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수희 옮김 / 열림원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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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다시 읽었다. 몇 년 전인가 이 책을 읽고 기묘한 흥분상태에 빠졌던 경험이 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남기고 세계의 끝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쓸쓸함과 상실감이 온몸에 전해져 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읽은 <세계의 끝과...>는 나에게 좀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전에는 '원더랜드'를 읽기 위해 쉬어가는 장 정도로 생각했던 '세계의 끝'은 파편처럼 내 의식을 자극하였다. '한정된 비전'을 갖고 살아가는 주인공 '나'는 그 한정된 비전을 자신의 무의식 속에 하나의 마을로 완성시켰다.

높고 완벽한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 마음을 잃은 채 자신의 일과 환경에 만족해하며 사는 주민들, 그들은 세계의 끝에 들어오는 순간 자신의 그림자와 작별을 하고, 그림자가 죽어가는 동시에 마음을 잃어버린다. 그들이 잃어버린 마음/자아는 마을에 있는 황금빛 털의 일각수들에게 흡수되고 일각수들은 겨울이 되면 그 마음/자아를 흡수한 채 그 육중한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죽는다.

죽은 짐승의 시체는 겨울 내내 회색빛 연기 속에 태워지고 그들의 두개골은 마을의 도서관에 보관된다. 마을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꿈읽기'가 되어 도서관에 보관된 두개골에 담긴 꿈을 읽는다. 희미한 빛 속에서 떠오르는 잔상들, 노래들, 풍경들, 따뜻한 마음들... '꿈읽기'가 일각수의 두개골에서 읽어낸 꿈들은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기쁨도, 슬픔도, 늙음도, 죽음도 없는 마을은 그 나름대로의 완전한 순환 속에서 1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고, 평온해 보이는 마을에도 불완전한 구석은 있다. 바로 그림자를 죽이고, 마음을 완전히 상실하는 데 실패하는 사람들이 쫓겨나는 숲이 그것이다. 그곳에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희노애락을 느끼는 사람들이 죄를 지은 듯 숨어 살아가고 있다.

세계의 끝에 당도한 '나'도 그림자를 보내고,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숲'에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의 끝'이건만, 정작 '나 자신'이 그곳의 주인은 아니다. 세계에 부적응하여 세계의 끝을 만들어낸 그가, 또 다시 세계의 끝에서 변방을 만들고 그곳에 머물게되는 셈이다.

하루키 소설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이 세계의 부적응자인 그의 주인공들은 하루하루 복잡한 삶에 지친 우리들을 어루만진다. 그가 권하는 시원한 맥주 한 잔에, 의미없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나면 삶을 짓누르던 무게가 그나마 조금 덜어질 것만 같다. 이 복잡한 세상도 단순한 하나의 마을로 의식 속에 넣을 수 있는 그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세계의 끝으로 향하는 그의 마지막 발걸음이 항구에 닿았을 때, 나 또한 햇빛 속에 부서진 거울처럼 빛나던 정오의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가 세계의 끝으로 떠나고, 세계의 끝에 있던 그가 그곳에 남기로 작정하고 그림자를 떠나보낼 때, 또다시 상실감에 몸을 떨었다. 찌는 듯한 방안의 무더위가 그 전율을 앗아갈 때까지 난 그렇게 계속, 계속 하루키를 음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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