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콜로지카 -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외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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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구제금융사태 직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민주노총이 대대적인 정리해고를 피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워크셰어링을 제안하였으나 당시 매스콤은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기업들로부터도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못했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노동의 인간화와 노동생활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한국노동운동사에 기록될만한 최초의 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디 워크셰어링은 임금수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어 갖자는 것으로, 고용을 늘이면서도 확보한 시간을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사용하자는 것이요 한걸음 더 나아가 문화사회를 위한 '노동거부'를 유도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삶의 질을 높여나가자는 것이 그 궁극적 목적이라 할 것이다.

 

세계적 경제위기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앙드레 고르의 에콜로지카 출간이 눈길을 끈다. 진작부터 강내희, 심광현 교수 등 문화과학 진영이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에로의 이행과정에서 자율적 삶을 위한 '노동거부'와 관련하여 고르를 주목하지 않았던 바 아니지만, 그의 주저를 다시 대하게 되어 반갑다.

 

앙드레 고르는 ‘노동’과 ‘임금노동’을 구별한다. 인류가 현재 겪는 것은 상품처럼 팔고 사는 근대적 임금노동의 종말일 따름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화폐로 지불되든 되지 않든 사회 활동으로서의 보편적 노동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하다. 노동력이 과잉 공급되는 노동시장에 대해선 노동시간 단축, 기본소득 보장, 문화사회로의 이행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그는 역설한다.

 

노동거부와 문화사회:21세기 좌파의 새로운 전망

naver.com/caujun?Redirect=Log&logNo=60003547494

노동사회 비판과 문화사회의 이론적 지도

http://blog.naver.com/caujun/60026998511http://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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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더욱 분발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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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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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데는 동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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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탈핵 - 대한민국 모든 시민들을 위한 탈핵 교과서, 2014 올해의 환경책 / 『한겨레』가 뽑은 '2013 올해의 책' / 『시사IN』선정 '2013 올해의 책'
김익중 지음 / 한티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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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이 아닌 탈핵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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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환 선생의 글 <히브리적 사유의 특성과 의미>를 읽다가 사이드가 극찬한 바 있는 키스 w. 휘틀럼의《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을 다시 만났다. 이젠 그동안 밀쳐 놓았던 홉스봄과 이성시 선생의 책들, 그리고 저 휘틀럼을 읽을 때가 된 듯하다. 가을이잖는가. 아래는 간단한 메모이다.

 

 

1.만들어진 전통, 에릭 홉스봄, 박지향 장문석 역, 휴머니스트, 2004

 

홉스봄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새로운 국경일, 의례, 영웅이나 상징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등 '전통의 창조'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문제는 그런 발명된 전통들이 역사와 동떨어져 있으며 정치적 의도에 의해 조작되고 통제된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특히 이 시기 유럽에서 전통의 창조가 '현재'의 필요를 위해 과거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예들을 추적하며,  만들어진 전통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자리잡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정치인들에 의해 국민국가의 권위와 특권을 부추기기 위해 사용되었음를 보여준다. 나아가 이 책은 집단적 기념행위가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이었으며,  신화와 의례가 사람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공식 기억'을 믿도록 하는 데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만들어진’ 전통의 유형은 대체로 3가지로 파악한다. 첫째는 공동체들의 사회통합이나 소속감을 구축하거나 상징화하는 것들이고 둘째는 제도, 지위, 권위 관계를 구축하거나 정당화하는 것들이며, 셋째는 그 주요 목표가 사회화나 신념, 가치체계, 행위 규범을 주입하는 데 있는 것들이다. 전통을 발명하는 과정에서 열등자들 사이에 복종심을 주입하는 방법보다는 엘리트들의 집단적 우월감을 고취하는 방법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즉 특정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서로 간에 동등하다고 느끼게끔 한 것이다. 이는 독일식의 군국주의적/관료주의적 형태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영국처럼 사립학교들의 탈군사화 된 ‘법 없이도 살 신사’의 모델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엘리트들을 전 부르주아적 지배 집단이나 권위에 동화시킴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2. 만들어진 고대, 이성시, 박경희 옮김, 삼인, 2001

 

고대의 역사란 근대 국민국가들이 만들어낸 투영물이며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고대사가 모두 만들어진 전통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 이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이제까지 중심- 주변에서 주변적 존재로 간주되었던 대상을 중심에 두는 동아시아 세계론으로 저자가 해체하려는 것이 국가라면 탈근대를 위해 넘어서야 할 것은 국가를 기초로 하는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일국 내의 중앙-지방 간의 은폐된 불평등 구조이기도 하기에 여기에 요구되는 것은 지방이라는 관점이다.

 

*함께 읽어야 할 글

이성시, <일본 역사학계의 동아시아세계론에 대한 재검토 - 한국학계와의 대화로부터 >, 역사학보 216, 2012

 

3.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키스 w. 휘틀럼, 김문호 역, 이산, 2003 

 

3.1 고대 이스라엘이란 유럽 문화의 '현재적 관심사'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주장. 곧 그리스 사유 및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의해 각인된 그리스도교의 영향에 의해서는 물론, 그에 따른 성경에 대한 편향된 관심이 결국 고대 이스라엘과 히브리적 사유를 발명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이러한 주장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과 함께 학문과 권력, 포스트모더니즘적 철학, 현대의 해체주의와 연관된 해석학적 관점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제공한다.

 

- 사이드(Edward W. Said)는 오리엔탈리즘의 발전에 있어서도 서양의 내러티브에 있어서도 문화와 제국주의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결국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이드의 말을 빌리자면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비서구적 관점에서 읽어내는 '대위법적 독해'(contrapuntal reading)이다. 위의 책, p18

 

-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은 인간이 이룩한 최고의 업적으로 이루어진 유럽문명이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가정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유럽은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하여 국민국가를 고대 안으로 역투사했으며, 동시에 시온주의 운동을 탄생시켰다. 시온주의 운동은 이질적인 오리엔트에 '문명화된'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문화와 문명의 연속성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과거에는 팔레스타인은 있었으나 팔레스타인인은 없었는데,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은 있으나 팔레스타인은 없다는 어처구니 없는 아이러니가 생겨났다. p 93

 

-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나 성서적 시간에 포섭되어서는 안되고 '세계사' 나 '세계시간'에 포섭되어서도 안된다. 팔레스타인은 자기의 고유한 역사의 핵심부분이며 모든 세계사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자기만의 리듬과 패턴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미세환경, 즉 우리가 팔레스타인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특성을 구성하는 다양성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p106

 

참고로 이 책의 부제는 '침묵당한 팔레스타인 역사'이다.

 

3.2 김진호는 이 책에 대한 논평에서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연구사를 다음과 같이 개관하고 있다.(첨부파일 참조)

 

최근의 연구사적 논의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학은 크게 네 단계의 전개 과정으로 설명된다.1920년대 이후의 알트(A. Alt) 학파와 1950년대 이후의 올브라이트(W.F. Albright) 학파는 이 분야의 고전적가설을 대표한다. 흔히 ‘이주가설’과 ‘정복가설’이라고 각각 불리는 이 주장들은, 서로 대립각을 높이 세웠지만, 팔레스타인 ‘외부’에서 들어온 종족적 집단이 사회적 조직에서나 문명 수준에서나 원주민을 압도하는 새로운 사회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공통된 관점을 견지한다. 차이가 있다면 서서히 이주해 들어온 것이냐 갑자기 대대적인 정복을 통해 들어온 것이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이나 신학생들이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지식은 바로 이러한 고전 가설의 기반한 일련의 논의들이다.

 

한편 1970년대 중반 이후 고전 가설에 대한 수정주의적 견해가 제시되었다. 흔히 ‘혁명가설’이라고 불리는 이 논의는, 노먼 갓월드(N.K. Gottwald)의 거의 천 쪽에 달하는 대작이 그 중심에 있다. 실은 그 훨씬 이전(1962년)에 올브라이트의 제자인 조지 멘덴홀(G.E. Mendenhall)이 발표한 논문에서 혁명가설이 최초로 제기되었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하다가 갓월드에 의해 연구사적 전환점으로 거론되면서 새삼 중요한 저술로 평가되었다. 이후 멘덴홀이 갓월드의 가설이 사회적 혁명을 강조하는 데 반해 자신은 문화적 혁명이라고, 양자의 차이를 부각시키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혁명가설’의 가장 주된 공통점이자 연구사적 공헌은 고대 이스라엘은 외부인이 아니라 바로 팔레스타인의 내부의 기층대중에서 유래했다는 관점을 확고하게 했다는 데 있다. 또한 이들의 연구가 중요한 것은 비교인류학과의 학제간 연구의 성과가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는 데 있다.


한국에서 갓월드의 기념비적 저작은 민중신학적 지향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읽혀지기 시작했고, 적어도 일각에서는 한때 열렬한 탐독의 대상이었으며, 그의 학문적 명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오늘날에는 적지 아니 회자되고 인용되는 주요 저작에 속한다. 하지만 방대한 학제간 연구의 소산으로 제기된 이 책의 풍부한 이론적 함의들은 거의 제대로 독해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더욱이 목회 현장에서는 이 책의 이론적 함의는 고사하고 문제의식의 일부라도 거의 참조되기조차 않는 상태에 있다.


마지막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연구들이 쏟아졌는데, 이 논의들은 ‘제2의 수정주의’적 연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고전가설들과 혁명가설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식론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 연구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내부에서 출현한 것이라는 합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갓월드를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혁명가설을 따르지 않는다. 이주가설이나 정복가설, 혁명가설이 공유하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잘 조직된’ 결속체는 왕국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 최근의 추세는 왕국 출현기인 기원전 10세기보다 훨씬 후대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사회문화적 결속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이데올로기적이고 사회적인 통합의 수준을 매우 낮게 평가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다른 팔레스타인 족속들과 이스라엘이 ‘잘 구별된’ 사회적 실체였다는 전제가 고대 이스라엘 역사학에서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도 최근 이들의 저작이나 논문이 조금씩 번역 출간되고 있어 약간의 인지도가 생기기도 했지만, 성서학자들조차 대부분 제2의 수정주의적 견해를 거의 알지 못한 형편이다.


이상에서 약술한 연구사적 궤적은 한국의 신학계에선 여전히 먼, 낯선 현상이다. 말한 것처럼 고전가설들이 대부분의 논의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성서 역사학에 대한 저급한 관심은 수정주의적 논의를 따라가기조차 어려운 여건을 조성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성서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수정주의적 견해들은 고전가설에 비해 성서를 훨씬 비판적으로 대면하고 있다.


교회나 교회의 신학은 통상 ‘성서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는 관점’을 공공연히 혹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근대 이후 성서학은 이러한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것처럼 행세해왔지만, 그러한 균형은 성서 역사학이 교회의 성서 이해의 경계를 월장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실행되는 균형이었을 뿐이다. 뒤에서 좀더 얘기하겠지만 휘틀램은 이 책을 통해서 교회주의적 전제가 얼마나 성서 이해의 암초가 되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이때 교회주의적 전제는, 휘틀럼이 보기에는, 교회와 서구 중심주의, 이스라엘 민족주의의 교묘한 절충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수정주의적 견해들이 성서를 더욱 ‘비판적’으로 보려한다는 것은 성서가 역사적 ‘사실 자체 혹은 기준점’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하나의 해석’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다른 이해’도 있었다는 당연한 인식을 연구에서 참조하겠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다른 이해’의 주체들에 관한 선입견 없는 조사 및 연구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적 연구에서 이와 같이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한 인식을 수정주의적 태도라고 할 만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성서 역사학이 돌파해야 하는 교회주의적 전제라는 벽이 그만큼 두텁다는 것을 의미한다.

 

휘틀럼은 이 최근의 제2의 수정주의적 견해를 대표하는 연구자의 하나다. 그런데 이 책의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저술은 고대 이스라엘사에 관한 ‘대안적’인 역사를 저술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기획된 것이다. 실은 고대 이스라엘사라기보다는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를 그는 쓰려 했다. ‘대안적’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문제설정을 함축한다. 그는 이 대안적인 역사 저술 작업에서 심각한 장벽을 경험했다.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연구사 자체가 동시대를 함께 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왜곡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휘틀럼이 평가하기에는 이러한 편견과 왜곡은 최근의 수정주의적 연구들도 그다지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 편견과 왜곡으로 점철된 연구사적 과오를 통렬하게 문제제기하는 이 책을 저술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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