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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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장, 아니 인복은 떠났다. 모란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진생이 또다시 녹슨 아코디언을 내왔다. 모란의 흐느낌 사이사이로 진생의 구슬픈 아코디언 소리가 측백나무 숲 속에서 울렸다.
"우리 딸이 어려서 울 때 내가 이것을 연주해 주면 울음을 딱 끈치곤 했지."
모란이 어려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 진생이 모란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것뿐이었다. 아코디언 건반을 누르는 진생의 눈에 눈물이 어리고 있음을 정섭은 알았다. 정섭의 가슴도 찢어지고 있었다. 딸을 달래기 위해 손끝이 닳아져라 낡은 악기를 연주하는 늙은 아비가 정섭을 울렸다. 모란이 울고 정섭이 울었다. 늙은 진생이 울고 낡은 아코디언이 울었다. 나그네 설움, 울고 넘는 박달재,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 울었다.
아코디언 소리가 잦아질 무렵, 모란이 부스스 부은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진생이 연주를 딱 멈추고 묻는다.
"악아, 뭣 묵고 잡냐?"
모란의 몸짓이 말하는 음식이 무엇임을 금방 알아낸 진생이 활짝 웃는다.
"짜장면?"
진생이 웃고 모란이 웃는데 어쩌자고 정섭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칠 줄 모르는가. 이제 정섭의 눈물 감추기는 영영 글러버린 일이 된 것 같았다.  

- 공선옥, <영란>, 2010

 느닷없이 누군가와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두려워,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해도 이별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늘 이별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들 때문에 나는 조금 행복했다고,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부탁한다고, 비록 누추하지만 내 소중한 물건들을 이렇게 처리해 달라고, 당신들 때문에 나는 조금 더 행복했다고, 인사를 하고 사람들과 작별하고 싶었다. 그러나 죽어서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이든, 살아있지만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이든, 내 곁을 떠났던 사람들은 나에게 그런 인사를 남기지 못했다. 누군가와 헤어지기 위해 며칠을 고민하고 준비된 이별의 인사를 하고 그 이별을 번복하기 위해 애쓰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준비된 이별도 언제나 느닷없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다가온 이별 앞에서 나는 대체로 슬퍼할 줄 몰랐다. 그때 누군가 내 옆에서 늙은 아비 진생처럼 구슬픈 아코디언을 연주해 주었다면, 악아 뭣이 뭇고 잡냐 물어주었다면, 나는 너무나 딱딱해진 내 마음을 확인하며 허전해하는 오늘을 피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내게 그러하듯, 영란에게도, 이정섭에게도, 모란이나 장, 완규, 인자, 태숙, 영대, 숙영에게도, 하물며 어린 유나나 수한이에게도 이별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이별의 흔적은 감지하지 못해 이별의 순간을 영원처럼 겪어야 하는 영란이나 절망과 분노의 패악질로 이별을 독촉했던 숙영이나 다를 바 없었다. 혹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해도, 이별이란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영란은 넝쿨 장미가 곱게 피던 집 속에서 쓰레기처럼 쳐박혔고, 완규는 밤새 유달산을 달리며 허허로운 울음을 토해냈다. 누군가는 집을 나갔고,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짜 이별은 그 이후에 시작되었다.  

이별이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이유는, 사랑했던 누군가와 재회를 기대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했던 한 시절의 나와 단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별 이전의 나와 이별 이후의 내가 같은 사람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전과 같은 방식으로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전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러니 이별을 감당하는 방식은 죽거나, 새로이 태어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모처럼 돌아온 집에 치매 걸린 어머니를 남겨 두고 다시 떠나야했던 인자와 자신이 준 상처를 스스로 용납하지 못해 낯선 도시에 몸을 부려야 했던 이정섭, 학교도 그만 두고 유달산과 바닷가를 배회했던 수옥 모두에게 이별 이후의 시간들은 살아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은 차마 토해내지 못한 사람들의 울음을 받아주고, 바다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사연들을 품어주었다. 밤마다 산에 올라 죽은 듯 누워있는 정 선생의 고뇌를 유달산 한 자락이 숨겨주고, 정 선생은 이정섭의 눈물을 감춰주고, 이정섭은 형을 잃은 호영의 응석을 받아주고, 호영은 영대의 사연을 외면하지 않았다. 영대 엄마는 쌀이 떨어진 인자와 영란에게 기꺼이 바닷요리의 진수를 전수해주고, 영란은 아비도 없는 인자의 생명을 기꺼이 보듬어주었다. 그렇게 서로의 상처에 반응하고, 누군가의 반응으로 인해 눈물을 쏟으면서 길었던 이별의 시간이 지나갔다. 온전히 슬퍼하고, 온전히 이별하고, 조금씩 애쓰는 동안 죽음의 시간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한연희가 이정섭에게 보낸 메일은 그들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새로운 만남을 축복해 달라는, 이제는 당신과 이별할 수 있다는, 기차에서 만났던 그 연인들처럼 최선을 다해 이별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정성 어린 이별의 인사.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사랑하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자학해야만 뒤늦게 전할 수 있는 따뜻한 이별의 인사. 그들과 함께 했던 내 시간들이, 그들 없이 살아야 하는 앞으로의 내 시간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인사. 온전한 작별의 인사.  

그렇게 이별의 시간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뒤에 남아 항구 도시 목포를 떠올린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내 마음 속에도 슬픔이 차오르기를
그렇게 가득 차 오른 슬픔이 어느 날 당신 앞에서
눈물이 되어 터져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런 날이 오면 정 선생이 이정섭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내 어깨를 안아주기를.
그런 날이 오면 진생이 모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낡은 아코디언으로라도 나를 위로해 주기를.
그런 날이 오면 순임이 영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무엇도 묻지 않고 여기 있으라고 말해 주기를. 
 

내가 당신에게 그리 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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