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서가 2003-11-11  

돌이킬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어요. 시간의 비가역성.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키기 위해 애쓰는 순간부터, 삶이 곤고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을 법한 선인장 님의 마지막 물음, 유사한 맥락인진 모르겠지만, 저도 비슷한 감정 때문에 조금 괴로웁고 그렇습니다. 제 경우, 사실 굉장히 유치한 감정인데, 또 유치해서 그만큼 절실한 감정이기도 해요.

독기 품은 적대감도, 반응 없는 무작정의 호감도, 그것들 모두가 결국 삶을 곤고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만약 그런 감정적 소요 없는 평정상태를 부잡게 된다면, 그러면 내 삶은 조금 건설적인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요.. 그땐 또 무기력이 삶을 좀먹을 것 같기도 하고...

정리하자, 란 생각으로 삼사일 전에 머리를 깍았어요, 사진처럼. 원래 가슴까지 오는 긴긴 머리였는데 말예요... 근데요, 머리를 깍으니까요, 제가 좀 착해졌단 생각이 들었어요. 예비군복 입으면 마초기운이 북돋아지고, 한복 입으면 걸음이 넉넉해지는 것, 이런 거 전형적인 미숙아의 정신상태겠지요? 머리가 길었다면, 어제 버스에서 만난 장애인을 그렇게 살갑게 돕진 않았겠다, 하는 생각이 지금 잠깐 들었고, 제가 조금 미워졌어요...

비는 그쳤고, 날은 여전히 흐립니다. 지지부진한 이야기 늘 귀담아 들어주는 누이 하나 둔 것 같아 늘 고맙답니다. 건강하세요, 선인장님.
 
 
선인장 2003-11-12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내일이면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치하기로 따지면 지금의 내 감정이야말로 유치의 절정이지요. 그걸 스스로 너무 잘 알기때문에 적대감보다는 자괴감이 내 자신을 더 괴롭힙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감정을 그대로 두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런 감정을 만들어낸 상황보다는 내 믿음과 내 고백과 그 동안의 나의 성실에 대한 배신감때문에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자괴감을 견디는 중이지요. 늘상 한 살 더 먹으면 어른이 될 것 같은데,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그런 막연한 기분으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걸어다니는가에 따라 사람의 성품이 달라지기도 하는가 봅니다. 예전부터 한 쪽 주머니에 손 넣고 건들거린다고 늘 핀잔을 듣곤 했는데, 그런 제스츄어가 내 소심함을 감추는 하나는 도구였어요. 머리를 오래 기른 적이 별로 없어서, 긴 머리를 자를 때의 심정을 잘은 알지 못하겠지만, 마음보다도 몸이 착해졌으니, 스스로를 너무 미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저야말로 님의 글을 읽으면서 항상 많은 생각을 합니다. 소통불가능 상태를 방치하고 있는 우리 막내와 대화를 한 번 해 볼까, 고민 중이지

선인장 2003-11-12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민 중이지요.
지금보다 몇 살 어릴 때 조금 더 고민하고, 조금 더 공부하고,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문득문득 후회가 되곤 해요. 아마 지금을 열심히 살고 있지 못한 까닭이겠지요. 올해가 지나면 백수선언 하려고 합니다. 나이 먹고도 철이 안 드는 딸을, 아직도 언젠가 무언가 하리라 믿어주시는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생기면 조금 더 많은 우울이 찾아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