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 마리오 푸조 지음, 이은정 옮김, 늘봄 펴냄.

친구 결혼식 참석 목적으로 부산에 내려오다. 저녁 6시 55분 기차를 예매하고는 "걸어서 십분인데 뭘"이란 마음가짐으로 회사에서 뭉개다가 결국 6시 40분에야 헐레벌떡 역으로 출발. 가까스로 50분에 도착했으나, 아뿔싸, 고속철 공사 때문에 승강장이 신역사로 옮겨졌다. 신역사에서 헤매느라 5분 소요. 어찌나 다행인지 열차가 5분 출발지연한 덕에 겨우 탑승했다.

저녁을 못 먹어 배고프고... 다섯 시간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출발 1초 후부터 지루하고... 잠을 청하자니 특수 상황으로 (요즘 좀 그래) 머리가 어지러워 희귀한 불면증세가;;; 오랜만에 책이나 읽으라는 건가 하며 p모씨의 서가에서 강탈해 온 <대부>를 펼치다.

<대부>를 읽다. 1장을 다 읽다. 몇 장이나 있나 세어본다. 9장까지 있다. 재미있군. 장을 나눈 것은 작가의 의도이므로 좀 자제를 하고 쉬다가 읽어보자. 책을 덮고 지나가는 홍익회 이동매점을 쳐다보다가... 앞자리에 앉은 시끄러운 네 아가씨들을 흘겨보다가... 아... 쓸데없는 저항이었다. 30초도 못 되어 2장을 펼치다.

2장을 읽다. 여기 어디냐. 대전이냐.. 3장을 읽다. 4장을 읽다. 동대구네... 5장을 읽다. 6장을 읽기 시작하다. 앗 벌써 삼랑진이라니. 낭패다.

최근 들어 난독증의 증후를 표출할 기미를 보이고 있는 나다. 그런 나의 '책 안 읽고 인터넷 서점 편집팀 근무하기' 신공 - 거의 주화입마 수준이라고 본다 - 은 어디 가고 책 덮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끙끙대며 책장을 잡고 있는 내가 있다!

특히 가수 조니와 니노의 에피소드가 나는 좋다. 조니는 꽤나 그럴싸한 캐릭터인데... 이 캐릭터에 실제 모델이 있을까?

좋다가도 좋지 않은 것은 시칠리아섬에서 마이클과 아폴로니아의 에피소드다. 마피아로 변신 이후의 일그러진 마이클에 대해서도 떨떠름하게 읽었다. 특히나 우리의 돌아온 케이에 대해서 푸조는 더 애정을 쏟아주어야 했다. 애초에 여성 캐릭터의 현실성에 대해 바라는 게 무리인가.

아차, 라스베이거스 호텔에서 소니의 정부 루시와 의사 줄스의 사랑 에피소드는 좋았다. 역시 작가는 취재를 해야 한다. 취재를 너무 많이 해서 "아 취재한 게 아까워" 이 지경이 되면 시칠리아 섬에 대한 묘사 대목처럼 펜 끝에 '가오'가 묻어나는듯 한데, 라스베이거스의 의사 줄스는 아슬아슬하게 그 수준을 모면한 정도로만 그려져서 좋다.

집에 도착해버려서 7장부터는 아직이다. 영화를 보았으니 대강 끝은 안다. 어차피 뭐 결말이 궁금한 것은 아니니까. 갑자기 이탈리아식 이름들에 마구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 (이탈리아 근처에도 가본 적 없고 기껏해야 두 주에 한번 정도 스파게티 먹는 게 이탈리아와 나의 관련의 전부인 주제에 무슨 문화적 친근감이 있다고 오버... -_-)

아무튼 대단한 소설이다. 역시 인생은 소설보다 대단하고, 그래서 소설은 취재를 하면서 써야 하는 건가 보다. 결론이 뜬금없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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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신참내기라니, 무슨 뜻이야? 나도 형만큼 아버지 말씀 열심히 들었어. 형은 내가 그 정도 머리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헤이건이 모두를 위해 술잔에 술을 따랐다. 다소 울적해 보였다. 정치가가 전쟁터로 가야하듯 변호사는 법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좋아, 어쨌든 이제 우리 한탕 하는 거야." pp. 2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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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건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몸이 떨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악마에게 간청하듯 두 팔로 무릎을 감싸고 앉아 머리를 푹 숙였다.

헤이건은 자신이 전시의 콘실리에리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다섯 패밀리가 표면적으로 겁을 내는 모습에 완전히 속은 것이다. pp. 417

헤이건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그럴 수가 없는) 캐릭터이지만, 그래도 가장 감정이입하기 좋고 매료되기 좋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특히 그 소니의 죽음 이후 대부를 대신하여 장의사에게 전화를 하는 씬에서의 대사, 원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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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탈리아인이라기보다는 잡지에 나오는 요트를 즐기는 백만장자처럼 보였다. 트라몬티 패밀리는 도박 사업으로 재산을 모았는데, 회의에서 한번 본 바로는 그가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얼마나 잔인한 방법을 썼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pp. 436

'잔인한'은 <대부> 키워드의 하나인데, 흥미롭게도 소설의 초반부에서는 그다지 인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소설이 펼쳐져가면, 그러나, 이 흔한 단어의 진정한 피비린내를 맡아낼 수 있게 된다. 대부가 언제나 어느 정도의 가장을 중시여겼던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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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열렬히 박수를 치며 돈 코를리오네와 돈 타탈리아의 새로운 우정을 축하해 주고, 자기들도 서로 악수를 교환했다. 이것은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따뜻한 우정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때 서로 카드 한 장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 서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그 정도도 우정이며, 그것만 있으면 족했다. pp. 457

내 세계에서는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우정은 족하다! -_- 내가 지금 구사하고 있는 '지방결혼식 참석'은 우정 10점 만점 중 10점인 최고난이도 스킬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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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코를레오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란 차가울 때 가장 맛있는 음식과 같다. 나도 화해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pp.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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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테시오는 모든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체념했다. 그는 온 몸에 힘이 쭉 빠졌지만 간신히 몸을 추스려 헤이건에게 물었다. "마이클에게 사업상 그렇게 되었다고 전해주시오. 그를 좋아한다는 것도."

헤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도 알고 있습니다."

테시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간청했다. "톰, 날 좀 살려주시오. 옛정을 생각해서."

헤이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테시오는 경호원들에게 잡혀 기다리고 있던 차에 태워졌다. 헤이건은 마음이 아팠다. 테시오는 코를레오네 패밀리에서도 가장 유능한 카포레짐이었다. 돈 코를레오네는 루카 브라시를 빼고 그를 가장 신임했다. 그렇게 영리한 사람이 인생의 말년에 이처럼 치명적인 오판을 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pp. 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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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리릿 2003-11-29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에 가셨군요. 저는 대문에 '부산 사투리 필'라고 하길래 무슨 소린가 했습니다. 아... 정말이지 편집장님의 사투리는 짱이에요. ^^ 예전에 야근할 때 편집장님이 친구분이랑 전화통화할 때 전 너무 황홀했어요. (그때가 언제더라... 한 2년전쯤인가..) 그때.. 제가 많이 서울촌놈처럼 살 땐데.. 제 속으로.. '야.. 서울 아가씨들도 사투리 잘 하네..'했답니다. 아..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부산 사투리~ 다시 한번만 더 들려주세요~

zooey 2003-11-29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니의 모델은 아마 ''프랭크 시내트라''였을 걸에요. 그렇게 기억함. 으음, 대부는 영화도 굉장하지만 소설로도 퍽 흡족하게 읽을 수 있는(무엇보다도 두께가!) 책이지요. 헤이건 캐릭터도 무지 맘에 듬. ^^
(아아, 나도 난독증을 잃어버릴 정도로 몰두할 만한 책을 만나고 싶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