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빌 SE
라스 폰 트리에 감독, 니콜 키드먼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앞의 글)
유난히 많은 숙제를 남겨주는 영화들이 있다. 도그빌이 바로 그런 영화이다. 3시간이라는 긴 러닝 타임의 두 배, 세 배의 시간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에야 머릿 속의 짐을 약간 덜어낸 듯 하다. (그래요, 라스 폰 트리에. 당신이 이겼소.)

* 그녀에게 비밀이 있다... 어쩌구로 시작하는 영화 홍보 카피.

영화 팜플렛들이 다 그렇지만, '도그빌' 영화의 홍보 카피는 영화의 본질과 아무 상관이 없다. 마치 한 편의 스릴러물을 소개하듯 '그녀에게 비밀이 있다'는 둥 '상상, 그 이상의 충격적인 결말'이라는 둥, '그레이스, 그녀가 수.상.하.다'는 등의 온갖 수사들엔 귀를 닫아라.

이 영화는 우화다. 철저하게 보고 생각 좀 하라는 영화다. 인간 내면의 추악한 풍경들을 도그빌이라는 한 마을에 담고 있다. 미니멀한 세트와 인위적 조명, 과장한 나레이션은 우리들이 극중에 몰입할 수 없게끔 만든다. 주인공에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을 동화시킬 수 없다. 한 발 떨어져 지켜보면서 불편해 할 뿐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된다. 그들의 행동과 심리 속에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게 '나'이고, 더불어 살아야 할 '정다운 이웃'이며, 평단에서 떠들어대듯 '아메리카'의 모습이라고.

* 그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으나, 훌륭하지 않았다.

마치 내 귀에 대고 소리지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산다. 각자의 환경 속에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닌다. 빨리 따라잡으라고 한다. 뒤쳐지지 말라고 한다. 일도 잘해야 하고, 근사한 이성 파트너도 있어야 하며, 몸매도 날씬하게 유지하면서 재테크에도 능해야 한다. 인라인 스케이트도 탈 줄 알아야 하고, 홈페이지도 있어야 하며, 잘 놀 줄도 알아야 한다. 인맥도 있어야 하고, 한 방을 날릴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네 삶이 최선을 다하긴 하지만, 분명 훌륭하지는 않다. 확실히 그렇다. 남들과 똑같이 되기 위해, 최소한 뒤쳐지지 않기 위해 그렇게 허둥댈 뿐이다. 더 많이 가진 이를 질투하고, 더 적게 가진 이들을 무시하며, 못되는 일은 남을 탓하고 잘 된 일로 나를 치장하기에 바쁘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사는 동안 우리의 양심은 갈아낸 유리처럼 얇아지고, 도덕이란, 예의란, 배려란 것들은 시들어 급기야 사망선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이 영화에 '비밀' 같은 건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 예전부터 존재해 온 것들이었다. 내 생각엔 굳이 아메리카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록키 산맥이라고, 독립 기념일이라고, 마지막에 '영 아메리칸' 노래가 흘러 나온다고, 도그빌을 아메리카 위에 덧씌워봤자 마음구석의 찜찜함이 덜어질리 만무하다.

차라리 그냥 파고드는 편이 낫다. 불편해하는 내 마음의 심연을 끝간데까지 들추고, 도그빌의 한 사람, 한 사람(그레이스까지도)에 나의 모습을 투영하고 닮은 모습을 모조리 발견하여 통렬하게 반성해버리는 편이 낫다. 그러는 라스 폰 트리에 당신은 얼마나 잘 났소?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속물근성에 젖어 사는것 아니겠소? 라는 항의는 후에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뒤의 글로 이어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