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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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금 나는, 시골집 마루에 누워있다. 막 해가 질 무렵, 따뜻하고 나른한 봄날 오후였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하신다. 옛날 옛날에.... 우물에 빠져죽은 가난한 남매와,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외삼촌, 그 외삼촌을 따라죽은 마을의 부잣집 딸, 그들의 영혼이 우리집 마당을 하릴없이 배회한다. 아이들을 잡아가는 망태 할아버지와 이따금씩 멀리서만 우는 슬픈 고라니의 영혼...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에 빠져든다. 현실에서 있었던 이야기와 할머니가 지어낸 이야기들은 내 꿈속에서 하나가 된다. 외삼촌과 그의 연인은 고라니의 등을 타고 산을 넘어가고, 가난하고 불쌍한 어린 남매는 망태 할아버지의 망태속에 담겨 울부짖는다. 그 이야기들은 너무나 짜릿하고 애절해서, 나는 계속 잠만 자고 싶다.

#2

소설의 위기가 서사의 붕괴라는 진단은 이미 오래된 것이다. 상투적인 감상과 세심하지만 지루하기만한 묘사, 깊이가 없는 한숨에 갇힌 소설들을 읽으며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기대하는 건 당연하다. 살아서는 절대로 경험하지 못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나 상상속에서나 가능할 화려한 공상의 세계를 기대한다면 차리라 영화를 보는 게 낫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인간이라는 원초적 존재가 품고 있는 알지 못할 비밀을 기대한다면 시를 읽겠다.(정녕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언제부턴가 소설은 눈 돌리고 싶은 남루한 현실, 허벅지를 다 내어놓고 거리를 배회하는 미친 여자의 가련한 모습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모습이 나와 같아서, 차마 외면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3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두고 한국문단에 드디어 서사를 복원하는 새로운 작품이 나타났다는 칭찬이 자자하다. 또 한편에서는 그 서사의 깊이없음과 그 문장의 허랑함을 두고, 문학 본연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두 가지 평가는 모두 옳다.

그러나 그런 평가내림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어린 시절 마루 위에서 꾸었던 꿈과 같이 흥미롭고 즐거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꿈에서 깨기 싫어, 계속 잠만 자고 싶은 그 어질어질한 상태, 나는 <고래>를 읽으면서 부디 이 이야기가 더 없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무협소설과 구전동화와 만화와 이상한 영화와 같은 그 세계가 끝이 없이 이어져, 이 권태로운 삶을 자극해 주기를.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연출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 작가에게 한국문단의 미래를 짊어지라고 강요하지 말자.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상상하고, 그 상상의 세계가 미처 가다듬어지지 않는 문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이 작가에서 소설로서의 언어에 철저하라고 요구하지도 말자. 그저 한 순간, 잊고 살았던 그 꿈의 세계를, 이제는 들을 수 없는 그 옛날의 이야기를 다시 볼 수 있었음에 감사하자.

소설이, 문학이 무엇인지를 한번에 확인시켜주는, 이 세상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탐색하는, 그래서 영혼의 떨림을 느끼게 하는 소설을 간절히 읽고 싶었던 만큼이나, 나는 이렇게 허황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읽고 싶었던 것이다. 개망초가 흐드러진 그 아찔한 상상의 세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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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21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망초가 흐드러진 그 아찔한 상상의 세계를 저도 보고 싶네요.^^

2005-01-22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인장 2005-01-24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해가 바뀌었는데, 인사도 한번 못했지요? 잘 지내시죠? 시골집 옆으로 난 기차길에는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었더랬어요. 우린 계란꽃이라고 불렀는데.. 이상하게도 개망초, 이 이름이 참 어울리는 거 같아요.

귓속말 주신 님> 음... 님의 말은 칭찬으로 접수하겠습니다. 격려로 이해하겠습니다. 음, 그리고 지난 해에 했던 약속, 기억하시죠? 조만간 님을 한번 만나야 할 것 같아요... 도움을 청해야 할 일이 있어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