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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평점 :
저는 언제나 무라카미 하루키를 하나의 '현상'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사람을 두고 '현상'이라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작품에 대한 열광이라거나, 그 아우라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지요. '하루키를 읽는다.'라는 것은 어떤 트렌드로 읽힐 수도 있고, 그 안에서 어떤 취향을 발견해 낼 수도 있고, 뭔가 범세계적인 느낌마저 주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요.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상실의 시대'로 하루키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 다음엔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읽었구요, '해변의 카프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읽다가 접었지만.. 그땐 너무 어려서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때 저는 하루키에게서 어떤 감화를 받지는 못했고, 그저 '상당히 세련되다' 이런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상실의 시대'의 남자 주인공은 살짝 이해하기 힘들었었구요,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까만 밤에 외따로 떨어진 아파트 위로 한 여인이 둥둥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만 남아있어요. 15년은 족히 된 어릴 적 이야기입니다. (결론은,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거죠 ㅎ)
어찌보면 생각이란 것을 굴리면서 제대로 읽은 하루키 소설은 '반딧불이',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빵가게 재습격' 같은 단편들과 '1Q84' 정도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근데도 왜 저는 그 전까지도 하루키가 하나의 '현상'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굳게 박아넣고 있었던 걸까요?
어찌보면 드디어,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제서야,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었습니다. 무척 좋을까봐 살짝 걱정이 되었는데요, (왜냐하면 쥐4부작을 몽땅 질러야 하기 때문이죠..)역시나, 무척 좋았습니다. 정말 기묘했던 것은,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그걸 느꼈고, 그 순간 나도 뭔가를 써 내야한다는 각오가 생겼고, 또 이 소설을 한 번만 읽고 끝내지는 않으리라는 예감 같은 것이 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욱 기묘했던 것은, 줄거리라고는 도무지 없는 것 같은 이 짧은 소설이, 저에게는 굉장히 서사적으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줄거리나 복선이나 미스터리가 담긴 것도 아닌데, 자꾸 그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그런 기묘함 말이에요.
단순하게 말하면, 그냥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서른 즈음 나이를 먹어서 회상하는, 약간 심심하고, 시간을 그냥 흘려 보내고 싶은 마음도 드는, 그런 여름 방학, 나는 그 스무 살의 청춘을 어떤 식으로 흘려 보냈나,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청춘이었나.
이걸 쓰다 보니 알겠네요. 저도 서른을 조금 넘긴 이 나이에, 그때 그렇게 작정하고 낭비해 버렸던 스무 살 무렵 여름 방학이 생각났었던 거였을까요? 그래서 이 흩어지는 이야기들이, 찬란한 하나의 서사로 읽혔나 봅니다.
어서 주문해 놓은 다음 책들이 오면 좋겠어요.
그때 그 반짝이던 시간들이, 책장 사이로 두둥실 떠오르면, 이건 정말 커다랗고 아름다운 서사가 될 것만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