 우리는 황사에 유의해야 하기에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황사는 점점 심각해지고 황사로 인해 몸이 약한 사람들은 목숨을 위협받는, 그래서 외출을 금해야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더욱 무서운 것은 황사가 봄철에만 오는 것이 아닌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과학의 날 행사에 ‘과학발달이 가져올 수 있는 부정한 측면’ 이란 주제에 대한 그림으로 뿌연 공기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의 모습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이것은 불과 십여년 만에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과학기술이 날로 발전하면서 우리의 목숨 또한 날로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으로부터 십여년 후에는 산소공급기를 부착하고 다니는 그런 일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2035년에 소행성과 지구가 충돌하면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이 그것을 막아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 오염으로 인한 지구의 멸망은 지금부터 우리가 하나가 되어 매일 매일을 의식하며 고쳐나가지 않으면 막을 도리가 없다. 어쩌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지구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를 제외한 모든 생물이 소멸되어 있는 지구의 멸망에 대해 국한되어 있다.

『간디의 물레』에서는 끊임없이 우리가 직면해 있는 환경오염의 문제에 대해 낱낱이 폭로하고 이에 대한 대책방안을 강구하고자 하고 있다. 또한, 대책방안으로서 생명운동, 노동운동, 녹색운동과 한살림 공동체운동을 예로 들며 이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고 있다. 생명운동, 노동운동, 녹색운동과 한살림 공동체운동이라는 것에 대해 부끄럽게도 나는 무지했다. 이번 기회로 이러한 운동들에 대해 알 수 있게 된 점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고 녹색소비자 운동에 대해 알게 되면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부분부터 고쳐나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시행하고 있는 일회용품 반환운동도 일종의 녹색소비자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장 평범한 말 ‘나부터 실천하자’라는 말이 순간 떠올랐다.

『간디의 물레』에서는 비단 환경의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경제와 교육적인 면에까지 저자는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다. 경제, 환경, 교육 이 모든 부분은 서두에 밝혔던 저자의 포괄적 질문 -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 - 에 대한 여러 측면에서의 답변으로, 질문에 대해 일맥상통한다.

감명깊게 읽었던 부분중 하나로 「광우병과 폭력의 논리」를 꼽을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광우병의 발생과정이다. 과정은 다음과 같다. 광우병이 십년 전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어디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학자들이 ‘프리온’이라고 이름붙인 동물성 단백질의 작용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료문제로 인한 쓰레기 처리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인데 도살된 소나 양의 내장 따위를 가공하여 이것을 사료의 일부로 이용하는 것으로, 바로 이것이 ‘단백질 보충제’라는 것이다. 결국 광우병 또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 대가인 것이다. 초식동물에게 짐승고기를 먹인 것은 명백한 동물학대이다. 또 다른 책『슬로푸드, 슬로라이프』에서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유전자 조작식품(GMO)인 양상추와 동물의 발톱과 털, 심지어 뼈까지 갈아만드는 햄버거 안의 고기에 대해 나와 있었는데 그것은 실로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이는 처절한 동물학대이자,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순간, 자사의 이득만을 위해 전세계에 그런 햄버거를 파는 맥도날드사에 대해 굉장한 분노가 치밀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를 상대로, 아니 인류와 동물을 상대로 한 폭력인 것이다. 생명에 대한 공경까지는 고사하고라도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우매함에 대한 대가로 우리는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고, 유전자 조작식품인 양상추를 먹고, 동물의 잔해가 섞인 고기를 먹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부분에서 저자는 현 시대의 경쟁의 원리가 상호배타적이라는 것을 교육을 통해 피력하고자 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공식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정규 학교교육과정을 통해 이성적 마음과 착한 성품이 북돋아지기는 커녕, 타고난 본래의 모습대로도 보존되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단편적 지식과 정보이다. 학생들은 그것을 주입하도록 강요받고 있고 윤리적 교육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오직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학교를 다니는 목표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윤리적인 교육은 배울 틈이 없다. 참다운 교육이란 지식과 정보의 일방적인 전달을 위한 강제적 과정이 아니라 인격상호간의 자유로운 교류이다. 교육에 필수적인 것은 철저한 상호존중과 신뢰에 기초한 자유와 관용의 분위기이다. 이 세상 만가지 악의 근본인 권위주의가 끼어들면 생명의 자연스러운 성장은 꺾이고, 억압과 눈치와 파괴적 심성이 조장되기 마련인 것이다. 권력은 학교에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교사는 권력을 가진 자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교사는 마음으로서 학생을 대하고, 학생들 또한 마음으로서 교사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교육을 가져오게 하는 가장 기본적 요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그것이 누구의 탓인지 지금 우리가 처한 교육적 현실은 불행하게도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학생과 학부모가 교실에서 교사를 구타했다는 식의 기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서로가 마음으로서 대해야 할 관계가 폭력으로 인해 얼룩져 가고 그러한 관계가 점차 소원되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주소인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이기심의 발로라고 보고 있다.

저자는 『간디의 물레』를 통해 인류의 고통은 이기심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환경오염에 대한 문제, 경제의 문제, 국제관계의 문제, 먹거리에 대한 문제, 생명에 대한 문제, 교육에 대한 문제 이 모든 문제의 원천은 이기심에 있는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물질주의의 기준에 따라 측정하고 인간영혼의 가장 내밀한 가치조차도 상품으로서밖에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산업사회, 사람의 에너지의 거의 전부를 야비한 소득과 소비의 경쟁속에 쏟아붓도록 강요하는 이 가공할 만한 체제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창궐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욕망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며, 이러한 노력은 유한한 시간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지지 않는 시간까지도 포함한다. 즉, 모든 인간은 삶의 지속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죽고 만다. 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의 대가이다. 우주의 힘은 우리보다 무한하게 위대하고, 죽음은 각각의 유한한 개체와 무한한 실체의 관계 속에서 냉엄하게 기록되어져 있다. 무한한 실체란 한계가 없는 자연이며, 유한한 개체는 이 한계가 없는 자연의 지극히 작은 한 개의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에서는 이 한 개의 조각에 불과한 인류가 터전인 거대한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발생케하고 있다. 이러한 우를 더 이상 범하지 않게 되길 바라며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해 나가려 한다. 『간디의 물레』는 나에게 많은 것을 선물해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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