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나치게 주관적인 글읽기는 내 독서의 가장 큰 단점이다. 너무 일찍 주인공에 반해버리거나, 그 소설이 내 잃어버린 시간의 한 부분을 건드리면, 나는 맹목적으로 그 소설이 좋아진다. 이정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어버린 순간, 그와 어린 연수가 몸을 섞을 때 나던 그 썩은 과일냄새에 매혹되어버린 순간, 객관적인 글읽기는 불가능해졌다. 그리하여 <검은꽃>은 내가 최초로 좋아한 김영하의 소설이 되어버렸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매혹적이다. 박수무당, 도망중인 신부(그가 내림굿을 받는 장면은 얼마 전 본 다큐 '영매'의 장면과 자꾸만 혼동되어 가슴을 쳤다), 떠돌이 고아, 사라져버린 나라의 퇴역군인, 가난한 황족, 내시. 각각의 인물들은 그 하나의 삶만으로도 충분히 소설적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열대의 에네켄 농장에서 만들어내는 삶은 그대로 한판 굿의 신명과 혁명의 뜨거움을 쏟아낸다.

일본의 식민의 야욕을 드러낼 무렵,힘 없는 지배세력이 나라를 팔고, 제 나라 국민을 노예로 내칠 무렵, 그리고 먼 곳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뜨거울 무렵을 살아냈던 사람들은 삶이 그것 자체로 하나의 굿이고 혁명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 인물들은 모두 내면에 뜨거운 불 한 덩이씩을 품고 있으며, 그들이 부딪힐 때마다 뜨거운 불꽃, 혹은 차가운 얼음덩이가 쏟아지곤 한다. 이렇게 <검은꽃> 언젠가 존재했으나, 사라져버린 삶, 역사속에서도 세계의 공간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그들의 삶을 꼼꼼하게 복원해내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들이 일포드 호에 승선한 순간부터 폐부를 찌르는 악취가 났다. 그 악취 속에는 뜨거운 사향 노루의 피냄새, 시큼한 사과 냄새가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이따금 열대의 농장 한 구석에서 음탕하게 몸을 섞는 어린 이정의 정액냄새가 났고, 고된 노동 끝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쿰쿰한 먼지 냄새가 나기도 했다. <검은 꽃>의 인물들은 그들의 질곡 많은 내력이 아닌, 특유한 냄새들로 그 존재감을 생상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냄새들이 검은꽃의 향기임을 책을 덮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래서 그 형체를 상상하기 어려운 검은꽃의 실체가 은밀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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