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대항한 양심 -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자작나무 / 1998년 4월
평점 :
품절


오랫동안 책장 한 켠에 숙제처럼 꽂혀 있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폭력에 대항한 양심>.
이 책은 16세기 칼뱅이 신의 이름으로 독재를 펼치던 스위스 제네바에서 칼뱅의 독선과 권모술수에 맞서 외롭게 싸우다 죽어간 카스텔리오라는 인물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우상과 형식의 파괴, 카톨릭의 부패에 맞서 등장한 종교 개혁은 칼뱅에 의해 지독한 금욕주의와 교조주의로 변질된다. 칼뱅은 자신의 교리만을 진리로 선언하며 이에 맞서는 모든 자들을 이단으로 몰았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태어남 자체를 죄악시하는 극도의 금욕주의는 모든 형태의 쾌락과 상상을 억압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돈키호테 기질이 다분한 괴짜 신학자 세르베토는 칼뱅과 다른 몇 가지 교리를 설파하였다는 이유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 하나의 문장에 얼마나 큰 고통이 담겨 있었는지.. 세르베토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다가 '산 채로 화형'이라는 가장 끔찍한 형벌로 살해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엄혹한 독재 치하였고, 세르베토의 죽음의 부당성을 말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들 칼뱅의 치적을 찬양하기에 바빴고, 그에 대한 반대는 죽음 적어도 추방임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때에 한낱 신학자에 불과했던, 칼뱅의 권능에 비하면 그야말로 폭풍 앞의 촛불과도 같았던 카스텔리오는 세르베토 죽음의 부당성을 용기있게 주장하였다. 그 누구도 신의 진리를 독점할 수 없고, 더더군다나 신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동등한 자녀인, 같은 인간을 살해할 수는 없다. 나는 세르베토가 이단이냐 아니냐를 떠나, 세르베토를 지지하는 것과 무관하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 당신, 칼뱅을 반대한다. 탕, 탕, 탕!

카스텔리오의 논변은 더할 수 없이 명쾌하였다. 이보다 더 열정적으로 정신적 자유와 관용을 설파할 수 있을까 싶다. 칼뱅은 제거해야 할 또 다른 대상의 등장에 분노하였다. 그는 세르베토를 죽였을 때와 똑 같은 방식인 온갖 음해와 공작으로 카스텔리오의 사회적 생명을 앗아가려 하였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진실과 오류의 대립은 칼뱅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결국… 억지로 찾아낸 꼬투리로 카스텔리오를 형장에 보내기 직전, 카스텔리오는 위경련을 일으켜 세상을 뜨고 만다. 사정을 아는 이들은 이를 두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카스텔리오가) 적들의 발톱에서 빠져나갔다’라고 말했다.

양심과 용기, 이 두 가지를 모두 지닌 자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봐도 감동적이다. (양심만 있는 자라면, 그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전해지기 힘들 것이다. 그의 마음 속의 양심을 세상에 드러낼 기회가 없기 때문에. 용기만 있는 자들은 종종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오늘도 신문 사회면/해외 토픽면을 보면 별별 희한한 행동으로 뉴스를 만들어 내는 ‘용기백배’형 인간 군상들이 꽤 많다. ^^;) 하지만 양심과 용기를 모두 지닌 누군가가 있다면, 아주 좋은 세상을 만나지 않는 한 불운해지기 십상이다. 칼뱅의 16세기가 그랬고, 한국의 현대사가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양심에 따라 총을 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용기로 실천한 자들은 지금도 감옥에 갇혀 있다.

…얼마 전 누군가와 술을 마셨던 일이 생각난다. 그는 정형근(우리가 아는 그 국회우원 정형근)이 뭣을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똘똘하고 능력 있는 몇 놈 데려와라’는 명령에 따라 자신이 그런 일을 하게 되었고, 또 하라는 대로 열심히 일 했을 뿐이라는 정씨의 말이 수긍이 갈 것 같다고도 했다. 모든 가치관이 혼란스럽다고도 했다.

나는 고달픈 직장인이고, 한 집안의 가장인 그의 말을 그 자리에서 반박하지는 않았다. 아둥바둥 살아도 제 몸 편히 뉘일 터 하나 마련하기 힘든 각박한 세상이다. 그이(=> 정형근)도 죽어라 열심히 살았고, 우리도 그렇다. 그렇다면 둘 사이에 다른 점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과연 그런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 변명이 될까? 그것은 차라리 쉽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고, 반대하며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자들이 언제나 있어왔기에 그렇다. 칼뱅 시대의 카스텔리오처럼 말이다. 칼뱅의 수많은 추종자들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고, 카스텔리오의 이름이 몇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는 것을 보라. 정씨가 공안검사도 악명을 날릴 때(본인의 말대로 하자면 열심히 일할 때)에도 알량한 대학 졸업장을 포기하고, 빨간 줄을 각오하고, 뼈 빠지게 농사짓는 부모님의 얼굴을 지워내며 투쟁했던 이들이 있음을 기억한다면… 변명도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생각은, 최소한 한 나라의 국회우원 정도가 되려면 혹독한 양심의 시험을 통과해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남들이 다 공공의 선을 쟁취하기 위해 싸울 때 제 한 몸의 영달을 위했던 이라면, 지금도 그럴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을까? 너무 엘리트 코스만 밟아와서 양심과 용기가 시험 받을 기회가 없었다면, 정치인으로서 내려야 할 수많은 판단의 순간에 그가 어떤 기준을 갖다 댈지 다소 의심스럽지 않을까?
카스텔리오와 같은 인물이 한국 정치에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위의 리뷰를 쓰는 본인은 시험이 닥칠 때마다 늘 양심과 용기가 시키는 반대 짓을 해왔다. 그래서 내가 국회우원 안하고,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택한 것이 아니겠는가? ^^;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블로 2007-02-05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뱅의 그 사건에 대해서는 저도 유감이지만, 칼뱅이 세르베투스를 죽였다는 표현은 뭔가 불공정해 보이는군요. 칼뱅이 생각처럼 그렇게 절대권력을 휘둘렀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