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
고운기 지음 / 현암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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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매력적인 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저자의 관심은 유별나다. 이 책에서 보듯이 객원교수로 일본에 건너가서까지 삼국유사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어서 하는 소리다. 저자가 여말 선초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사의 간행과 유통의 현장을 찾아나서는 과정은 르포를 읽어나가듯 흥미롭다. 그래서 술술 읽힌다


현재 삼국유사 초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모두 몇 차례 인쇄됐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확인된 판본 중 가장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조선 초기이고 마지막은 조선 중종 7(1512)에 경주 부윤이던 이계복이 경상감사 안당의 도움을 받아 찍은 것이다. 그 이후로는 다시 간행된 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904년 일본 도쿄제국대학이 문과대학 사지(史誌)총서의 하나로 삼국유사를 현대식 활자로 찍어냈다. 한국에선 최남선이 1927'계명에 삼국유사를 실었다. 이는 도쿄제국대학이 간행한 것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묻혀 있던 삼국유사에 새로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일본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추적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비록 전쟁에선 패하지만 상당한 양의 우리 문화재를 약탈해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중 이계복이 1512년에 찍은 삼국유사가 포함됐고, 일본 에도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상납됐다. 도쿠가와는 상당한 애서가여서 장서각을 만들어 귀중한 책들을 보관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책들은 아들들에게 물려졌다. 역시 책을 소중하게 여긴 아들 요시나오(義直)가 삼국유사를 비롯한 중요한 책들을 물려받았다.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불러온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막을 내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쿠가와 가문의 장서는 잘 보존돼 이후 나고야 시립 호사문고(蓬左文庫)의 모태가 됐다. 그런데 19세기말~ 20세기초 일본에 근대역사학을 도입하려던 쓰보이 구메조(坪井九馬), 구사카 히로시(日下寬) 같은 학자들에게 삼국유사가 눈에 띄었고 활자본으로 간행된다.


물경 5만 점이 넘는다는 도쿠가와 가문의 그 많은 책 중 어떻게 삼국유사가 눈에 띄게 됐을까. 1624년 도쿠가와 가문이던 오와리 번(尾張藩)에서 천황에게 32종의 책을 빌려줬다 돌려받는다. 천황이 봤던 책이라면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당연히 책의 목록'禁中', 京都에 있던 천황의 처소에 빌려준 서적의 목록이 따로 만들어졌다. 이 목록에 삼국유사가 올라 있었다. 저자는 도쿄제국대학 국사학과 학생들이 읽을 원전을 찾던 학자들 눈에 이 목록이 대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삼국유사의 현대판 간행이 조선 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화 작업의 일환이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늘 간단하지 않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1894년 최초로 삼국유사를 인용하여 '단군고(檀君考)'를 발표한 것을 필두로, 저들의 동양사학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타자로서 아시아라는 존재를 상정하여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해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역사학을 비롯한 우리 인문학이 일제의 지배하에 성립되었다는 사실은, 결국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과제가 총체적인 역사적 의미의 담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사실들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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