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 없이 바빴던 12월 12일의 저녁. 밀린 일을 하려고 사무실에 남은 나는, 1시간만 독서를 하면 머리가 맑아질 거라는 근거없는 계산으로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찾아 들었다...만....

애초에 1시간만 읽자고 하면서 어떻게 이 책을 집었단 말인가. 정신없이 읽다보니 시각은 현재에 이르러 -_-; 나는 3시간째 책을 읽고 있고, 야근은 물 건너갔다.

아직 다 읽진 못했으니, 이 훌륭한 저널리스트의 입담이 마지막 장까지 지치지 않을 것인지는 다음 기회에 확인해드리도록 하겠다. 이미 <나를 부르는 숲>으로 알라딘 편집팀 거의 전원의 무차별적 애정공세를 받은 적 있는 빌 브라이슨이다. <나를 부르는 숲>을 읽고 비밀결사에 가입하는 기분으로 조용히 빌 브라이슨을 좋아하기로 했다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은 지금 나는 한국 빌 브라이슨 팬클럽 창단을 선포한다. 선착순 1,000명 한정. 가입비 없음. 회원으로 의심되는 사람과 마주치면 "거의 모든 것을 아십니까"라고 암호를 댈 것.

작년 한 해 애정을 흠뻑 받았던 <엘러건트 유니버스>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좋은 책이다.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서술이 깔끔하게 전개되는 꼼꼼한 책이라 전문가 사이에서도 좋은 개론서로 인정받을 만한 격조가 있었다.

반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복잡한 부분을 슬쩍 뛰어넘되 그것이 논리의 엉성함을 자초하지 않을 정도라, 전체적으로 빈틈 적은(없는, 이라고 말하기엔 내가 다 모르니까), 그러나 쾌활함이 넘치는 책이 되었다. 엄청나게 공을 들인 것이 분명한 - 그래서 너무 고마운 - 기발한 비유들과 과학자의 사생활이라는 양념을 가한 과학사 서술은 누군가에게는 서비스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갱이다. 그건 읽는 사람 마음.

이런 책들을 만날 때마다 '과학을 계속 할 걸 그랬나' 조금 후회도 해 본다. 주제넘은 생각이지.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같은 재미난 책을 읽는 이라면 전공에 무관하게 그 누구라도 과학에 매료될 것이고, 진지한 과학자가 되었어도 삶이 즐거웠으리라는 착각 아닌 착각을 하는 법일 테니까.

* 참고: 본문만 500쪽에 육박하는 이 책에는 삽화나 사진이나 표 따위가 하/나/도 없다. 진짜다. 하/나/도 없다. 까치글방 출판사 특유의 가독성은 높되 지극히 평범한 본문 편집에, 그림자료 하나도 없이 글자만 빽빽한 560쪽의 책을 상상하시면 된다. 그러나 그 빡빡한 책이 기똥차게 재미있다는 것도 진짜다.

아, 물론 과학책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재미 같은 것을 찾는 것이 아닌 분에게 말이다. 이름 외우기 어려워도 조금만 참고 읽으면 감동을 얻을 수 있는 러시아 작가들의 소설처럼, 나열되는 과학적 서술들에 한 줌의 인내만 베풀어주시면 우주와 지구와 생명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일별하실 수 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arla 2003-12-15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분과 얘기를 나누다가, 이 책의 홍보문구에 <시간의 역사>가 언급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시간의 역사>는 이 책에 비하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정말로 일반인을 위한 책이다. <시간의 역사>나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사실 일반인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최소한 고등학교 과학시간에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있거나 과학 언저리를 전공한 사람들이라야 편하게 몰입할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정말 쉬운 책이다. 뒤로 갈수록 짜임이 흐트러진 곳도 보이긴 하는데 (<대부> 이야기에서도 적었던 것과 같은 '너무 많은 취재의 오류'가 간혹 있다) 어쨌든 침대에 누워서 자기 전에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읽는 기분은 너무나 신비롭다.

배바위 2003-12-24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팬클럽 가입 지원합니다. 내일모레 라디오방송국에 나가서 올해의 책 한 권을 추천해야 하는데 이 책을 추천하렵니다.

starla 2003-12-27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조선일보 선정 2003년 올해의 책에 꼽혔네요. 음 의외이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뭐 좋네요 하하하 ^^

Smila 2004-01-02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다놓고 아직 읽지 않았는데, 이 책이 <이브의 일곱딸들>에 비판적이라면서요? (명남님이 리스트에 적어놓으신 코멘트는 보았거든요.) <이브의 일곱딸들>은 제가 너무 좋아했던 책이라,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집니다...

starla 2004-01-03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스밀라님. 뒷부분 생명에 관한 이야기에서 유전자에 대해 얘기할 때 거론이 됩니다. 어여 보세요~ ^^ <이브의 일곱 딸들>은 제 생각에도 조금은 '신화적'으로 내지는 '감동받을 마음가짐'으로 읽게 되는 책인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저는 쓴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형태의 책을 썼을까 참 궁금했었죠. 아무튼 재미있는 책인데, 조오금 어려웠어요. ^^

그러고보면, 어떤 책이 어떤 출판사를 만나느냐도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브의 일곱 딸들>은 따님에서 나왔죠? (아마;;; 대략 기억 정확치 않습니다만) 만약 사이언스북스에서 나왔다면 어땠을까 갑자기 상상해보게 되네요. 책의 내용 자체가 달라질 리야 없겠지만, 홍보의 포커스가 확 달라졌겠죠, 아마... 따님은 당연하게도 유전학 연구에서의 여성주의적 경향 (사실 특정 유전형질의 - 설령 그것이 유전학의 역사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중요한 것이고, 지질학으로 따지자면 방사성동위원소 기법과 맞먹을 혁신을 가져오는 것이라 하더라도 - 모계유전이라는 팩트에서 모종의 여성주의적 함의를 끌어내려는 것 자체가 노골적으로 주장될 경우 '오버'일 위험이 있습니다만) 을 은근히 강조하며 프로모션했는데요, 사이언스북스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군요. 흐흐...

저는 <이브의 일곱딸들> 중에서 동아시아 인에 대한 유전적 분석 얘기가 한 문단인가 -_-;;; 나왔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헉, 아닐지도 -_- 대략 이 대목에서도 기억이 가물가물 ㅠ.ㅠ) 스밀라님의 글을 본 김에 집에 가서 오늘 다시 읽으렵니다 ^^ 스밀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Smila 2004-01-04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아시아 인에 대한 유전적 분석 얘기 나왔던거 맞아요^^ 따님에서 그런 쪽을 강조하며 홍보했었다면 어쩐지 오버같군요.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제 입장에서는) 전혀 그런 식으로 생각 안했었으니까요. 전 그저 남자이건 여자이건 '먼 조상'의 존재란 걸 그렇게 실감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전까진 조상이란 걸 정말 우습게 알았는데... 나의 조상 누군가가 그 험한 시절을 살아내고 씨를 뿌렸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이었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책두께 땜에 엄두를 안내고 있었는데,(저 두꺼운 책 무지 싫어해요^^;;) 어여 읽어봐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