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진정한 마법성은 기억이지.' 노인은 말하고서 다시 먼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미로를 헤매다가 문을 찾을 것처럼, 도린의 마음이 환해졌다. 정임을 만난 뒤 그의 마음을 스친 생각들이 보얀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면서, 그는 신음처럼 뇌었다, '진정한 마법성은 기억이라.....'복거일의 소설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희미한 그림자로 남아 마음 한구석에 존재하는 옛사랑과의 재회를 통해 그는 한 인간의 삶과, 거대한 우주를 휘감는 윤회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고 마법성,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물론 이 소설에는 재미 있는 부분들이 많다. 도린의 딸 효민의 소설로 등장하는 마법성의 이야기, 그리고 쉰을 넘은 도린의 첫사랑, 그와 정임의 재회는 매우 소설적이다. 중년이 넘어선 나이, 나름대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사람이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마르지 않고 흐르는 첫사랑의 감정을 되새기는 장면은 도린이 그의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애절하다. 경험하지 않은 중년의 나이, 그 사이에 다시 만난 첫사랑은 전혀 과장되지 않아서 더욱 가슴 아프다. 전혀 끈적거림이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정사도 그들의 사랑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천오백억 년 뒤의 해후를 기다리며, 노량진의 낡은 여관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옛사랑의 흔적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다리를 오그리고 앉아 있는 정임의 모습은 그것 자체로도 큰 울림을 갖는다.

그러나 이 소설이 재미 있는 것은 이미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지 오래인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을 읽는 일이다. 소설 속에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출판사 사람들과 도린과의 대화는 정임과의 사랑 이야기와는 전혀 관계 없는 듯 하지만 그 방식을 정당화하는 요건이 된다.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그저 밤새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도린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인식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매춘과 아파트 재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인용되는가 하면, 젊은 사람들에 대한 관찰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젊은 아가씨들의 육체를 흘낏대는 도린의 모습은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

언젠가 이제 팔십이 넘은 외할머니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나이를 먹고 몸이 늙는 만큼, 마음이 같이 늙으면 좋을텐데, 마음은 예전 그대로인데 몸만 늙는다고. 그냥 흘려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찬 바람이 분다. 지금 같은 열정과, 지금과 같은 욕망을 그대로 품고 몸만 늙는다면, 그때 내 삶이 얼마나 추해질까.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도린의 욕망은 충분히 건강하다. 그의 욕망은 기억이고, 그 기억은 곧 마법성이다. 그 마법성은 물론 현실에서 불가능한 도린과 정임의 사랑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도린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간은 끊임 없이 기억할 만한 것을 만들고, 또 그 기억을 부인하려고 한다. 좋았던 기억이든, 그렇지 않았던 기억이든, 기억을 부인하는 것은 지금 돌이키면 부끄러울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정당한가? 다짐이 앞으로의 생에서 다시 만나게 될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라면 기억 역시 그러하다. 우주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면 내 과거는 다음 생에서 미래가 될 것이므로. 소설이 처음부터 긑까지 재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린의 모든 상념들에 너무도 쉽게 동의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내가 아직 살아보지 않은 나이를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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