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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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모든 소설가는 한 편의 잘 된 연애소설을 꿈꾼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연애소설 한 편을 통해서, 삶과 사랑과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소통과 욕망에 대해서, 나와 타인에 대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식물들의 사생활>이란 소설을 일주일 동안 읽었다. 보통 소설 한 편을 하루만에 읽어내는 나는 불성실한 독서 습관을 생각할 때, 꽤나 느리게, 오랫동안 읽은 작품이다. 이 소설이 특별히 어려웠던 것도 아니었고, 그 내용의 깊이에 침참해서 헤어나오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단지 연말이기에 조금 바빴고, 그 바쁜 와중에 소설을 읽는 과정이 더디었고, 그리고 간혹 앞 페이지를 다시 넘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간을 넘어가면서, 특별히 할 일이 없어졌는데도, 책을 읽는 속도는 빨라지지 않았다.

다리가 잘린 아들을 업고 창녀촌을 찾아다니는 어머니, 일평생 다른 남자를 사랑한 아내를 대신 식물들과 소통하는 아버지, 그리고 사랑을 잃고, 다리를 잃고, 사진을 잃고, 좌절된 욕망 때문에 몸부림치는 형, 그 형을 사랑한 화장기 없는 얼굴의 목소리가 고운 여자, 형의 여자를 사랑하는 화자... 절망적인 가족사는 소설의 전면에서, 혹은 배경에서 끊임없이 편안한 독서를 방해했다. 이야기를 한 장을 넘어갈수록 깊어졌고, 내용은 점점 확대되었다. 좌절된 형의 욕망은 어머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확대되었고, 그 배경에는 우리 나라 현대사의 아픈 현상이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사랑과 가족사가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것을 결코 아니다.(만일 이 내용들이 중심이었다면 이 소설은 얼마나 진부한 것이었을까.) 소설의 중심에는 한 밤에 태평양을 건너는 야자나무가 있고, 시간까지 떠받치고 있는 물푸레나무가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그 소나무에 몸을 감고 좌절된 사랑을 이루려하는 검고 매끄러운 때죽나무가 있다. 소설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나무들이 수런거렸고, 방 안에 있는 작은 화분에서 늙어버린 선인장이 숨을 쉬고 말을 걸어왔다. 책을 덮으면, 시간을 견디며 숲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물푸레 나무가 조용히 내 작은 방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러나 아직 나의 욕망은 완전히 좌절되지 않았기에, 나는 결코 그 나무들과 소통할 수 없었다. 그 소통 불가능의 답답한 상황이 책장을 넘기는 것을 어렵게 했다.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타락한 욕망이 언어를 타락시켰고, 그로 인해 인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쉽게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쩌면 인간이란 욕망하는 순간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끊임 없이 욕망하고, 그 욕망이 좌절되고, 그 좌절 속에서 다시 새로운 욕망을 꿈꾸면서 삶은 지속된다. 그래서 다리가 잘린 채 창녀촌을 찾아가는 형의 욕망은 오히려 그의 영혼이 아직 순수함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그의 정신이 나무가 되고 싶다고 꿈꾸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육신이 망가져 창녀촌을 헤매고 있으므로 그는 아직도 살아있다. 그 삶의 진정성 때문에 그 소설에서 나오는 비현실적인 모든 요소들은 현장성을 갖는다.

모든 나무들은 좌절된 사랑의 화신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정말로 나무들의 사생활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아마도 그 나무들을 통해 그려진 삶의 내용 때문일 것이다. 어떤 왕릉 곁에 있는 소나무와 때죽나무의 사랑을 언제 한 번 나도 보고 싶다. 그 모습을 통해 좌절된 사랑의 그 지난한 흔적을 볼 수 있을 때 어쩌면 나도 좋은 연애 소설 한 편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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