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읽고, 가네시로 카즈키의 모든 소설을 다 사 두고도, 다음 소설을 읽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다른 책이라고 별로 읽은 것도 없으니, 나는 아직 이 작가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다음 소설을 읽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80년대, 이름도 거창한 독후감, 글짓기 대회가 자주 있었다. 반공 독후감, 보건의 날 기념 글짓기, 한글날 기념 글짓기, 민족의식고취 독후감 등... 대회장에 가면 지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책들을 몇 권 펼쳐놓고, 그 중에 한 권을 골라읽고 독후감을 쓰라고 했다. 세상에 주어진 시간 동안 책을 읽고, 글까지 써야 하는 대회라니. 아무튼 그 때 나는 서울의 몇몇 학교들을 돌아다니며, 우장춘 박사의 전기를 읽었고, 미래 사회를 그린 상투적인 SF 소설을 읽었다. 책 속에서 우장춘 박사는 길가의 민들레는 밟히면서도 자란다,고 했던가. SF소설에서는 2000년도가 되면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바다 밑에 도시가 생겨난다고 했다.

말이 길어졌다. 그 때 읽었던 책 중 몇몇은 민단과 조총련, 현해탄 같은 단어를 품고 있었다. 그 책 속에서 하얀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그녀들을 만났다. 그들은 부모때문에, 혹은 폭력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쪽에 발을 딛고 있는 가련한 민족이거나, 왜곡된 민족주의로 똘똘 뭉쳐 생명도, 사랑도, 우정도 거부하는 폭력적인 인간들이었다. 계몽의 대상이거나,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그들. 나는 그들에 대한 혐오와 동정을 절절하게 표현해낸 글을 잘도 지어냈고, 이 글로 상을 타기도 했다.

물론 그의 소설을 읽기 한참 전에, 이미 그 때의 생각들을 버렸던 건 사실이다. 아니 조총련이니 민단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내 관심 밖이었다. 지금이라도 뭐 다를 것도 없지만...

<Go>는 한 아이의 성장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그의 절절한 연애 감정에만 집중하기에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재일"이라는 존재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난다. 민족이니, 국가니, 정체성이니 하는 관념적인 규정에 묶이고 싶지 않은 스기하라는, 그러나 너무도 절절하게 "재일"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서슴없이 주먹을 날리는 아버지를 이기고 싶다는 욕망에 똘똘 뭉친 어린 남자.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의 정서적 교류를 무엇보다 좋아해서 이것저것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아이. 친구와 함께 책을 읽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세상에 대해 이해해 가는 녀석.

스기하라는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한 한 고등학생이다. 그러나 스기하라가 제일의 쌈짱이 된 이유가 그가 민족학교에 다니고 있었기때문이고, 그렇게 영혼을 공유하던 그녀와 가슴 아픈 갈등을 겪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한국인의 피를 가졌기때문이다. 또한 가장 친했던 정일이의 죽음 역시 "재일"이라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지만, 그래서 더욱 처절하게 생을 옭아매는 것들.

그래서 스기하라는 먼 인류의 조상에 대해 생각한다. 뿌리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생각인지, 이 아이는 피를 흘리며, 가슴 아픈 이별을 하며, 아버지를 향해 주먹질을 하며 깨달아간다.

그러나 내가 본 스기하라의 세계는, 유년시절에 엿본 현해탄의 아픔과는 분명 다르다. 작가는 아주 쿨하게, 뿌리라는 상투적인 개념을 확장시킨다. 뿌리와 피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인간은 더욱 자유로울 수 있음을, 나는 어린 녀석의 관념 속에서 깨닫는다. 나를 규정하고 있는 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 이것들에 발목 잡혀 세상을 조소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지금의 내 나이가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나는 스기하라의 주먹질을 보면서 깨닫는다.

자기의 의식 안으로만 좁아지는 세상, 니편 내편 갈라놓고 싸움이나 하는 세상. 빌어먹을 이 세상 따위는 어쩌면 무시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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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8-11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네요.
뿌리도 쿨하게~~ 스기하라의 주먹질~~

선인장 2004-08-11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영화도 나왔는데, 아직 보지 못했어요. 스기하라 녀석에게 반해 있는데, 영화에서도 그만큼 멋있을지...

2004-08-12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인장 2004-08-12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귓속말 주신 님 > 모든 계절은 기다릴 때만 간절한 것 같습니다. 여름이 가면 또 여름이 기다려지겠지요. 이상하게도 올 여름은, 그리 더위를 타지 않습니다. 선인장이라는 닉네임에 적응해 가는 건지, 아니면 몸이 정상이 아닌 건지. 남들은 더워서 잠을 못 잔다고 하던데, 저는 혼자서 이불을 꺼내들고, 몸을 웅크리며 지냅니다. 그런 새벽이면 이상하게도 미워했던 사람들만 꿈에 나와, 꿈속에서도 엉엉, 울곤 합니다.
마음을 정리해야 할 터인데, 그게 좀처럼 쉽지가 않아서, 아직도 어서 나이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곳의 선인장이 잘 자라고 있다 하니, 그래도 다행입니다.

2004-08-16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