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일상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나른한 햇살을 등에 지고 따뜻한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 속 혼자만의 공간에서 실눈을 깜빡이며 휴일 오전을 맞는 것만큼,
일주일 동안의 바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처럼 달콤한 휴식이 또 있을까?
평소와 같이 양치질에 세수를 할 필요도 없고 또 무엇을 입고 출근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휴일 아침. 그저 가는 시간만 붙잡고 싶은 심정.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이런 달콤한 휴식 시간에도 굳이 귀찮게 음악을 들어야 한다면, 바하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꺼내기를 권장한다.
이불 속에서 나오기가 귀찮고
화장실 가기가 귀찮고
양치질, 세수하기가 귀찮고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하는 귀찮음 속에서도,
글렌 굴드의 1981년도 녹음반 '골드베르크 변주곡'만큼은 꼭 들어줘야 하는 이유가 다음에 있다.
- 다 음 -
20세기 끝자락 어느 날,
밀레니엄을 맞이하기 위한 인류의 분주함 속에서도 나는 여지없이 지하철 1호선 한켠에서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를 듣고 있었다.
휴대용 CD플레이어 렌즈의 수명이 다 할때가지, CD 매체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만을 듣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는 총 3가지의 음악이 존재한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는 1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만 작곡했을뿐,
글렌 굴드는 1개의 변주곡을 3개의 곡으로 쪼개어 연주를 했다.
첫째, 왼손 골드베르크
둘째, 오른손 골드베르크
셋째, 입소리 (허밍?)
굴드만의 조심스러운 여성미(?)가 듬뿍 녹아든 마치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가냘픈 여성을 다루듯 1번 현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2번으로 넘어가는 강렬한 터칭에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박진감으로 똘똘 뭉친
바하의 남성미(?)를 이런 연주방식으로 시도한 적이 과연 20세기 이전에 있었을까?
계속해서 .... 3번, 4번, 5번 .......마지막 아리아까지....
굴드가 그려내는 3가지색 음악이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지 모를 정도로
듣는 이를 혼비백산 시키며 무아지경에 빠져들게 하는 음악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래서 애꿎은 CD 플레이이어만 repeat, repeat 을 거듭하게 된다.
이하 중략....
이때쯤이면 화장실에 가는 일, 양치질에 세수를 하는 일, 끼니를 챙겨 먹는 등의
생명유지용 일상들은 말끔히 잊혀지고 오로지 '글렌 굴드만의 바하'만 남게된다는 것.
이점 명심하시고 구매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참고로 말씀드리고 싶다.
2006.03 sunho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