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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만 볼 수 있다면 -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 ㅣ 두레아이들 인물 읽기 5
헬렌 켈러 지음, 신여명 옮김 / 두레 / 2013년 11월
평점 :
어릴 때 나 역시 헬렌 켈러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여인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었다. 그녀의 장애만 알았을 뿐 그녀가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말이다. 헌데 이 책을 읽으며 헬렌 켈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크게 두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나는 헬렌 켈러가 직접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주제로 쓴 글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을 통해 본 헬렌 켈러의 생애였다. 이 두 이야기는 절묘한 만남과도 같았다.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날마다 치열하게 살겠다는 다짐은 꽤 훌륭한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을 때때로 해 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산다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하게 깨닫게 될 테니까요. 우리는 날마다 온화한 마음으로, 활기차게, 그리고 뜨겁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수많은 날들이, 달들이, 그리고 숱한 해가 펼쳐져 있다고 여긴 나머지 감사하는 마음을 곧잘 잊어버립니다.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 p9 중에서 -
몸도 마음도 몹시 힘든 상태에서 나는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을 보며 난 오랫동안 잊고 있던 헬렌이라는 사람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헬렌,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갖고 있는 여러 장애들이 떠올라 마음이 경건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어떠한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절대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모든 장애들을 극복했는데, 나는 그녀가 갖고 있던 장애를 단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난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힘들어 하는 것일까. 나는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며, 말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때때로 나의 마음은 이 모든 것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소리칩니다. 단순히 만져 보는 것만으로도 이처럼 즐거운데,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는데도 뜻밖에도 아주 조금밖에 보지 못합니다.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색깔과 온갖 움직임이 빚어내는 파노라마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면서, 갖지 못하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이 빛의 세계에서 우리가 받은 ‘볼 수 있다는 선물’을 삶을 더욱 충만하게 해 주는 수단이 아니라 그저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도구로만 사용합니다.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 p15 중에서 -
나 역시 그녀가 말하는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나는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갖지 못하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단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절실한 소망을, 너무나 쉽게 매일매일 이루며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녀가 말하듯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지만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바로 눈 뜬 장님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볼 수 없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도 보지 못하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근데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니.
다음 날 아침이 오고, 나는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한다는 기대에 들떠 새벽을 맞이할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진짜로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매일 새벽은 끊임없이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 p37 중에서 -
장애가 없는 사람이더라도, 살다보면 장애를 가진 사람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면 그때서야 우리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한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장애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 불편함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정말 어렵다. 그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우리 생활 속에서 우리 몸이 얼마나 많이 쓰이는지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몸의 불편함을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정말 많이 경험할 수 있었다. 처음 아이를 가졌을 때 내 몸이 내 몸 갖지가 않았다. 나중에는 집 안에서조차 내 마음대로 걸어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택배 아저씨가 문을 두드려도 현관문까지 빨리 나갈 수가 없어 택배 아저씨는 집에 사람이 없는 줄 알고 택배물을 경비실에 맡기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택배가 온 걸 알면서도 바로 아래층에 있는 경비실에조차 혼자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작은 한 걸음을 떼는 것이 고통일 때였다. 몸이 그러니 필요한 것이 있어도 집 앞에 있는 슈퍼에 조차 혼자는 나갈 수조차 없었다.
나는 아이를 가진 잠깐 동안 겪은 몸의 불편함이지만, 정말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은 어떨까 싶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작은 행동 하나를 위해서도 장애가 없는 사람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했고, 간단한 일에도 훨씬 더 많은 힘을 들여야 했다. 방문객이 찾아왔을 때 현관문을 열어주는 아주아주 간단한 일조차도 말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은 그 간단한 일에 1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그것도 몸을 움직임으로서 오는 고통까지 감내하며 말이다.
아이들을 연년생으로 낳은 뒤, 나에게 있어 쌍둥이 유모차는 곧 내 발이었다. 그런데 유모차로 다니는 세상은 생각보다 많이 불편했다. 멀쩡하게 걸어 다닐 때는 전혀 몰랐던 것들이 하나하나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불과 10cm밖에 안 되는 턱도 아이를 둘이나 태운 유모차로 올라가기에는 힘이 들었다. 혼자 다닐 때는 운동 삼아 걸었던 작은 언덕도 아이 둘에 각종 아이 용품을 실은 유모차로 넘기에는 너무나 힘겨웠다. 아무리 급해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은 절대 갈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 밀고 지나가면 되는 상가나 건물의 유리문도 유모차와 함께 지나가기 위해선 매번 유모차를 돌려 등으로 유리문을 밀며 지나가야 했다.
내가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느낀 것은 휠체어를 탄 이들의 고충이었다. 아이들이 있는 나에게 유모차가 두 다리나 마찬가지이듯이 휠체어를 탄 이들에게도 휠체어는 곧 그들의 다리일 것이다. 그런데 유모차나 휠체어가 다니기에는 불편하다 못해 어렵고 힘든 곳이 많았고, 아예 불가능한 곳도 상당히 많았다. 그래도 나야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유모차를 안 가지고 다닐 수 있지만, 휠체어를 타는 이들을 그럴 수 없으니 평생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정말 몰랐을 것이다. 장애를 가진 이들이 얼마나 불편한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장애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하지만 나는 아이를 낳고 몸이 예전 상태로 돌아오고, 유모차가 어느덧 익숙해지고 다니던 길로만 다니면서 잊게 되었다. 그렇게 몸의 불편함이 지나간 뒤 찾아온 것은 더욱더 깊어진 마음의 답답함이었다.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대한 답답함.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답답함은 헬렌이 갖고 있던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살아 있는 그림은 날마다 수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보고 지내는 삶의 일부지만, 이런 풍경에 두 번이라도 눈길을 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쉽지만 거의 없을 거예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놀라운 광경을 못 보는 장님입니다.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죠.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 p38 중에서 -
나의 두 눈은 행복한 모습을 볼 때나 불행한 모습을 볼 때나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해 더 많이 알아보고 이해하기 위해서지요. 내 마음은 사람들과 여러 사물의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내 눈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습니다. 눈길이 머문 모든 것들을 세심하게 눈 안에 담으려고 애씁니다. 어떤 광경을 보면 유쾌하고 즐거워 행복해지지만, 또 어떤 것들은 가여워서 내 마음을 애처롭게 합니다. 나는 불행하고 비참한 모습에도 눈을 감지 않습니다. 그것 또한 삶의 일부니까요. 비참하고 슬플 모습에 눈을 감는 것은 마음과 정신의 문을 닫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 p41 중에서 -
나는 볼 수 없는 사람이기에 볼 수 있는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귀띔을 해 줄 수 있습니다. 볼 수 있다는 축복을 충분히 활용하게 해 주는 한 가지 충고랄까요. 즉 내일 당장 장님이 될 것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해 보세요. 그리고 다른 감각들을 사용하는 데도 똑같이 그렇게 해 보세요. 내일 귀머거리가 될 것처럼 음악 소리와 새의 노랫소리,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선율에 귀를 기울이세요. 내일 당신의 촉각이 모두 마비될 것이라 생각하고 모든 물건들을 만져 보세요. 내일부터 다시는 냄새도 맡지 못하고 맛도 못 볼 것처럼 꽃의 향기를 맡고, 한 입 한 입 음식을 맛보세요. 그렇게 모든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세요. 자연이 여러 접촉 수단을 통해 당신에게 가져다주는 이 세계의 모든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영광을 돌리세요. 그렇지만 확신하건대, 모든 감각들 가운데 볼 수 있다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 p43 중에서 -
헬렌은 그 어떤 감각들 중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만큼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없다고 했다.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었던 헬렌은 볼 수도 없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아이들을 돌보느라 자유롭지 못해 내가 느꼈던 답답함과는 차원이 다른 답답함이었을 텐데 말이다. 내가 아이를 갖고 돌보며 느꼈던 몸의 불편함과는 또 다른 불편함이었을 테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난 내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앞을 볼 수 있기에 가질 수 있는 행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지를 못했다.
헌데 헬렌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내가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눈으로 보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말이다. 내가 보는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찾은 적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녀의 말처럼 눈을 도구처럼 사용했을 뿐이었다. 책만 하더라도 난 내가 좋아하는 책을 그녀보다 훨씬 수월하게 읽을 수 있고, 점자책만 읽을 수 있는 그녀와 달리 난 읽을 수 있는 책도 정말 많았다.
평생 깜깜함 어둠 속에서 세상을 보려 했던 헬렌을 생각하며 난 내 안의 답답함을 조금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보려하지 않았을까 반성했다. 몸은 아이들에게 묶여 있지만, 내 눈만은 묶여 있지 않은데 말이다. 난 책을 볼 수 있고, 텔레비전도 볼 수 있고, 온 세상을 볼 수 있는데 말이다. 또 볼 수 있기에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왜 난 답답함만을 느끼려 했을까.
“나는 그제야 내 손 위로 쏟아져 내리는 차가운 물의 이름이 ‘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살아 숨 쉬는 낱말의 입맞춤을 받은 내 영혼은 긴 잠에서 깨어나 빛과 희망과 기쁨을 맛보았고,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 p92 중에서 -
헨렌의 글은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고, 그래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련을 통해 헬렌의 마음은 더욱 깨끗해지고, 삶은 더욱 진실해졌습니다. 헬렌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 영혼이 강해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 p121 중에서 -
몸의 감각을 통해서만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상상력과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볼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더 깊이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깨달았습니다. 헬렌은 사람이 지닐 수 있는 가장 큰 장애를 짊어지고 괴로워했지만, 그 장애 앞에서 용기를 잃거나 굴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어려움을 딛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마음의 눈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 있었습니다. “나는 낙관주의자이기 때문에 행복하다”라면서 “낙관주의가 자신의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헬렌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헬렌은 “행복해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자신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 대답하겠다.”라고 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행복을 낳는 일부터 해야 한다. 즉 선생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말처럼 헬렌 켈러는 평생 사람을 사랑하고 선을 실천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사흘만 볼 수 있다면 그리고 헬렌 켈러 이야기> p210 중에서 -
나와 헬렌의 다른 점은 신체적인 차이뿐만이 아니었다. 헬렌은 나와 달리 시각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나와 달리 마음의 눈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시각을 갖고 있는 나보다 훨씬 더 큰 행복감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나는 헬렌이 처음 차가운 물을 손으로 느끼며 물의 이름인 ‘물’을 알았던 것처럼, 볼 수 있다는 것이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 나는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들을 수 있는 즐거움을, 말할 수 있는 즐거움을 느끼고 감사하며 살아야지 싶다. 나도 헬렌처럼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느껴야지.
- 연필과 지우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