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살림지식총서 51
유기환 지음 / 살림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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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알베르 카뮈. 책의 첫 부분에 나온 그의 소설과도 같았던 급작스러웠던 죽음을 보며, 내가 떠올렸던 그의 모습은 유명한 소설가였지만 평범하고 가정적인 아빠이자 남편의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가족과의 여행 후 가족들은 기차로 귀경시키고 나서 친구와 따로 자동차로 귀경하다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베르 카뮈는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가정적인 남자는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에 있어서는 얽매이기 보다는 자유롭길 바랐던 다분히 바람둥이 같았던 남자였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자, 나중에는 그에게서 받았던 첫인상마저 달라지게 되었다. 아마 그가 정말 가정적인 남자였더라면 가족과 함께 한 여행에서 아무리 친구의 부탁이었다 하더라도 친구와 함께 하기 위해 가족과 따로 귀경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카뮈의 전 인생이 그랬듯 그의 학창 시절도 두 극단 사이에 던져져 있었다. 학교에서는 노동의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었고, 집에서는 정신의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었다. 그가 지식을 쌓으면 쌓을수록 그와 가족들 사이에는 침묵의 골이 깊어 갔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는 아들을 어머니는 마치 딴 세상 사람을 바라보듯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학교는 도피처였다. 그곳은 온 가족이 오직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집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 <알베르 카뮈> p10 중에서  

카뮈는 육체적으로는 알제리의 지중해인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리스의 지중해인이었다. 아무튼 지중해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년 카뮈의 관심사는 이처럼 태양, 바다, 죽음, 축구, 독서, 사랑, 역사, 연극 등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경험한 다양한 열정, 즉 작가, 연극인, 신문기자로서의 열정은 이후 성년 카뮈의 인생을 장식할 것이다.

- <알베르 카뮈> p16 중에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서구의 젊은이들에게 이 대결이야말로 일상생황 아니었을까? 전쟁은 수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지만, 그 어느 질문에도 정답을 주지 않는다. 우리의 영광이 그들의 굴욕이 되고, 우리의 미덕이 그들의 악덕이 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더러운가? 무엇이 승리이고 무엇이 패배인가? 누가 압제자이고 누가 해방자인가? 인간은 누구이며,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방인>은 부조리의 우화답게 이야기가 온통 애매성에 물들어 있다. <이방인>에서 통상의 기준으로 서열화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 <알베르 카뮈> p30 중에서 -

브라이언 피치는 카뮈의 세계에 있어 바다와 어머니의 상동관계와 동시에 태양과 아버지의 상동관계를 확인한다.

태양은 아버지의 온갖 속성을 갖고 있다. 태양은 바다와 대지와 결혼한다. 태양은 진리의 이미지이다. 태양은 짓부수며 파괴한다.

이런 상동관계는 정신분석학자에게는 즉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상기시킨다. 어머니(바다)에 대한 사랑, 아버지(태양)의 억압, 아들(뫼르소)의 반항 등이 고스란히 <이방인>의 주요 테마를 이루고 있다. <이방인>은 어떤 면에서 뫼르소의 의식과 태양의 대결 이야기이다. 견딜 수 없는 태양 때문에 뫼르소의 의식이 무화되었을 때, 달리 말해 무의식이 그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방아쇠가 논다. 그의 총구는 아랍인을 향해 있지만, 그의 무의식은 태양을 향해 있다. 그가 죽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태양인 것이다. 뫼스로가 총성으로써 떨쳐버린 것은 아랍인이 아니라 땀과 태양이며, 깨뜨린 것은 한낮의 균형’, 즉 태양와 바다의 행복한 결혼이다.

- <알베르 카뮈> p35 중에서 -

 

 

그의 사랑관을 알고 나자 당연히 그에게 가졌던 호감도 역시 낮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처했던 상황을 알게 되자 조금 측은지심이 생기기는 했다. 그의 대표작인 책<이방인>처럼 그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이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스페인 어머니를 둔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살았던 그. 이 책에서 카뮈는 평생 스스로를 프랑스인인 동시에 알제인이라고 생각해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고 환영받지 못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외면을 받았다. 이 책에서는 카뮈가 파리 지식인 사회에서 가혹한 왕따를 당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캐나다에서 만났던 이민1.5세대의 청년을 떠올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예의에서 벗어난 무례한 질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그걸 잘 몰랐던 나는 한인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청년이 우리나라 사람들은...”이라는 말을 할 때 이런 질문을 했었다. “너는 니가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냐고 말이다. 한국인 부모를 두었지만 캐나다 국적을 갖고 캐나다에서 대학을 다녔던 그 청년은 애써 그 질문의 답을 피했었다. 나는 그저 궁금해서 물었던 질문이었지만, 그 청년은 그 질문 때문에 혼란스러웠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이민자들이 많아 여러 민족이 어우러져 사는 캐나다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민족별로 나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걸 보며 이민자들은 자신이 캐나다의 국적을 갖고는 있지만, 자신의 뿌리는 각자 자신의 민족에서 찾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 카뮈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프랑스에서 카뮈를 봤을 때 카뮈의 육체는 온전한 프랑스인이 아니라 알제리에서 온 아랍인으로 보였고, 알제리에서 카뮈를 봤을 때 카뮈의 정신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이 아니라 서구사상을 가진 프랑스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카뮈는 이 두 가지 다 모두 자신이라 여겼지만, 사람들은 카뮈에게서 자신과의 같은 점을 찾기 보다는 다른 점만 찾으며 그를 밀어내기 바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듯 모든 곳에서 카뮈를 배신자로 낙인찍으며 외면해버렸다. 그런 그였기에 그가 책<이방인>을 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방인으로 있는 많은 이들이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연출가로서 카는 배우의 내면에서 등장인물을 찾아내고자 애썼다. 그는 유심히 들었고, 유심히 보았고, 대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환언하면 그는 배우에게서 등장인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카뮈에 의하면 등장인물은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의 여백에 산다. 배우의 창의성이 발휘되어야 하는 공간은 바로 이 텍스트의 여백이다. 아무튼 그 시절 카뮈는 동료들이 보기에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청년이었다.

- <알베르 카뮈> p53 중에서  

예술과 사랑은 정녕 분리될 수 없는 것일까? 흔히 우스갯소리로 위대한 예술의 뒤에는 위대한 연인이 있고, 위대한 철학의 뒤에는 위대한 악처가 있다고 말한다. 서른 살의 나이에 이미 프랑스의 대표 소설가가 된 카뮈, 구성원 간의 각별한 유대를 요구하는 연극계의 미남 극작가, 배우, 연출가로서의 카뮈..... 여자들은 카뮈를 좋아하고 사랑했다. 많은 여자들 가운데 카뮈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여자는 시몬에, 프랑신 포르, 마리아 카사레스였다.

- <알베르 카뮈> p57 중에서  

이념과 생활의 일치란 그토록 힘든 것일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사랑의 신 에로스를 천방지축 어린 아이로 설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싶다. 일평생 이성과 계산으로 모은 재물은 단 한순간의 사랑을 위해 내던지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상 모든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다.

- <알베르 카뮈> p61 중에서 -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카뮈, 아롤.... 그런데 왜 이런 순서인가? 사르트르는 자신이 메를로퐁티의 오른쪽, 카뮈의 왼쪽에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레몽 아롱이 우파 이론가들의 수장임은 그 당시 누구나 인정하던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이 순서는 곧 그들의 이념적 좌표였다.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는 네 대가의 이념은 곧 시대의 이념이었고, 그들의 우정은 곧 시대의 우정이었다. 그들의 입장의 비교는 카뮈의 주변성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줄 것이다. 네 대가의 사상적 위치를 다시 한번 정리해 준 사건은 바로 한국전쟁(1950~1952)이었다. 한국전쟁이 프랑스 지식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그것이 미국과 소련,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리전 양상을 띤 최초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 <알베르 카뮈> p78 중에서 -

 

 

이제 어느 덧 서른을 훌쩍 넘기고 서른 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는 여전히 다른 이들의 작품을 읽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나보다 훨씬 어린 서른이라는 나이에 프랑스의 대표 작가가 되었던 카뮈. 모르긴 몰라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카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이방인이 된 카뮈이지만 어찌 보면 이방인이기에 어느 한 곳에만 생각을 머무르게 하지 않고 더 다양하고 폭 넓은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소수일 것만 같은 그의 책<이방인>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인정받는 것은 우리 사회에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 그의 책<이방인>을 먼저 만났더라면 나는 그의 책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방인으로 살았던 카뮈의 삶에 대해 알게 되자, 그가 쓴 책 <이방인>이 많이 궁금해졌고 읽고 싶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되었다.

 

 

1942<이방인>의 발표와 함께 파리 문단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 동시대 논쟁의 한 축을 이룬 카뮈는 고등사범학교는커녕 식민지알제 대학 출신이었다. 카뮈가 파리 지식인 사회에서 가혹한 왕따를 당한 것은 이런 출신 배경과 전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이념적 노선으로 보면 아무래도 아롱이 더 소외당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카뮈, 아롱의 우정과 논쟁은 학연이 결코 신념보다 앞서지 않음을 실감나게 입증했다. 학연, 지연, 혈연이 함께 뒤엉켜 신념의 발목을 잡는 한국 지식인 사회가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 <알베르 카뮈> p81 중에서  

1956년 카뮈는 알제에서 [민간인 휴전을 위한 호소]를 발표하고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로 구하고자 간청했다. 그리고 그는 식민주의적 통합에도 새로운 민족국가의 건설에도 반대했다. 그의 결론은 차이의 공존, 즉 연방제였다. 알다시피 현실은 카뮈의 모호한 주장을 비웃는 방향으로 치달았다. 카뮈는 양쪽 모두에게서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알제리의 프랑스인과 아랍인 모두에게서, 프랑스의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서 말이다.

불의가 횡행하는 알제리..... 하지만 어머니가 살고 있는 알제리..... 카뮈는 할 말이 침묵보다 낫지 않다면 말하지 말라는 아랍 속담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사상과 감정의 짓찢기는 드라마 속에서 그는 결국 입을 닫았다. 진정 내밀한 기쁨을 느끼던 고향 땅, 그 바다, 그 태양에서 자기 존재의 뿌리가 뽑혀 나가고 진짜 이방인이 되는 것을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긴 침묵은 긴 비난을 몰고 왔고, 카뮈는 더욱 외톨이가 되었다. 알제리 전쟁 때 취한 카뮈의 선택은 한편 그 역시 피에 누아르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다른 한편 그가 여전히 균형과 절제의 그리스적 전통에 충실한 고전주의자였음을 잘 보여준다.

- <알베르 카뮈> p84 중에서  

스톡홀름에서 행한 수상 연설에서 카뮈는 작가로서 자신의 직업을 정당화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했다. 진실과 자유를 위한 봉사. 진실은 신비스럽고 붙잡기 힘든 것이지만, 작가는 언제나 그것을 포착하려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는 위험하고 실현하기 힘든 것이지만, 작가는 언제나 그것을 구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카뮈는 자신의 예술관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하나의 작품이란 처음으로 가슴을 열었던 단순하고 위대한 두세 가지 이미지를 되찾기 위한 기나긴 도정에 다름 아니다. 스웨덴 연설 막바자에 돌아온 하나의 이미지는 바로 태양와 바다와 죽음이 깃든 티파사의 이미지였다. 카뮈에게 진정 행복했던 시절은 사회적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던 1950년대 말이 아니라 빛과 가난 속에서 산 그 어린 시절이었던 것이다.

- <알베르 카뮈> p86중에서 -

 

- 연필과 지우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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