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너머의 삶 - 베네딕트 앤더슨 자서전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손영미 옮김 / 연암서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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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 아닌 겨울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덕분에 베네딕트 앤더슨의 자서전 ≪경계 너머의 삶≫을 통독했다.

2. 1936년 중국 쿤밍에서 태어난 앤더슨은 아일랜드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베트남인 보모 손에서 자라나 아일랜드와 영국, 미국 등에서 공부하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태국 등 동남아시아를 돌아다니며 현장연구를 수행한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주제는 크게 두 가지다. 그가 학위논문을 준비하던 무렵 미국이 처한 상황과 거기에서 태동한 동남아시아 관련 ‘지역연구’,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주저 ≪상상의 공동체≫를 쓰게 되었던가 하는 것이다.

3. 1960년대 들어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우주선을 발사하자 큰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은 대학 교육의 후진성이 그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국 전쟁, 마오쩌둥 치하 중국의 성장, 인도차이나의 위기 심화, 동아시아의 전쟁, 중동의 불안정한 정세 등 다른 문제도 많았다. 그래서 1960년쯤부터 장학금, 언어 교육 프로그램 등의 형태로 엄청난 돈이 대학으로 유입된다.

이어 1960년대 중반 베트남전쟁이 격화되고 대학을 중심으로 반전운동이 전개되자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갑자기 미국 전역, 그리고 전국 주요 대학에서 동남아시아 관련 강좌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대학 측에서는 이에 호응해야만 했다.

4. 전후 미국에서 지역 연구가 부상했다는 것은 국제 사회에서 차지하게 된 새로운 위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미국 정부는 서유럽 이외 지역의 현대 정치 및 경제 연구에 막대한 돈과 자원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정책 분야, 특히 ‘국제 공산주의’의 위협과 관련된 연구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이처럼 연구 분야들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CIA, 국무성, 국방성이었다. 하지만 록펠러 재단이나 포드 재단 같은 사설 기관들도 정부의 역할 중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런 변화에 기여했다.

이들 대다수는 더 깊이 있고 역사에 토대를 둔 연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개방적인 대학에서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들은 또 그런 연구를 위해서는 장기적인 계획,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충분히 갖춘 도서관, 그리고 전쟁 전에는 거의 가르치지 않았던 여러 언어에 대한 능률적인 교수법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5. 앤더슨은 당시 서구인의 눈에 비친 ‘동남아시아’를 ‘남양’과 ‘남방’을 들어 설명한다. 南洋은 북경에서 바라본 중국 동남 해안 지역을 가리키기도 하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섬들과 말레이 반도를 뜻하기도 했다. 일본어 南方은 메이지 시대 들어 더 명확하고 정치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는데, 오늘날의 동남아시아는 물론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위임통치하게 된 서태평양의 넓은 지역을 가리켰다.

현대적인 의미로 동남아시아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서양 학자는 버마 전문가인 존 퍼니발(John Funival)이다. 이 말이 지금의 뜻으로 굳어진 것은 일본이 그랬듯이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는 전 지역을 지배하려는 미국의 야심 때문이었다. 유럽 열강은 이 지역을 자기들끼리 나눠 갖고 각자의 식민지를 관리하는 데 그쳤지만, 미국이 이렇게 나오면서 그 지역을 연구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6. 동남아시아의 1970년대는 아직 혁명의 시대였다. 반제국주의를 내건 유혈 전쟁이 끝난 후 사회주의 정부가 베트남과 라오스에 들어섰고, 캄보디아의 프놈펜에는 크메르루즈가 입성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국경없는 연대와 국제주의적 평화를 이루어 내지 못했다. 캄보디아와 베트남, 중국과 베트남이 서로를 침략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앤더슨은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이론 모두 적절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던 민족주의라는 현상을 탐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민족주의가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온 세계적 과정을 살펴본 앤더슨의 대표작 ≪상상의 공동체≫는 이렇게 탄생한다.

≪상상의 공동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온 민족주의에 대한 ‘이론서’들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동생 로리(페리 앤더슨)의 마르크스적 시각과 ≪뉴 레프트 리뷰≫를 접하면서 받은 커다란 영향이 있다. 그는 민족주의가 유럽에서 생겨나 비슷한 형태로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는 유럽중심적인 사고방식, 전통적인 마르크시즘과 자유주의, 그리고 민족주의를 진보주의, 마르크시즘, 사회주의, 보수주의 같은 수많은 개념들의 체계 또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강력한 전통을 표적으로 하고 있다고 토로한다. 앤더슨은 ‘민족’을 태고적부터 존재해온 유기적이고 초역사적인 실체가 아니라 서구에서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본다. ‘민족주의’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경제 및 소통 방식의 변화로 기독교 및 라틴어의 권위와 절대 왕권이 약화된 결과 생겨난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인쇄술인데, 활자화된 매체들을 통해 각 언어의 철자와 문법이 통일 고착되고, 구성원들에게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소속감과 동질감을 주면서, 그들을 다른 공동체로부터 구분해 주는 국경이 있고, 주권을 지닌 민족국가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앤더슨은 ‘민족’을 태고적부터 존재해온 유기적이고 초역사적인 실체가 아니라 서구에서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본다. ‘민족주의’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경제 및 소통 방식의 변화로 기독교 및 라틴어의 권위와 절대 왕권이 약화된 결과 생겨난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인쇄술인데, 활자화된 매체들을 통해 각 언어의 철자와 문법이 통일 고착되고, 구성원들에게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소속감과 동질감을 주면서, 그들을 다른 공동체로부터 구분해 주는 국경이 있고, 주권을 지닌 민족국가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기원은 식민 지배에 항거하는 반식민주의(anti-colonialism)에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반식민주의 민족주의, 즉 국가(state) 없는 민족(nation)에게서 민족주의의 봄날, 청준, 기원을 찾는 그의 관점은 민족주의가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전 세계적인 의미를 가지는 민족국가들’ 간의 갈등에서 비로소 시작되었고, 반식민주의 민족주의는 후대의 일탈 내지는 변종이라는 유럽중심주의적인 사고와는 전혀 다른 출발점에 서 있다. 또한 최초의 민족주의를 일궈낸 주역이 남 북 아메리카의 크리올, 즉 대서양을 건너와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식민자들의 후예라는 그의 주장은 배타적인 영토에 뿌리박은 배타적인 언어, 문화, 종족성을 민족주의의 전제로 삼는 낭만주의적 경향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민족을 이루는 것은 외부의 관찰자들이 판단하여 정하는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족 구성원들의 수평적이 동지애 위에 세워진 주권을 가진 정치공동체를 향한 ‘상상’이라는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다.


7. ≪경계 너머의 삶≫은 앤더슨이 이런 민족주의 개념을 토대로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천착한 과정을 보여주는 연구사로 읽혀진다. 딱딱한 논문보다 이런저런 고민과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문제를 제기하는 ‘연구노트’가 흥미롭듯이, 한 생애를 들어 연구과정의 속살을 다 드러내 보여주는 바이오그래피는 시사하는 바 많아, 늘 독서 욕구를 진작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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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된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에 대한 고찰

베네딕트 앤더슨 저, 서지원 역, 길, 2018

원제 | Imagined Communities

베네딕트 앤더슨, 서지원, 커뮤니케이션북스, 2018

학문의 제국주의 - 오리엔탈리즘과 중국사

폴 A. 코헨 저, 이남희 역, 순천향대학교출판부, 2013

원제 : Discovering History In China : American Historical Writing on the Recent Chinese Past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 - 근대 중국의 새로운 해석

프라센지트 두아라 저, 손승회, 문명기 역, 삼인. 2004

원제 : Rescuing History from the Nation: Questioning Narratives of Modern China

포스트모더니티의 역사들 – 유산과 프로젝트로서의 과거

아리프 딜릭 저, 황동연 역, 창비, 2005

원제 : Postmodernity‘s Histories: The Past as Legacy and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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