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순신의 이야기라고 했다. 원래 장군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역사에 뚜렷하게 자신의 발길을 그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는 늘 같았다.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것을 알고도, 한 문장 한 문장, 가슴을 뛰게 만들던 김훈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도 나는 그래서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얼마 전 이름만 알고 지내다 처음으로 만나게 된 선배가 이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바람이 많이 불던, 비 오는 오후, 서초 도서관에서 아껴가면서 읽었다고 했다. 비바람 소리에 섞여, 징징징, 칼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속으로 김훈의 문장이라면 능히 그럴 것이라고, 조금 건방진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밤을 세워 두 권을 책을 읽었다. 이틀 동안 황사가 계속되는 날이었다. 징징징, 밤새 칼이 울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순신은 사실,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다.(이건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내 개인의 문제다.) 그의 감수성이나 세상을 이해하는 깊이가 특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내가 그렇게 느낀 건 순전히 이순신에 대해서,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지식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에 대한 특별한 편견이 없었기 때문에, <칼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순신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 개인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깊은 사색이나 그의 풍요로운 감성, 그 특별한 절망 등이 나에게는 참 멀리 느껴졌다. 애초에 내가 이순신과 가까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순신보다 잠깐 등장한 여진의 몸이 좋았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젓국 냄새가 무엇보다 좋았다. 오래 씻지 않은 여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젓국 냄새라고 표현한 김훈의 감수성이 너무 좋았다. 나는 이순신보다, 조선 군대의 칼 앞에서 쓰러진 무수한 일본의 병사들이 좋았다. 그들의 날선 칼이 좋았다. 그들의 젊음이 좋았다. 그리고 그 병사들의 죽음에까지 감정선을 대고 있는 주인공을 그려낸 김훈의 진지함이 좋았다.

나는 이순신보다, 무기력한 왕 순조의 울음이 좋았다. 독선적인 임금이 아니라서 좋았고, 현명한 임금이 아니라서 더욱 좋았다. 그리고 임금이 보낸 글에서, 그리고 그의 명령에서 임금의 울음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장군을 만들어낸 작가가 더욱 좋아졌다. 그리고 멀리 있는 남해 바다의 안개, 남해 바다의 어둠, 끊임 없이 반복되는 남해 바다의 밀물과 썰물,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물이 정말 좋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하나씩 좋아지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이순신은 거대한 동상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로 다가왔다. 아들 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고 소금 창고에 숨어들어 겨우 소리내어 울었던 애달픈 아비, 임금의 편지에서 마음 불편한 울음을 감지해내는 약한 나라의 백성, 아들의 몸에서 나던 젓냄새, 품었던 여자의 몸에서 나던 젓국 냄새를 끝까지 그리워한 한 남자. 이런 이순신이 문득 가깝게 느껴졌다. 자신의 죽음을 끝까지 알리지 말라고 했다던, 그 전장 속에 장수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그 사람을 느끼면서 한 문장, 한 문장, 가만히 속도를 줄여 읽은 때(김훈의 문장들은 정말로 책장이 넘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한다), 아파트 단지 너머 어디 멀리서 칼이 우는 것도 같았다. 황사 바람 속에서, 징징징, 칼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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