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여관
임철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오후 한라산의 단풍이 담긴,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지난 여름 처음으로 올랐던 한라산 자락을 떠올리며, 한낮의 기온이 29도까지 오른 서울 하늘 아래에서 한참이나 그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하루 반 나절을 들고 있던 임철우의 백년여관을 덮고 다시 떠올린 한라산은, 흰 눈이, 연분홍 벚꽃 같은 눈이, 노란 유채꽃 같은 눈이 가득할 것만 같다. 연초록 빛을 발하는 손들이 난분분, 난분분, 눈처럼 날릴 것만 같다. 그 고운 빛깔의 눈이 가득한 한라산을 떠올린다...

모두가 잊어버린 기억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잊어버린 지루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아도, 가슴 속에 가득한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 생을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그런 이들을 만나는 건 불편하고 거북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 새롭지 않아서 흥미가 새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왜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냐고 타박도 하지 못하는 나는, 어서 그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성의 없는 청자이다. 그러나 그들 가슴에 가득한 분노와 울분과 슬픔과 억울함은 전염성이 너무 강해, 성의 없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같은 청자도 그만 마음이 답답해지고 만다. 잊으라고 말하기에는 그 슬픔의 정도를 짐작할 수도 없어서, 지겹다고 말하기에는 그들 마음에 있는 죄책감의 1% 정도의 감정을 나 역시 앓고 있어서, 나는 그만 하라고도 하지 못하고 답답한 가슴을 붙든체 그들의 이야기를 흘려 듣는다.

백 년에 한 번 온다는 개기월식이 일어나던 밤, 영도 앞바다에는 불꽃놀이가 한창이다. 국제항 개막을 축하하는 행사가 끝나고 벌어지는 불꽃놀이는 한 겨울 쩡쩡 얼어버린 밤하늘을 수만 개로 조각낸다. 그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항구의 뒷편 어느 이름 모를 바닷가에서, 그 불꽃보다 더 환한 빛의 수만 개 손들이 지구의 그림자가 삼켜버린 달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본 이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굳이 임철우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한국의 근대사는 직접 살아보지 않은 우리에게도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과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전쟁은 북과 남 사이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50년 세월 동안 전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작은 땅 곳곳에서, 그 땅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누구는 총에 맞아 피를 흘렸고, 누구는 칼에 맞아 피를 흘렸고, 그들이 흘린 피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지독하게 오래 남을 생채기를 냈다. 그들 가슴에 남은 생채기는 좀처럼 아물지 않아, 누구는 머리에 꽃을 달고 거리를 배회하고, 누구는 알몸으로 한 세상을 떠돌며, 누구는 입을 닫았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병자였고, 모두 죄인이었다.

어느 사이, 우리는 그들을 잊어버렸고, 그들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더 이상 눈여겨 보지 않는다. 역사라는 이름은 그들 모두의 상처를 추상화시켰고, 이제는 용서해야 할 때라는 듣기 좋은 말은 1% 남은 죄책감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했다. 산 자들은 잊혀졌고, 죽은 자들은 사라졌다.

다만, 아직도 그들 사이을 배회하는 영혼이 있어, 그 영혼의 목소리에 잠시 시간을 뺏긴 오늘 같은 날은, 나는 산 자들 사이에 서성이는 원통한 영혼에 밤잠을 설치게 된다. 세상은 산 자들만의 것이 아니어서, 이따금 내 방 어느 한 구석에 몸을 웅크린 그들과 만나게 되는 날에는 나는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난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심장의 두근거림은 그러니까, 보아서는 안 되는 영혼을 보아버린 탓이라 치자.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함과 초조함은 들어서는 안 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버린 탓이라 치자. 어느 밤, 지독하게 고단한 내 마음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으로 추락할 때 그 초록의 빛들이 기꺼이 나를 안아 위로해 주리라 믿어버리자. 

저 멀리 영도 바다에서 치뤄진 그 굿판에서 울리던 방울소리가 내 방 구석에 웅크린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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