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버지의 미소 - 김소진 유작산문집
김소진 지음 / 솔출판사 / 1998년 4월
평점 :
절판
어린 소년과 역시 어린 그의 누이가 산동네의 풍경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나보다. 반듯한 앞머리에 두 손을 가지런히 바지 섶에 붙인 흑백 사진 속의 소년, 마치 오랜 시간을 만나지 못한 나의 형제, 피붙이인양 가슴을 저미게 하는 그는 김소진이다.
서민들의 질박한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언어들을 다듬고 어루만져 우리 앞에 그려냈던 故김소진의 유작 산문집 <아버지의 미소>는 1997년 위암으로 마감해야했던 서른 다섯 그의 짧은 생애를 기리는 추모의 뜻으로 간행되었다. 책은 그의 대학시절 학회지에 실렸던 습작들로부터 죽음 직전까지 쓴 산문들로 이루어져 있고 형식은 소설, 시, 책글, 인물글, 대담글, 편지글 등으로 다양하다. 조각난 퍼즐들을 끼워 맞추듯 짤막한 여러 산문들을 통해 그의 성장과 상처,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겨진 화해의 몸짓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은 살아남은 독자들에게 행운이며 동시에 짐이다.
작가 스스로 밝힌 바처럼 김소진의 작품은 거의가 과거형이다. 작품 하나를 끝마쳤다는 것은 그에게 기억 하나를 복원해냈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축농증 때문에 냄새를 거의 맡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사주셨던 '달보드레한' 빵냄새를 기억해내기 위해 그는 얼마나 깊은 과거 속으로 침잠하였을까? 한 여름 땡볕에서 일하다 돌아온 어머니의 등물을 쳐줄 때 후끈 달아오른 땀냄새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또….
남과 북에 처자를 따로 둔 분단 역사의 희생자이며, 경제적으로는 무능력자에 가까웠던 그의 아버지와 '여성'을 잃어버리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던 어머니, 그리고 가난 때문에 배움을 접고 노동자로 살다가 그보다 3년 먼저 저 세상으로 간 김소진의 형. 이렇게 평탄치 않았던 가족사와 그가 살았던 산동네 풍경은 그의 작품의 모태가 되었다. 하지만 걷을 수 없이 어두운 그림자만이 기억의 전부는 아니다. 세월이 곱게 채색한 낭만도 있고 그리움과 애틋함도 묻어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내가 있다. 우는 내가 있고 웃는 내가 있고, 똥 싸고 먹고 속임수 치고, 싸구려 사탕을 허벌나게 빨아대는 내가 있다. 그리고 나를 닮은 아버지가 거기 있다. 거기를 갔다 오지 않고서는 앞을 향한 어떤 여행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는 작품을 통해 쉬 아물지 않은 생채기와 같은 유년의 기억들과 하나하나 화해하고 싶었나보다. 김소진은 자신의 기억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과정을 진정한 어른이 되는 통과제의처럼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혼돈과 어리석음으로 가득했던 유년의 기억을 덮어둔 채 살아가고 있을 때 김소진은 아버지에 대한 이해에서 한 발짝 나아가 민중을 끌어안고 그 삶을 보듬는다. 비둘기호 기차 모양으로 생긴 집에서 올망졸망 살았던 아홉 가구(장석조네 사람들) 이야기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한국현대사의 무대에서 소외된 다수의 민중이 그의 작품에서는 떳떳한 주인공의 자리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 낮은 곳의 땀냄새와 걸진 입담들이 그의 작품이 나아간 여정의 출발점이며 종착지였다는 것을 난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