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
김인숙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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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나는, 감히 생각한다. 이제 나도 젊음을, 청춘을 추억할 나이가 되었다고.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 너무 이쁘다고 여겨질 때, 앞으로의 일들보다 과거의 일들에 대해 떠드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요즘 아이들은'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때, 코미디 프로를 보다가 도대체 어디서 웃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을 때,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써놓은 소설을 읽고 문득문득 기시감을 느낄 때.

이 책을 읽기 전 <워터>라는 일본작품을 읽었다. 고등학교 수영선수들의 어느 여름을 그린 그 소설을 읽으면서, 청춘은 이다지도 찬란하구나, 감탄을 했더랬다. 그들의 설렘과 그들의 다툼과 그들의 첫사랑과 그들의 열정은 맑은 여름 하늘 아래 튀어오르는 수영장의 물방울 같아서, 나는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유쾌하고 즐거웠다. 분명히 즐겁고 충만했음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유쾌함으로 떠오르지 않는 나의 십대와 비교해 볼 생각도 없이 나는 그들과 노닥거리며 여름 한 나절을 보냈다. 그러면서 문득, 왜 우리의 청춘들은 늘 우울하고, 늘 암울하고, 세상의 모든 고민들을 다 짊어져야 하는지, 안타깝고 아쉬웠다.

김인숙의 소설 <봉지>는 나이트클럽을 출입하고, 다방 구석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날나리 여고생들이 나와도, 우울하고 암울하다. 자전거 체인에 맞아 구멍이 나버린 '봉지'의 청춘은 이리저리 바람에 나부끼는 비닐봉지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그렇게 나부끼다 만나게 된 세상은 가벼운 봉지 안에 우울과 세월의 무게만을 가득 담아놓는다. 고향마을에서의 평온하지만 불온한 삶은 추억하기에 너무 남루하고, 서울에서 겪게 되는 불안하고 무거운 시대는 봉지의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아무 것도 모른 체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한 십대 '봉지'의 마음에 불던 바람은 20대를 지나는 내내 가라앉지 않아 '봉지'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다.

그녀 '봉지'의 청춘을 엿보다, 나는 불쑥 투덜거린다. 왜 우리의 청춘은 이리도 우울하고 서글픈가. 왜 그녀는 등만 보이는 그를 사랑하고, 왜 그녀를 사랑하는 그 녀석은 제대로 된 고백 한 번을 하지 않는 것일까. 어린 시절 결혼한 또 다른 그녀는 아픈 가출을 일삼고, 그녀를 부인으로 된 서른이 넘은 그는 다 자라서도 그토록 서러운 표정으로 서 있기만 하는 것일까. 아무 생각 없이 자취방에서 뒹굴며 인터넷 게임이나 하는 청춘의 지리멸렬한 넋두리에 피식거리면서도, 이렇게 삶과 부딪히며 자기의 몸에 상처를 내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힘에 겹다. 시대와, 세월과, 시절 대신에 자기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욕망과 제대로 싸워가며, 이제야 시작된 먼 길을 뚜벅뚜벅 걸어내는, 그런 녀석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면 안 될까, 우리의 청춘이? 끝이 보이지 않는 신작로를 걸어가는 소년의 흰 티셔츠에서 느껴지는 희푸른 셀레임 같으면 안 될까, 우리의 청춘이?

오래된 그날, 그들의 사연이 가슴 답답해, 나는 이제부터라도 달리 살아봐야겠다. 어느 날 지금 이 순간을 청춘으로 기억하게 될 시간이 분명 나에게 찾아올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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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14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 순간도 청춘이 되고, 오늘도 오래 전 그날이 되겠죠.
선인장 님. 리뷰가 떠서 무지무지 반가웠어요.

선인장 2006-11-1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랫만이라... 인사하기도 조심스러워요... 빼꼼히 문을 열면 늘 님이 반가워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