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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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죄인처럼 살아간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생활의 안전은 물론이거니와

인격도 인권도 보장되지 않는 게 현실이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가난한 작가일 뿐.

가난하여 '이 땅 어디에도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고

떠도는' 유랑민처럼

나 또한 가난한 '유랑작가'일 뿐.

 

공선옥의 책 두 권을 연달아 읽고, 나는 누군가에게 고백했다. 지금부터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누군가 나에게 네 인생의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 읽은 공선옥의 두 작품을 이야기할 꺼라고. 불과 며칠 전의 이야기지만 참으로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고백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그 고백을 반복한다. 이 소설이, 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그리고 이 작가가 지금의 나는 반성하게 하고, 돌아보게 한다고.

이 소설 <유랑가족>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세상에 몸 누일 곳 하나 없어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 혹은 고향에 발을 붙이고도 마음이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고단한 한 세월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소설은 많이 서글프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많이 애처롭다.

산업화가 본격화되고, 농민들이 도시로 모여들면서, 빈민촌이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빈부의 격차는 날로 커져서 눈부신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고... 맹목적인 경제 발전, 한 길만을 고집한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지독한 불평등이야 모르는 이 없겠지만, 언젠가부터 우리는 이 뻔한 가난에 눈을 돌리고 살았다. 70년대, 80년대 소설 속에서 지난하게 이야기되던 사회 구조의 모순 대신에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에 대한 사유가 소설의 주제로 자리잡은 것이 이미 십여 년. 그저 세월이 변했고, 절대적인 빈곤은 해결되었다는 안일한 착각 속에서, 작가들은 물론 대부분의 독자들 역시 그저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사이 가난은 추억이 되었다. 못 입고 못 먹던 시절의 안쓰러운 이야기는 그리운 추억 한 토막으로 포장되었고, 길거리에서는 위생상태 불량하다는 추억의 먹거리가 비싼 가격으로 팔려 나갔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난곡의 재개발 소식을 보도한 한 프로그램에서는, 달동네 사람들의 정겨운 삶의 모습이 더 부각되었다. 이따금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난은 과거의 일에 불과했다. 그래서 지독한 가난을 배경으로, 비록 가난했지만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던 그 시절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그렇게 가난은 현실이 아닌, 어렴풋한 추억이 되어갔다. 먼지 묻은 흑백사진이 모두 아름다운 것처럼, 가난 역시 현실의 옷을 버리니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직도 가난한 사람들은 죄인이었다. 길거리에 마주치는 노숙자들은 언제 폭력을 행사할지 모르는 예비 범죄자들이었고, 도심의 미관을 해치는 사람들이었다. 공무원들은 노숙자들의 잠자리를 없애기 위해 공원 안 의자에 말뚝을 박았다. 가난한 아이들은 예의도 없고, 염치도 없는 쓰레기들이었다. 그들은 어디서나 소란을 피우고, 삶에 대한 의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그래서 멀리 하는 게 그저 최고인 그런 존재들이었다.

그러니, 지금 가난은 그저 피해야 할 것. 달동네가 없어졌으니, 이제 가난한 사람들 역시 없어졌으며,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은 적당히 격리해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두면 될 터였다.

그런데 작가 공선옥은 말한다. 가난은 아직도 추억이 아니라고. 눈 돌리고 싶은 현실을 꾸역꾸역 찾아다니며, 그 삶을 명징하게 복원해 낸다. 남쪽 바다, 푸른 나라로 떠난 영주가 그냥 잘 살 것이라는 믿음으로 위안을 주는 대신에, 그 곳에서 정착하지 못한 그 아이의 불확실한 미래를 끝내 상기시켜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아,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한데 하는 순간, 작가는 이게 현실의 다가 아니라고, 마지막까지 제대로 보라고 강요한다. 징그럽고, 지독하다. 수몰될 고향에서 마지막 보상금을 꿈꾸며 국화모종을 심었던 종만은 끝내 목숨을 버리고, 노래방 도우미로 전락한 조선족 명화는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죽임을 당한다. 건실하게 삶을 꾸려가던 경수는 끝내 병을 얻는다. 어설프게 희망을 꿈꾸는 것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생. 그 생을 엿보는 사진작가 "한"은 자신의 위선과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하며 절망한다. 그리고 그 절망은 작가 공선옥의 것이기도 하고, 이 책을 읽는 독자의 것이 되기도 한다.

반복되는 지독한 절망 속에서, 나는 가슴이 답답하다. 그들이 맺어가는 또다른 관계 속에서 작은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그들이 도착한 또 다른 땅에서 그들의 삶이 재건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건 그저 내 맘 편하라고 하는 위안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제 어찌할 것인가. 그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이며, 나는 또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가슴에 슬픔을 가득 안고, 정답을 찾지 못할 고민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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