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속의 독백 나남신서 168
리영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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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은 강하다. 믿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자발적인 희생을 하며, 순교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그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많은 이들이 혈기왕성할 때에는 믿음을 위해 맹목적으로 돌진한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서 이를 저버리는 경우는 많다. 대부분 자조적인 목소리로 스스로의 변절을 합리화시킨다. "한 때의 젊은 치기였을 뿐이야. 이제 나는 내 행동에 책임을 질 때야." 그리고 변절자들은 반증주의자 포퍼의 유명한 말을 덧붙인다.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바보지만, 늙어서까지 마르크스주의자인 건 더 바보라지 않았어?" 전체주의에 대한 포퍼의 경고가 비겁한 변명을 위해 인용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 사회에는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

리영희 교수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믿음을 굳건하게 지켰고, 여전히 지키고 있는 살아 있는 양심이다. 그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 끝없이 싸워 왔고, 수많은 이들에게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리영희의 최고의 무기는 '글'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물리적·정신적 폭력에 맞서, 그는 서슬 파란 글로 대항했다. 리영희 교수의 글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한반도를 유린한 독재 정권을 거침없이 희롱했다. 희롱의 결과는 당연히 참담했다. 리영희 교수는 여러 번의 구속과 해직을 당했으며, 그의 저서는 금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당시 젊은이들에 대한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대의 많은 이들은 <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을 읽고 큰 깨우침을 받았으며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동굴속의 독백>은 수많은 이들을 일깨워준 '리영희 저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동굴 속의 독백>은 고희를 맞은 노교수의 기념 문집이다. 기념 문집답게 지난 30여 년 간 저술했던 <전환시대의 논리> <스핑크스의 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의 기념비적인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동굴속의 독백>은 한 마디로 리영희 교수의 알짜배기만 모였다고 할 수 있다. 자유인과 지성에 대한 단호한 정의, 이름과 종교에 대한 스스로의 신념과 베트남 전쟁의 부당함. 6.25라는 시대적 상황의 비극과 교회와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 등 모든 것이 이 안에 있다. 70년대에서부터 90년대까지,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글에 매료된 것은 당연하다. 리영희 교수의 글은 직설적이고 솔직하며 명쾌하다. 암울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 저자의 외침은 사자의 포효와 같다. 리영희 교수 앞에서는 입에 올릴 수 없었던 많은 민감한 사항들이 그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고 만다. 저자는 이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편지, 소설 등의 다양한 기법을 사용했다. 덕분에 딱딱하게 느껴질 법한 주제와 사상은 비교적 쉽고 빠르게 전달된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과 못난 부분 등을 주저 없이 펼쳐 보인다. 거만한 리영희, 경솔한 리영희, 고집 센 리영희 등 모두가 자신의 부분임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런 솔직함은 그의 어린 시절과 군 생활의 에피소드와 결합해 저자의 인간적인 매력을 드러낸다. <동굴속의 독백>의 미덕은 리영희 교수의 후회 속에 있다. 자신 때문에 고통 받았던 가족과 주변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그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글을 통해 리영희 교수를 한층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넘어서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저자에게 깊은 존경심을 불러 일으킨다.

노교수는 머리말에서 자신의 일갈을 한 시대에 동굴 속에서 외치던 독백이라고 비유한다. 하지만 그의 독백은 메아리가 되어 우리 사회에 울려 퍼졌다. 이 메아리는 앞으로도 우리 사회를 계속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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