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사진시대총서 9
로버트 카파 / 해뜸 / 1997년 9월
평점 :
품절


이따금 언어가 갖는 한계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좋은 영화의 한 장면 때문에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할 때, 소설 한 권 분량의 내용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만 같은 그림을 볼 때,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데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을 때, 나는 내 종교와도 같은 언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께 물려 받은 오래된 캐논 카메라를 만지작거린다.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아직 한 번도 밖으로 들고 나가 본 적이 없는 낡은 카메라...

이 책은 보도 사진 기자로서, 전쟁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카파가 2차 대전에서 경험한 일들을 직접 기록한 책이다. 그의 사진을 잔뜩 기대하고 주문했던 나로서는 흐린 사진 몇 장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책은 며칠동안 책상 한 구석에 쳐박혀 있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었는데  아무 할 일이 없었다'는 진술로 시작되는 그 책을 한번 손에 들고는 쉽게 놓지 못했다. 거기에는 전쟁의 한 복판, 그것도 최전방의 전선에서 총 대신 사진기를 들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뚜렷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가 그리고 있는 노르망디 해변의 상륙 작전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그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는 전쟁터에 가지 못해 안달하는 그의 마음을 보도 사진 작가로서, 그리고 한 예술가로서의 사진에 대한 열정이라고 아주 쉽게 짐작해버리지만, 사랑하는 여인 둘을 모두 전쟁과 사진 때문에 잃고 기어이 목숨까지 잃게 되는 그의 생애가 내게 쉽게 이해된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책을 읽고, 마음 속에는 스페인의 한 고향을 찾아갔던, 그 애달픈 노래의 주인공이 계속 남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고향과, 가족을 두고 논 덮힌 고향 마을을 도망쳐 나와야 했던 소수의 생존자들은 그 후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을까.

가끔 어떤 것에 목숨을 건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당혹감은 책을 덮는 순간, 더 크게 다가와 종일을 멍한 상태로 있어야했다. 지뢰가 터지는 순간, 카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죽음까지 렌즈 너머의 피사체로 바라보고 있을 그를 생각한다면, 전쟁을, 그리고 그 전쟁의 복판에서 찍은 그의 사진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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