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돼지
미야자키 하야오 (Hayao Miyazaki) 감독 / 대원DVD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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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를 DVD로 봤다. 극장 개봉 당시 몇번이나 보려고 시도를 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던 영화다.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두 개를 DVD로 갖고 있는데, 하나는 [모노노케 히메]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붉은 돼지]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 역시 모노노케 히메 다음으로 이 영화, [붉은 돼지]이다. 영화를 본 오늘부터 그렇게 하기로 했다.

[붉은 돼지]는 독특한 편이라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애니메이션과 구분이 된다. 우선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란 점이 그렇고,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일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때 공군 파일럿으로 하늘을 누비던 마르코는 어느 날 적의 공습을 받아 사경을 헤매다 돼지 포르코가 된다. 돼지가 된 파일럿은 현상금벌이로 공적(空敵, 해적 : 바다 = 공적 : 하늘)을 소탕하고, 일이 없을 때에는 자신의 아지트에서 쉬면서 혼자 살아간다. 그에게 낙이라면, 전사한 옛 동료의 아내였던 여인 '지나'가 운영하는 바에서 술과 음식을 먹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커티스'라 불리는 양키놈에게 도전을 받아 싸우다 비행기가 엉망이 되고 만다.

비행기를 수리하러 밀라노에 간 포르코는 비행기 수리공의 손녀인 피오를 알게 된다. 똑똑하고 당찬 피오는 열일곱일 뿐이지만 이미 비행기 설계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이탈리아 공군의 추적을 당하는 포르코는 어쩌다 보니 피오와 함께 밀라노에서 도망쳐 나오게 된다.

겉모습이 돼지인 포르코이건만 지나와 피오 두 여인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복받은 남자다. (돼지는 동물이라 남자라기보다는 수컷이다, 라고 해야 하나?) 그는 다시 주 활동무대인 아드리아해로 돌아와 커티스와 마지막 담판을 짓고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영화는 물론 재미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풍자와 유머가 살아있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를 보고 난 후 드는 이 쓸쓸한 마음은 뭘까?

영화엔 결코 아이들이 보고 이해하라고 쓴 것이 아닌 대사들이 종종 등장한다.

"날지 못하는 돼지는 돼지일 뿐이다"
"전쟁으로 돈을 버는 것은 악당이다"
"파시스트보다는 돼지가 되는 것이 낫다"
"좋은 놈들은 이미 하늘나라로 갔다"

우스꽝스러운 돼지의 모습으로 가려진, 전쟁과 우정 따위에 대한 깊은 통찰은 이미 한참 전에 어른이 된(법적인 나이로) 나에게도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모호했다. 난 영화 속의 돼지가, 비행이, 전쟁이 뜻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나름대로 매우 심오한 철학, 혹은 평화의 메시지가 담겨 있진 않을까 하는 짐작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의도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거라 정리하기로 했다. 사실 그걸 알아낼만한 능력도 안되지만.

비행기 공장을 운영하던 미야자키 하야오 집안의 내력에서 '비행하는 돼지'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하야오의 영화엔 비행과 관련된 컨셉이 아주 많지만) 그리고 차가운 공군들과 대조적으로 오히려 따뜻하고 정감있게 그려지는 공적들의 사회는 그가 젊은 시절 몸담았던 학생운동의 잔상이 투영된다. 주인공은 공군에서도 탈영하고, 공적 사회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 외로운 돼지이다. 60년대 일본의 국가주의에 저항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삶을 선택하지 않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모습일지 모른다.

치열했던, 하지만 무엇인가 공허했던 과거에 대한 진한 향수는 영화의 엔딩 장면과 흐르는 샹송에서도 뚝뚝 묻어나오고 있다.

한 가지만 더 추가하자면,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소녀에 대한 동경 내지는 판타지가 등장한다. 하야오 영화에서 이미 수차례 반복 등장하는 강인하고도 순수한 소녀는,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나 '붉은 돼지'와의 로맨스의 경계직전까지 진출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지켜보기가 매우 아슬아슬하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그의 영화에 나오는 소녀 판타지를 분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붉은돼지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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