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날의 외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이 무르익고 잎새는 더욱 푸르러가는 5월의 한 날에 비가 내리고 있다. 언제였을까. 기쁜 마음으로 외출을 준비하던 기억이. 허름하게 걸치고 나서면서 살아있음이 작은 행복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외출이 나에게도 있을줄을 예상이나 했었던가.
  내게는 언제나 그리움과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누님과 함께 흩뿌리는 봄비를 우산으로 가리며 산본으로 가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벌써 언제였던가. 이곳 시흥으로 이사오기 훨씬 전부터 도시빈민으로 태어나 자란 내 어린시절의 기억이 빗물처럼 흘러갔다. 작고 낡은 집, 판자와 루핑으로 얽은 허름한 집에서 홍수를 만나고 강제철거에 시흥의 산동네 비탈진 언덕으로 허위허위 올랐던 이십년 전, 그때 나는 열 네살이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가난으로 가족들과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그때, 10원짜리 물지게와 30원짜리 우동 한그릇으로 하루를 견뎌야 했던 산비탈 해방촌 마을에서 나는 꼬마 노동자로 자랐다. 몇 백원의 일당에 목이 메이던 나날 속에서도 절망을 몰랐던 것은 여전히 철이 없었거나 창창히 살아가야할 미래가 있었기 때문인지 몰랐다.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새우잠을 자고 아침마다 연탄가스에 취해 머리를 두드려 대며 산비탈을 구르듯 내려와 공장으로 갔다.
  나의 꿈은 소박했다. 많은 돈도, 큰 명예의 욕심도 없었다. 그저 작은 집에서, 방바닥이 평평하고 비가 새지않고 쫓겨나지 않을 걱정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는 참으로 어렵고 힘겨웠다. 비가 오면 방에 물이 들어차는 낮은 동네거나 산사태로 사람이 떼죽음을 하는 비탈진 산동네를 전전하며 전혀 낯선 텔레비젼의 아파트가 어느 외국의 풍경같이 낯설기만 했다.
  소년노동자에서 청년노동자로 자라도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누구의 탓이었을까. 나는 뼈가 휘도록 열심히 살았고 다른 누구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밤마다 하얀 벼개잇을 핏물로 물들인 적도 있었고 집을 떠나 지방을 몇 해씩 전전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없어서 서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이 더러운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가난에 찌든 내 모습이 싫었고 불평등한 세상이 싫었다. 산비탈 판자집을 전전하며 살아온지 이제 이십년, 나는 오늘 신도시 아파트의 작은 평수 아파트 열쇠를 받아왔다. 잔금을 치루고 13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작은 공간이 나의 집이라는 것이 선뜻 믿기지가 않았다. 내 손으로 아파트를 지은 것이 대체 몇 동이었던가. 여의도에서 잠실에 이르기까지 건설업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내 손으로 지은 집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정작 내 집은 없었다. 60평, 45평, 많은 호화아파트도 지어보았고 강남의 호화주택도 들어가 보았다. 그때에도 나의 꿈은 언제나 먼곳에 있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 집이 있다면.
  내 집을 향한 끝없는 갈망과 절실함은 다만 주거공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집이 없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모든 근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단한 땅 위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래로 쌓은 탑 위에 서 있듯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태였다.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밤이면 흘러나오는 아파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불빛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쓸쓸함과 슬픔이 가슴 속에서 스며나오는 것을 느낀 적이 한두번이었을까.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이제 며칠있으면 이사를 한다. 신도시 아파트 주민이 되어 지난날, 내가 살았던 산꼭대기 판자집을 생각하면서 나는 무엇을 느낄까. 그때도 여전히 쓸쓸함과 서러움을 느끼게 될까.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분들은 이러한 고통을 모르고 자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도 집이 없어서 산비탈의 판자집에서, 아니면 비닐하우스에서 강제철거를 당하고 오늘처럼 비가 오늘날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지을 가난한 도시빈민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비가 새는 판자집에서 서러움의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말하지 말라. 인간의 삶이 얼마나 절실하고 각박한 것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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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꿈깨라!

 

먼저, 한겨레 신문 기사 한 꼭지.

서울시민 85% “나는 중산층”/시정개발연구원 ‘계층조사’  
서울시민의 85%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평균적인 서울시민의 모습은 ‘26평형 아파트에 사는 4인 가족의 38살 남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는 서울시정개발연구원(시정연)이 개원 10돌을 맞아 ‘서울시 사회계층과 정책수요’ 연구를 위해 만 20살 이상 65살 이하의 서울시민 1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나타났다. 
시정연이 시민들에게 상-중상-중중-중하-하층 등 5개 계층 중 자신이 어디에 속하고 있다고 느끼는지 물어본 결과, 최상위인 ‘상층’에 속한다고 밝힌 사람은 0.3%에 그쳤으며, 최하위인 ‘하층’에 속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8.3%였다. 중중층(46%)과 중하층(39%)을 합쳐 모두 85%가 일상적으로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계층의식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들은 또 △학력 △가문 △정치의식 등에서 중류층-하류층 사이보다 상류층-중류층 사이에 격차가 더 크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2002-10-30)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껍데기뿐인 허위의식을 깨뜨리라는 것이다.
중상 중산층, 중중 중산층, 중하 중산층의 분류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학벌, 직업, 소득수준 등을 고려해서 판단을 했겠지만,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런 가치판단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속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일까?

이것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자. 중산층은 주관적인 관념으로도, 자신의 학벌, 직업, 소득수준으로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중산층은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이 만드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 가지고 있는 허위의식과 살얼음판 위에 있는 중산층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보자.
월급 3백만원을 받는 직장인 홍길동씨가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중산층에 속할 것이다. 세금을 공제하고 실제 수령액이 3백만원이 될 수도 있고, 세금을 공제하기 전에 총수령액이 3백만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홍길동 씨는 30평 아파트에 살고 있고, 소나타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부모님을 모시고 있고, 아내와 두 아이가 있다. 
이 정도면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이라고 자타가 공인할 것으로 본다. 하지만,  중산층의 개념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 중산층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부터 잘못이다.

홍길동 씨는 매달 3백만원의 월급을 받지만, 세금으로 나가는 돈, 각종 공과금 - 아파트 관리비, 통신비 등 - 과 휘발유값, 차량유지비 등 기본으로 나가는 비용만해도 엄청나다. 
여기에 아이들 교육비 - 사교육비를 감당하기는 엄두조차 못낸다. - 가 들어가야 하고, 대출금 이자 등도 있다. 이 정도만 해도 벌써 지출되는 돈이 2백만원이 넘어간다.
문제는, 3백만원을 꾸준히 받고, 홍길동 씨네 집안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홍길동 씨가 그나마 근근히 중산층(?)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홍길동 씨의 부모님 가운데 한 분이라도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거나 수술을 받게 되면 홍길동 씨의 가계는 곧바로 적자로 바뀌게 된다.
즉,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프게 되면 중산층 생활이라는 것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약 90% 이상의 국민들 - 약 4천만 명 - 은 가족들 가운데 한 사람이 심각한 질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거나 수술을 받게 되면 곧바로 경제적인 부담을 느끼게 된다. 그 정도는 물론 차이가 있겠지만, 예를 들어 1천만원의 수술비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이 정도의 돈을 부담없이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부담을 느낀다면 그들은 모두 중산층이 아니다. 따라서 홍길동 씨도 당연히 자신이 중산층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중산층은 사회 구조와 시스템이라고 했다. 
유럽처럼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내고 의료와 교육을 완전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홍길동 씨가 3백만원을 받아 세금으로 150만원을 낸다고 하자. 그리고 가족 가운데 누가 아프건 모두 무료로 의료 혜택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과연 앞에서 3백만원을 버는 것과 150만원을 버는 것 가운데 누가 더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당연히 뒤의 150만원을 버는 것이 훨씬 더 잘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이 만드는 중산층인 것이다.

의료비와 교육비가 전혀 들지 않는다고 했을 때, 다른 부분에서 조금씩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한다면 월급 150만원을 받아도 궁핍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노후가 불안하지 않고, 자식들의 교육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므로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고, 사회적으로도 불안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구조 속에서는 한달에 5백만원을 벌어도 늘 삶의 토대가 불안하기만 할 것이다. 언제 어떻게 자신의 생활이 붕괴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을 없앨 수 있는 것이 바로 사회적인 시스템이다. 적어도 의료와 교육만큼은 국가가 책임을 지겠다는 정책. 그래서 국민들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고 하는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금 정책과 세금을 걷어들이는 경로가 투명해야 한다. 
자영업자들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은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고, 월급장이들은 자신들이 세금을 많이 낸다고 억울해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버는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내는 것이 분명하게 확인된다면, 돈을 내는 사람들 누구도 억울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의료와 교육 단 두 가지 정책만을 국가가 책임지고 이끌어 간다면 많은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에서도 부유세를 주장했지만, 세금의 형평성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부유세는 당연히 필요하다. 100만원을 버는 사람의 50%는 50만원이지만, 100억을 버는 사람의 50%는 50억이다. 이럴 경우는 100억을 버는 사람에게 80%의 세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형평성이다.
그러면 누가 애써서 돈을 벌겠냐고? 나라면 당연히 돈을 벌 수 있을만큼 벌고 세금으로 내겠다. 돈 많이 버는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가 아닌가?
이상론에 치우치고 있다고? 월드컵 4강도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상이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다른 건 뒤로 미루더라도 의료와 교육만큼은 국가가 무료로 실시할 수 있도록 이제부터 정책을 개발하자. 국민이 하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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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지나간 자리 SE - [초특가판]
울루 그로스버드 감독, 우피 골드버그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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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영화다. 가족에 대한 애정과 집착, 가족의 부재와 상실감에 따르는 고통, 가족의 개념,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 등 이 영화는 가족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들을 비교적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세 자녀를 둔 엄마(미셀 파이퍼)는 사진작가. 단란하고 행복한 가족이다. 평범한 중산층 가족의 삶에 갑작스러운 불행이 닥친 것은 아이의 실종. 엄마는 아이 셋을 데리고 동창회(시카고의 호텔)에 참석하는데, 그 자리에서 그만 둘째 아이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 아이는 이제 겨우 세 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사건은 의외로 커지고, 아이는 결국 실종된 채 사건은 미제로 남게 된다. 아이의 실종으로 심한 충격에 휩싸인 엄마. 직업도, 생활도 모든 것이 피폐해지고 가족관계는 모래알처럼 버석거리기만 한다.
'벤(둘째 아이)보다 늦게 죽고 싶지 않다'는 엄마의 말은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을 그대로 말해준다. 동생 벤을 돌봐야 했던 큰 아들(베이커)은 동생이 실종될 때 함께 있었고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는 죄책감에 빠져들고, 엄마는 남은 두 아이에 대해서도 예전처럼 깊은 애정을 쏟지 못한다.
가족의 내면은 고통스럽지만 하루 하루, 나날의 삶은 지탱되고 있고 아빠의 사업은 예전보다 좋아져 식당을 개업한다. 개업한 식당은 시카고에 있고, 가족은 시카고로 이사한다. 엄마는 아이가 살던 집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지만, 남편의 설득으로 어쩔 수 없이 동의한다.
그렇게 세월은 9년이 흘러가고, 막내딸이 9살이 되던 어느날, 막내딸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의 소년을 우연히 본 엄마는 그만 숨이 막힐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잃어버린 둘째 아들과 너무나 똑같이 생긴 아이.
미친듯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사진을 인화해 컴퓨터로 합성한 성장사진과 대조를 한다. 완벽하게 일치하는 얼굴.
결국 지문 조회를 통해 아들을 찾게 되는 가족은 기쁨도 잠시, 어색함과 낯설음에 당황한다. 분명 세 살때 잃어버린 둘째 아들이 맞건만, 그 아이는 이제 다른 가족의 아들이었고, 누구보다도 자기를 길러준 부모를 사랑하고 있었다.
가족 사이의 갈등은 증폭되고, 엄마는 냉정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둘째 아들이지만, 9년이라는 시간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가족은 모두 힘들고 고통스러운 갈등을 겪은 것이다.
둘째 아들을 다시 예전의 부모에게로 돌려보내기로 한 것은 엄마의 결단과 설득이었다. 엄마는 가족의 행복이 결국 한 아이의 불행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둘째 아들은 자기가 자랐던 집으로 돌아가고, 가족이란 피를 나눈 것만으로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게 된다. 
가족의 부재로 인한 상실과 가족 관계의 붕괴, 다시 만난 가족과의 결합에 따르는 시간, 환경, 문화의 공백의 불일치, 피를 나눈 혈연이라도 '가족'이 될 수 없다는 현실 인식.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둘째 벤은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와 오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을 낳고 길러준 친부모와 형제들이 낯설지만, 어쩔 수 없이 지나간 9년의 공백은 가족들의 사랑으로 메워야 하는 것임을 생각하며.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이 영화는 남의 일같지 않더군요. 영화는 차분하게 전개되고 가능한 객관적으로 가족 관계를 바라보았지만, 그래도 슬프고 눈물납니다. 뭐, 해피엔딩이니까...
미셀 파이퍼와 우피 골드버그가 등장해서 영화가 더 좋게 느껴졌나봅니다. 좋아하는 배우들이라.
가족이란 뭘까요? 우리의 본능 속에 있는 최소 집단일까요? 가족의 개념도 많이 달라지고,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분석으로 '가족'의 의미가 사뭇 달라지고 있지만, 평범한 소시민에게 가족은 자신의 삶을 의지하는 최소한의 영역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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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마음 속에 응어리진 사건...   

올해를 넘기기 전에, 마음 속에 응어리진 사건을 털어놓고 가렵니다.

예전에 본의 아니게 갓길 주행으로 카파라치에게 사진이 찍혀 벌금을 물었다는 내용을 어떤 카페 게시판에 썼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결과가 어떻게 되었냐 하면, 범칙금 내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일단 사유서를 써서 제출하고 법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뭐, 즉결 심판이었던 것 같은데, 법원은 태어나서 처음 가봤습니다.

아침에 가서 대기를 하고 있으려니까, 법복을 입은 판사가 들어오더군요.

그날은 몇 사람이 즉결 심판으로 대기하고 있었는데, 앞에 사람들도 1-2분 정도 간단하게 끝나더군요.

내 차례가 되었는데, 판사가 서류-아마도 제가 쓴 사유서일 겁니다.-를 쓱 보더니 '이유없다'고 하면서 벌금 10만원을 때리더군요.

범칙금을 그냥 내면 9만원이었는데, 그보다 더 많이 내게 되었습니다.

벌금을 내지 않고 [정식 재판]을 청구할 수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판사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한 개인이 겪은, 진심으로, 내가 가진 모든 양심과 자존심과 우리 가족의 명예를 걸로 사유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는데, 그게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했던 겁니다.

법원을 나오면서 [정식 재판]을 할까 하다가 그냥 벌금 10만원을 물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형식적으로는 끝이 났지만, 마음 속에는 응어리가 졌습니다.

이 사회가 얼마나 부도덕하고 엉망인지, 정직하고 성실한 인간에 대한 배려가 눈꼽만큼도 없는 파렴치한 국가인지...

제가 겪은 사건은 정말 하찮은 것이지만, 개인 개인이 겪는 그 수많은 사연들을 모두 들어줄 여유가 국가적으로는 없을 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그 사건 이후에 몇 달 지나지 않아 곧바로 카파라치 제도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경찰이나 당국에서도 이미 카파라치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도 양심적인 시민의 말은 무시하고 카파라치의 사진을 믿고 일방적으로 벌금을 때리는 이런 사회야 말로, 희망이 없는 사회가 분명합니다.

이 사소한 사건 외에도 나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사회적으로는 분명 관련이 있는 사건들--최근의 노동자 분신 사건, 농민의 할복 자살 사건, 외국인 노동자들의 야만적인 대우, 철거민들의 항거 등등-을 보면, 우리 사회는 썩을대로 썩은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법과 제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한나라당을 비롯해 정치하는 놈들에게는 솜방망이이고, 묵묵히 일하는 서민에게는 철퇴가 되는 것이 법이라면, 그런 법은 불복종하는 것이 민주주의 시민의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후, 나는 법, 판사, 검사 보기를 내 발가락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성실하고 진실하게 법을 집행하는 판사님, 검사님 많습니다.

하지만, 적지않은 판검사들은 권력에 아부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법집행을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빨리 사라지는 것이 좋은 사회겠지요.

나 혼자만 이런 불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별종이어도, 역시 그건 내가 감수해야 할 문제일 테니까요.

다만, 정말 상식이 통하는 사회,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당연하게 상식이 통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게 왜 그렇게 안 될까요?

어렵고 힘들 일 하는 노동자-환경미화원, 119 대원,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 건설 노동자, 농민 등-들이 넉넉하게 월급받고, 자부심을 가지며 일하는 나라가 불가능한 걸까요?

국회의원이 자전거타고 출퇴근하고, 버스, 전철 타고 출퇴근하면서 시민들과 대화하고, 국정에 반영하고,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불가능한 걸까요?

너무나 타락하고 더러운 꼴이 많아서 이에서 신물이 납니다. 탐욕스럽고 뻔뻔하고 교활하고 악랄한 정치가들을 날마다 봐야 하는 이 사회가 진저리가 납니다.

어쩔 수 없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어서 묵묵히 살아가지만, 왜 많이 배우고 권력을 가진 놈들은 사기치고, 도둑질을 해도 아무 탈이 없는 걸까요? 

내 자식에게 아무 것도 물려 줄 것이 없는 이 사회의 미래가 암담하고 비참할 뿐입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언제나 될 지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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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의 즐거움

 
서울이나 서울 근교에 사는 사람치고 관악산을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북한산이나 도봉산이 서울의 북쪽에 자리잡은 명산이라면 관악산은 서울의 남쪽에 있는 명산이다. 그리 높지도 않고 거칠지도 않은 산이지만, 이른바 ‘악’자가 들어가는 산은 뭔가 심상치않은 기운이 있다고 말한다. 설악산이 그렇고 치악산이 그렇다. 하지만 관악산은 그런 명산에 비할 바는 솔직히 못된다. 다만 서울 근교에서 아기자기하게 즐길 수 있는 산이어서 좋다는 말이다.
서울사는 사람들은 북한산의 절경을 보고 감탄한다. 서울에 이런 아름다운 산이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과 신기함을 감추지 않는다. 또한 산을 자주 다니는 사람일수록 북한산에 대한 진가를 인정한다. 그렇다. 북한산은 서울 근교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절경이 빼어난 산임에는 틀림없다. 반대로, 관악산은 산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관악산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산세가 완만하고 지형이 평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볼 것없는 산은 아름답지 못한 여성에 비유되는 것은 아닌지.
나는 많은 산을 다니지는 않았다. 따라서 산의 진정한 맛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고, 앞으로 조금씩 그런 맛을 알아갈 생각이다. 하지만 산을 무척 좋아하고 시간이 있으면 가까운 산이라도 늘 찾는 편이다. 산을 좋아한다는 것이, 유명하고 아름다운 산만을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산이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수련하고 그 앞에서 겸손을 배우는 외경의 존재임을 믿는다. 따라서 산을 오를 때의 그 힘겨움과 산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왜소함을 통해 삶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산이란, 명산이건 뒷동산이건 그리 가릴 것이 없다고 본다. 다만, 큰 명산들은 그 산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신화적, 민중적 삶의 토대와 의미가 조금 더 남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많은 감동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관악산을 자주 오른다. 내가 관악산 줄기 바로 밑인 삼성산 자락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 1974년부터였으니까 20년동안 관악산을 바라보며 살아온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 팍팍하고 답답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산을 오르거나 산에 대한 애정을 떠올릴 만한 여유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끔은 산을 올라 그 답답하고 힘겨웠던 삶을 되새기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나마 작은 아파트에 먹고 사는 걱정을 예전보다는 덜 하고 있어서 그때에 비한다면 행복에 겨운 나날이다. 일요일이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산을 오른다. 새벽같이 서둘러 북한산을 가고 싶기도 하지만, 산에 오르는 것보다 그 먼길을 사람들 속에서 시달리며 오고가는 길이 고달파서 아예 가까운 관악산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예전에는 같은 코스만을 선택해서 오르내렸지만, 요즘은 이곳 저곳,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고 있다. 관악산이 작아서 뭐 볼 것이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다녀본 관악산은 결코 별볼일 없는 산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호랑이가 출몰했던 - 하긴, 조선시대에 어느 산에서나 호랑이가 없던 곳은 없었겠지만 - 그 울창한 산림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사람의 발자국이 뜸한 곳이 아직도 있다.
관악산은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관악구 신림동, 사당동, 경기도 관천시, 안양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올라가는 길은 어디에서나 가능하지만, 서울대 입구, 안양유원지, 과천, 사당동 관음사 방향 등이 있다. 서울대 입구에서 올라가면 연주암쪽과 삼막사쪽으로 갈라지고 연주암쪽으로 해서 과천으로 내려오는 길이 가장 짧은 길이다. 과천에서 오르면 연주암이 바로 나오는데, 서울대쪽과 안양, 사당동 쪽으로 길이 갈려 서울대쪽이 가장 가깝고 안양과 사당동쪽 길은 비교적 긴 편이다. 사당동쪽에서 오르면 능선을 따라 연주암을 지나 삼막사를 거쳐 안양 유원지까지 일종의 종주를 할 수 있는 길이 된다. 사당동 쪽에서 올라 안양유원지까지 가는 길은 4-5시간은 충분히 걸리는 길이다.
사람이 많기로는 서울대 입구쪽과 안양유원지, 과천쪽이지만 연주암과 삼막사 주변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이 많지 않다. 일요일같이 사람이 많이 올라오는 날에도 서울대 수목원을 지나는 길에는 사람의 발길이 뜸해서 호젓한 산행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코스를 잡으면 거의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관악산에서 사람의 흔적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가. 서울대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는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짧은 길이다. 정상에는 태극기가 꽂혀있고 그 뒤로 진짜 정상에는 군부대가 있다. 이 군부대를 우회하는 코스가 재미있다. 정상에서는 남산이 직선으로 바라보이고 서울과 경기도가 모두 보인다. 물론 서해바다도 보인다. 소래근교의 바다인데, 맑은날에는 바다가 파랗게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북서쪽으로는 김포공항이 보이고 한강과 여의도와 63빌딩과 서울시대 한복판과 남산탑과 이태원쪽과 흑석동,방배동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서남쪽으로는 산줄기가 이어져 많이 보이지는 않지만 대방동, 시흥동, 기아자동차 공장, 안양천이 흐르는 주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단숨에 정상에 올라, 태극기 아래에서 오이나 사과를 깎아먹는 그 각별한 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여기서 연주암은 상당히 먼 거리이다. 삼막사가 가깝고 시흥동쪽 길이 바로 정면으로 보인다.
산본으로 이사온 뒤로는 정상에 올라본 적이 거의 없다. 과천에서 연주암에 들러 서울대 수목원을 지나 안양유원지로 내려오거나 사당동으로 나오는 코스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연주암에서 사당동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완만하고 많이 걷는 것이 장점이지만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서 재미가 없다. 관악산을 자주 찾는 이에게 널리 알려진 코스로는 관악산 팔봉이 유명하다. 연주암에서 안양쪽으로 가기 위해서 일단 첫 봉우리로 올라서면 눈 아래로 팔봉 능선이 굽이치며 펼쳐진다. 팔봉 능선을 따라가는 재미는 아기자기한 바위 능선을 타는 것이지만 너무 유명해서인지 역시 사람의 발길이 잦다. 내가 가장 즐겨찾고 마음 속으로 흐믓하게 여기는 길은 팔봉 능선의 중간에서 벗어나 서울대 수목원 끝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이 길은 사람이 거의 없고 언제나 조용하며 한적하고 쓸쓸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에 사람마져 없다는 것이 기적같은 일이지만 나는 이 길을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주지 않는다. 나만 혼자서 호젓이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관안산은 지형이 완만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기는 하지만 구석구석 다니지는 않는다. 따라서 호젓한 산길을 걷고 싶으면 능선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된다. 관악산을 여러번 다니기는 했지만 아직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관악산을 찾는다. 앞으로 다른 산을 더 열심히 찾아다니겠지만, 관악산은 나의 좋은 친구로 늘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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