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김인숙 지음 / 문이당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만일, 기연이 죽지 않고 그녀와 승인이 행복하게 연결되었다면 나는 독자서평 같은 것을 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남의 꽃집 앞에서 기연이 승인을 때린 후 그들이 그간의 모든 오해를 풀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면, 혹은 처음에 등장한 지도판매소의 흔적 없던 여자의 모습이 마지막 장에서 그런 식으로 구체화되지 않았다면, 나는 오랫만에 읽은 김인숙의 소설을 읽어간 속도만큼 빠르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죽음이란 것이, 특히 예술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죽음이란 것이 대부분 상투적이지만, 그래서 새해가 될 무렵 맞게 되는 기연의 죽음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죽음 때문에 사소한 삶의 흔적들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사랑과 섹스도 특별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사랑과 섹스일 뿐이라는 작가의 진술은 그 상투적인 죽음을 통해 점차로 이해하게 된다.

김인숙의 장편소설 <우연>을 아주 쉽게 말하면,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결혼을 부정하는 남자와 사랑을 부정하는 여자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삶과 사랑을 확인해나가는 과정, 혹은 오래된 기다림과 옛사랑 때문에 사랑도 섹스도 가능하지 않았던 한 여자가 그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과정. 그러나 그들 삶의 구차한 부분과 그들 감정의 진폭은 이 소설을 이렇게 단순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기에는 후쿠오카라는 가슴 아픈 난교파티의 밤이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어긋나는 신호등이 있다.

기연에게 후쿠오카는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절망의 지옥이지만, 승인에게 후쿠오카는 기연이 사랑하는 다른 남자의 존재이다. 승인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기연의 시선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독자인 나는 후쿠오카의 정체를 알게 되지만 승인은 끝까지 그것을 확인하지 못한다. 승인이 그려준 설계도에 기연이 적어놓은 깨알같은 삶의 흔적들은, 그러나 기연의 죽음 이후에 승인에게 전해진다. 기연의 삶과 섹스에 대한 몰입은 독자들은 그녀의 기막힌 과거와 연결하여 모두 이해하지만 승인은 끝내 기연의 비밀을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밤 공원의 한 구석에 누워있던 알 수 없는 여자와의 만남을 기억해낼 뿐이다.(그 밤이 후쿠오카의 정체라는 것은 끝내 알지 못하면서)

나는 그들의 비극적인 사랑이 마음 아프기보다는, 나의 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인간 소통의 불확실함이 마음 아프다. 안간힘을 다해 이를 악물며 슬픔을 견디지만, 그 모습은 다른 존재에게 단순한 오기나 자존심으로 전해질 뿐이라는 사실이 마음 아프다. 그러면서, 내 삶에 존재하는 특별한 것들 대신에 아주 사소한 것들을 인정하게 된다.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이다. 섹스는 그저 섹스일 뿐이다. 거대한 의미 부여를 빼고, 내 관념의 맨살에 가 닿을 때 어쩌면 술만 먹으면 병처럼 도지는 내 허세가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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