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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 양심을 밝히는 길 ㅣ 살림지식총서 453
윤홍식 지음 / 살림 / 2013년 4월
평점 :
이야기를 하다 어려운 말을 쓴다 싶으면 문자 쓴다며 놀리며 공자왈 맹자왈 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평소 그런 식으로 좀 학식 있는 말을 한다 싶으면 공자와 맹자를 떠올릴 정도로, 공자, 맹자하면 지성인으로 인식을 함과 동시에 그들이 쓴 논어나 맹자 등의 고서들은 어려운 책으로만 여길 따름이었다. 하지만 가끔씩 아주 가끔씩 궁금하기는 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어떤 책이길래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지 말이다. 하지만 서른이 넘도록 공자든 맹자든 그들과 관련 된 책은 전혀 읽지 않았다. 책 읽을 시간도 많지 않은데 어려운 책으로 인식되어 있는 책이다 보니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얇은 두께감에 한결 마음을 놓고 논어에 관한 책을 먼저 읽어보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나에게는 어려웠다. 분명 글자로 되어 있기는 한데 분명 눈으로 읽고 읽기는 한데, 머릿속으로 내용이 잘 들어오지를 않았다. 작은 사이즈의 적은 분량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까지 다 읽은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고서에 관해 풀어 놓은 책이나 보니, 아무리 쉽게 풀어 쓰려고 해도 쉽게 풀어 쓰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인간, 양심, 도덕성, 물질문명, 정신문명, 이익, 세계 등 다소 심도 있는 단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추구, 근간, 창출, 매몰 등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다 보니, 한 줄을 읽고 이해하는데도 집중을 많이 해야 했다. 확실히 쉬운 책은 아니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나의 부족한 학식과 이해력이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다시 『논어』를 읽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양심의 계발에 대해 동서양의 어떤 고전보다도 자세한 가르침이 담겨있는 경전이 바로 『논어』다.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문답을 문인들이 기록한 것으로 평생 양심의 계발을 추구한 공자의 가르침이 잘 담겨 있는 책이다. 우리는 여기서 양심계발의 비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향후 인간이 나아가야 할 ‘인간의 길’이 선명해질 것이며, 물질문명이 가져온 온갖 병통을 말끔히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 p7 중에서 -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자공아,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아닙니까?” “아니다. 나는 오직 ‘하나’로 꿰뚫었을 뿐이다.” -『논어』「위령공」
자공은 공자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함이 없는 것을 보고 그를 박학다식한 사람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평생 자신의 ‘양심의 계발’에만 심혈을 기울인 공자는 다른 답을 내놓는다. 그건 바로 “나는 오직 하나, 즉 양심을 계발하려고 했을 뿐이다.”라는 말이었다. 책을 볼 때나 일처리를 할 때, 남과 인간관계를 맺을 때 늘 양심에 비추어 보고, 그 옳고 그름을 자명하게 판단한 뒤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양심을 계발하는 첩경이다. 그러면 수많은 지식이 자연히 하나로 꿰어지게 되고, 언제 어디서나 나와 남 모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수 있게 된다.
-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 p26 중에서 -
책을 읽다 중간중간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책을 덮고 싶기도 했지만, 어렵게 읽기 시작한 책인데 이왕 읽은 거 끝까지 읽어보자 싶었다. 부끄럽게도 책<논어>가 공자에 대한 책이라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다른 어렵고 깊은 내용은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대체 공자의 뜻이 무엇일까를 가장 염두 해두고 책을 읽었다. 공자의 뜻은 다양한 말로 표현될 수 있지만, 이 책의 표지에 적힌 제목대로, 공자의 뜻은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 그대로였다. 하지만 책 표지에 그토록 분명히 공자의 뜻을 적어 놓았음에도 책을 읽으며 공자의 뜻을 헤아리려 하다 보니, 이 말도 저 말 같고, 저 말도 이 말 같고 도통 무슨 말인지 몰라 조금 읽다 다시 처음부터 읽기도 몇 차례였는지 모르겠다. 잘은 몰라도 계속 읽다 보면 머릿속에 남는 단어는 양심이었다.
평소 양심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나마 조금 깊이 생각했던 때는 학창시절 도덕시간이었다. 생활 속에서 양심을 떠올릴 때는 길가다 쓰레기 버릴 곳을 못 찾을 때, 급하게 가야하는데 횡단보도 앞 신호등이 빨간불일 때 정도가 다였다. 그런데 공자는 이 양심을 지키는 것이 군자가 되는 길이라 말하며, 사람들이 양심이 인도하는 대로만 따르면 세상이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양심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했고, 공자 자신도 평생 양심을 계발하고 알리기 위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그를 따랐고 말이다. 공자는 정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남들은 평생 살아도 모를 삶의 본질을 찾고, 그걸 설파하고 지키며 삶을 살아 갈 수 있었을까.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전해 내려오며 자신의 이름과 저서와 뜻을 알리며 말이다.
자공은 자금에게 공자에게 수많은 정치인들이 찾아오는 것은 그에게 성인이 지니는 다섯 가지 덕목이 있기 때문이라 답한다. 그것은 바로 ①온화함 ②선량함 ③공손한 ④단속함 ⑤겸손함이다. ‘온화함’이란 나와 남을 두루 사랑하고 포용하는 관대한 마음이니 ‘사랑’을 갖춘 마음이며, ‘선량함’이란 선을 좋아하고 악을 피하는 ‘지혜’를 갖춘 마음이다. ‘공손함’과 ‘겸손함’이란 자신을 낮추어 남을 배려하고 전체적인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마음이니 ‘예절’을 갖춘 마음이며, ‘단속함’이란 자신의 욕망을 단속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절제하는 것이니 ‘정의’를 갖춘 마음이다. 그리고 다섯 가지 덕목이 늘 한결 같은 것은 ‘성실’을 갖춘 마음이다. 양심의 다섯 가지 덕목 중 ‘성실’은 생략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앞의 네 가지 덕목을 늘 한결같이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성실’이기 때문이다.
-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 p35 중에서 -
우리의 마음에는 누구나 이 선천적인 프로그램이 깔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해 하며(사랑), 잘못된 것을 보면 공분하고(정의), 남과 조화를 이루려 하고(예절), 옳고 그름을 분명히 변별하는 것이다(지혜). 그리고 이 네 가지 양심의 발동은 언제나 한결같은 것이다(성실). 우리 조상들은 이 양심의 덕목, 즉 ‘인간의 본성’을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에 새겨놓았다. 서울의 ‘4문’과 중앙의 ‘보신각’이 그것이다.
①동쪽으로는 봄처럼 훈훈한 ‘사랑’을 흥기시키라고 ‘흥인지문’이라 이름 지었고, ②서쪽으로는 가을처럼 추상같은 ‘정의’를 돈독하게 하라고 ‘돈의문’이라 이름 지었다. ③남쪽으로는 여름처럼 화려한 ‘예절’을 숭상하라고 ‘숭례문’이라 이름 지었고, ④북쪽으로는 겨울처럼 은밀한 ‘지혜’를 넓히라고 ‘홍지문’이라 이름 지었다. ⑤그리고 중앙에는 ‘성실’을 상징하도록 ‘보신각’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우리의 양심을 그대로 문과 종각에 새겨놓은 것이다. 이것들을 보면서 늘 우리 마음의 양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 p41 중에서 -
논어에서는 양심을 가장 온전하게 밝힌 존재를 ‘성인’이라 한다. ‘성’이란 하느님의 명령, 즉 ‘양심의 소리’를 남보다 잘 듣고 남에게 잘 설명해주는 탁월한 존재를 의미한다. 공자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다만 진리를 배움에 싫증내지 않고, 진리를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이야말로 성인을 지향한 그의 일생을 축약한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 자신은 절대로 성인을 자처하지 않았다. 늘 자신의 양심을 온전히 밝히려 노력하고, 남에게 양심의 길을 제시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성인의 삶을 살 뿐 스스로를 성인으로 자처하지 않는 경지야말로 진정한 성인의 경지일 것이다. 공자는 ‘인격의 완성자’인 이러한 성인이 되기 위해 양심을 닦아가는 존재를 ‘군자’라고 불렀다. 군자는 ‘君(임금 군)’자를 쓴 것에서 알 수 있듯 ‘Leader'라는 의미다. 그러나 보통 리더가 아니라 ’양심적 리더‘다. 먼저 양심을 밝혀 자신을 닦고,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도와주는 리더가 바로 군자다.
-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 p48 중에서 -
‘정의’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이 받기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가하지 말라.’는 양심의 지상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것일 뿐이다.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정의다. 남을 나처럼 사랑하는데 어떻게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줄 수 있겠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진실로 사랑에 뜻을 둔다면 악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논어』「이인」
-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 p70 중에서 -
우리는 인간관계를 잘 경영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흔히 윗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내가 아랫사람에게 당해 싫은 것’을 윗사람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내가 윗사람에게 당해 싫은 것’을 아랫사람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면 충분하다. 늘 이렇게 살아가자. 그러면 인간관계의 달인이 될 것이다. 점차 더 익숙해지면 장차 군자와 성인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 p77 중에서 -
공자는 자신의 양심이 인도하는 대로 자신이 자명하게 아는 선에서 자명한 것과 찜찜한 것을 남김없이 설명해주기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상대방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코칭’이다.
-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 p90 중에서 -
공자가 말한 양심을 밝히는 것의 중요성이 눈에 가장 잘 들어왔을 때는 정치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그제야 그가 말한 양심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과 크게 동떨어진 학문에만 나오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삶과 직결된 일이라는 것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양심이란 것을 그동안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이라는 관점에만 주로 적용하며, 아이들에게는 지키도록 가르치지만 어른들은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지키는 것이란 여겨왔구나 싶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길을 건널 때 횡단보도로 건너고 신호등이 빨간불일 때는 기다렸다가 초록불일 때 건너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도덕이고 양심적인 행동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어른들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과는 다르게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비양심적인 행동이라 여기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는 이러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급하니까 어쩔 수 없고 어차피 차도 없으니까 라고 합리화 시키며 말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답을 알려주는 가르침이 아니라, 깨달음을 주는 가르침이었다. 공자는 모든 것을 각자 자신의 양심에 묻고 양심을 따르라고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부모의 3년 상을 1년 상으로 하면 안 되냐고 묻는 제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고, 제자에게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지를 묻고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 라고 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제자가 간 후에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제자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다거나 설득하려 한다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다 보니 공자가 한 행동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 수 있었기에 그의 행동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아이가 옳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 아이에게 내 생각을 가르치려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가 옳지 않은 행동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지켜만 보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내가 자식에게 받고 싶은 것’을 부모님께 드리고, ‘내가 자식에게 바라지 않는 것’을 부모님께 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참된 예절’이다. 이것이 살아계실 때 예절에 맞게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다. 부모님계서 돌아가실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을 부모님께 드리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부모님께 가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예절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님께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예절만을 갖추는 것은 진정한 효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 p95 중에서 -
애공이 “어떻게 해야 백성이 복종하겠습니까?”라고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시길 “곧은 것(군자)을 들어다 굽은 것(소인) 위에 놓으면 백성들이 복종할 것이며, 굽은 것을 들어다 곧은 것 위에다 놓으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 『논어』「위정」
소인이 천하를 다스릴 때 백성이 복종하지 않는 것은 지도자가 백성의 이익은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기 때문이다. 오직 군자라야 백성이 이익을 자신의 이익처럼 챙겨줄 것이니 천하가 그에게 진심으로 복종할 것이다. 이런 당연한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이 사회에 진정한 군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공자가 제시한 대로 ‘양심의 회복’을 이루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땅에도 세종대왕과 같은 양심적 리더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 <논어 양심을 밝히는 길> p101 중에서 -
이 책의 마지막에 언급되고 있는 양심적 리더라는 말을 보자마자 정말 그런 사람을 볼 수 있길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너무 꿈이 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종대왕과 같은 양심적 리더가 정치계에 등장한다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이미 어딘가에는 존재하지만 아직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환한 빛을 발하는 세상이야 말로 살기 좋은 세상일 텐데 말이다. 양심적 리더가 아직 등장을 못한 건지, 그런 사람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세상이 아직 안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니까.
- 연필과 지우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