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가는 기차 안에서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그리움이 짙게 배인 싱그러운 바람이 있는 추석 다음날 오전입니다. 좋은 벗이 있는 고향, 양평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기쁨으로 설레입니다. 마침 김용길 시인의 “양평”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양 평

 

양평에나 갈까

아니 평양에

거기 눈빛 고운 아이를 찾아

시나 읊어주고

낚시나 할까

 

구름 그림자가 물로 들어서

싱싱한 물고기로 튀어오르고

아버지가 물가 저편에서

하하하 웃으시는 웃음이

쩔렁거리며

흔들려 오는

물많은 동네

 

란이는 이미 시집가고 없지만

피난온 아버지와 의형제 맺고

우리를 서로 맺어주기로 했다는

그의 아버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

어머니가 해주시는 채나물밥

소주한잔 걸치는 매운탕이 좋아서

마음이 적적할 때면 버스를 타고 가보는

또다른 고향

 

제일 추운 곳이면 어떠냐

평양에나 갈까

아니 양평에

물그림자는 하늘로 올라

아버지 얼굴이 되고

뚝뚝 듣는 그이를

내가 듣으리

 

넉넉한 마음으로 입석표를 끊고 객차의 끝에 자리를 잡습니다. 마침 내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뒷자리도 한가롭고 바람은 나의 몸을 부드럽게 감돌고 지나갑니다. 덜커덩,하며 열차가 출발하고 나는 편히 자리를 잡고 앉아 기차가 지나간 자리를 바라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평행선 철로, 은빛으로 빛나는 두줄기 선이 무한히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기차를 따라옵니다. 철도 주변으로는 아직 푸르름이 가시지 않은 나무와 풀들이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흔들고 전봇대와 전깃줄이 사열하듯 늘어서 있습니다. 지나치는 논밭 풍경은 가을의 절정을 알리는듯 탐스러운 황금빛으로 빛나고 팔당 유원지에는 나룻배가 여러척 색색으로 떠다닙니다.

평행선, 따라오는 철로를 보니 생각이 납니다. 아, 철길 아래로 한강의 상류가 푸르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열차는 벌써 세 개의 터널을 지나고, 저 멀리 산등성이에는 성묘온 사람들의 흰옷이 선명하게 빛나보입니다. 평행선, 뭔가 많은 의미가 있을 것만 같은 단어입니다. 서로가 그리워하면서도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사이를 두고 이렇게 말하던가요. 하지만 서로 만나지는 못해도 영원히 함께 갈 수만 있다면 그것도 큰 행복이겠지요. 사람은 어차피 완전히 하나가 될 수는 없는 존재일테니까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만 가면 양평입니다. 오늘, 그리고 이렇게 가슴 저리도록 싱그러운 날, 나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눈물겹도록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참으로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나의 존재와 함께, 나와 함께할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감사함과 행복이 고루 함께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때때로 불행해지더라도 외면할 수 없는 자연과 삶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뜨거운 사랑을 할 것입니다.

은빛 철길이 여전히 따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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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가 한국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

 

해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라는 것을 한다. 미스코리아 뿐만 아니라 지방도시에서도 무슨 무슨 이름을 내걸고 젊은 여성들을 선발하는 대회가 꽤 많다. 남원의 ‘춘향이’, 영양의 ‘고추 아가씨’, 양평의 ‘산나물 아가씨’ 등 각 지방에서는 주로 특산물과 관계있는 것으로 젊은 여성들을 선발하는 대회를 갖고 있다.

젊고 아름다운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누구나 젊은 시절을 보내기는 하지만 젊다는 것은 언제나 특권이고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또한 아름다운 여성은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한다. 외모의 아름다움도 사람의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운 여성이란 그저 일상적으로 생활하면서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여성을 말하는 것이다.

올해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했다. 엄청나게 많은 - 무려 51명 -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웃고 노래하고 과감하게 노출을 한 채로 전국의 시청자들을 ‘즐겁게’해 주었다. 그런데, 이런 미스코리아와 같은 선발대회가 왜 있어야 하는지,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먼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주최하는 쪽의 말을 들어보자.

미스코리아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대표해서 외국의 미인선발대회에 나가고 한국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냈다고 한다. 또한 미스코리아는 외국의 국빈이나 귀빈들의 접대를 맡아서 한국의 이미지를 높인다고 한다. 이 정도 이유이다. 더 어떤 일을 하는지는 나중에 말하겠다.

그렇다면 이만한 이유를 가지고 해마다 엄청난 경비와 시간을 들여가며 미스코리아를 뽑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미스코리아를 왜 뽑아야 하는지 궁금한 이유는 또 있다.

첫째, 미스코리아가 국민에게 어떤 존재인가? 앞에서 말한대로 외국의 귀빈이나 국빈에 대한 대접 정도라면 굳이 이렇게 거창하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같은 방식을 거치지 않아도 충분한 일이다. 그리고 외국의 미인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국내 선발전이라면 역시 생방송으로 2시간 30분이나 공공전파를 낭비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둘째, 미스코리아의 기준이 무엇인가?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2시간 30분씩이나 낭비하면서 뽑는다는 미스코리아의 선발기준은 무엇인가? 아름다움?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일게다. 키크고 서구적으로 생긴 여자들을 한국적인 여성이라고 선발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겉모습만을 보고 아름다움의 기준을 삼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이렇게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이유들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미스코리아라는 여성을 선발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해보자.

앞에서 든 예처럼 외국에서 오는 귀빈이나 국빈의 접대에 미스코리아가 참석을 한다는 것은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미스코리아가 없으면 접대가 안되는 것인가? 외국인 접대에 반드시 미인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미스코리아라는 것이 결국은 접대부 정도의 위치밖에는 안되는 것인가? 서양에서 미스(자기나라)선발대회를 치른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꼭 따라가야 하는 법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방송국에서는 대대적인 홍보와 시설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생중계하고 있다. 그 이전에 이미 한달 이상의 준비기간을 갖는데, 이 과정에서 소비되는 막대한 비용은 완전히 소비되어 조금도 생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즉 물쓰듯이 써서 없애버리는 돈인 것이다.

예전에 어떤 미스코리아는 선발되고서 누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냐면, 바로 ‘미장원 언니’였다. 미장원이 미스코리아를 만드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는데, 미스코리아가 되고자 하는 젊은 여성들의 사고방식도 절대 건전하다고 볼 수가 없다.

소문이긴 하지만 미스코리아가 되기 위해서는 돈을 몇 천만원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심사위원인 디자이너 아무개씨의 드레스를 맞춰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여성들의 허영심을 부추겨 거액의 돈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라는 것이다.

또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극적인 대회이다. 성의 불평등 구조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마치 국가가 공인한 듯한 성차별과 성상품화의 대회이다.

몇년전에 월간 「샘이깊은물」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대한 토론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박수동씨의 삽화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수영복을 입고 나오는 젊은 여성들의 몸을 훓어보는 시선이 어디에 가장 많이 머물렀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자본주의적 상품화의 극대화된 표현이다. 돈만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자본주의 세계에서 여성의 성은 매우 훌륭한 상품이다. 여기에 미개한 여성들-그들도 피해자임은 분명하다-의 적극적인 허영에 힘입어 수 천만 명의 시선 앞에서도 부끄럼없이 옷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양가집 규수라는 여성들이.

다시한번 말하지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라는 것은 당장 없어져도 우리의 생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고, 국가적으로도 하등의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여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그 방법은 얼마든지 따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며 겉모습만 보고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것처럼 사람을 기만하는 것도 없다. 그런 것을 보고 자란 어린이들이 허황된 꿈만 키우고 교양을 쌓기보다는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만 예뻐질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나온 젊은 여성들 가운데서 바느질, 김치담그기, 간장다리기 등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내가 보기에는 없다. 왜? 그들이 차림새를 보라. 화려한 치장, 긴 손톱, 늘 가꾸고 다듬지 않으면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자면 부엌에서 보낼 시간이 없지 않겠는가?

아름다운 여성이 싫다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아름다운 여성은 보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인공적으로 가꾸고 겉모습만을 꾸민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차라리 못생겨도 마음씨좋고 음식솜씨 좋고 허영심없는 여성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전파는 국민의 것이다. 즉, 전파를 사용하는 방송이 국민의 것이라는 말이다. 방송국은 상업적 이익을 위하여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쓰레기같은 방송을 하면서 국민의 의식과 가치관을 더럽히는 것은 시청자와 국민을 모욕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정한 미인을 뽑기위한 청문회를 마련하던지 아니면 이 따위의 쓰레기같은 미인선발대회를 하려거든 방송을 하지 말던지 아예 집어치우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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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를 다녀와서

  

언젠가 꼭 찾아뵙겠다고 마음으로만 약속했던 내 자신과의 약속이 항상 부채로 남아있었다. 왜, 10년이 지난 오늘까지 나는 광주를 단 한번도 찾아가질 않았을까. 아니, 찾아갈 수가 없었을까. 먹고 살기가 바빠 시간이 없다는 핑계라면 그것은 정말 우스운 변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1980년 5월의 광주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 그렇지도 않다. 5월의 광주는 내 가슴에 붉은 핏자욱처럼 언제나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다.

살아간다는 것은 타성에 길들여지는 과정이다. 어떤 혁명적인 사건이나 운명의 잔인한 고통을 겪어도 시간이 지나면 망각하고 그때의 감정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는 약점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 순수한 정열과 진지한 고통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가치있고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거의 사건들을 인간의 삶에 투영시켜 ‘역사’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이번 광주행은 피상적이고 관념적이었던 역사에 피와 열기가 흐르게 하는 행위였다.

「언협」에서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주로 언론관계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좀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지만 뜻있는 목적 하나만 가지고 참여를 했다. 24일 일요일 아침에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모두 두 대였는데 서울을 벗어나자마자 한 대가 고장나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고생을 했다.

광주에 도착한 우리는 약식 집회를 갖고 열사들에 대한 추모의식을 치른 뒤 참배를 했다. 줄지어 늘어선 무덤 앞에는 가족들이 마련한 사진과 약력이 놓여있고 이름없이 죽어간 열사들의 무덤에는 ‘무명열사지묘’라고 씌여있었다. 그나마 가족이 있는 분들은 죽어서나마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지만 연고도 없고 이름도 없이 죽어간 그 많은 열사들은 누가 기억을 해줄까. 무덤 앞에 놓인 열사들의 이름과 약력을 보면서 나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내 나이와 같은 열사들의 무덤이 몇 개 보였기 때문이며 그들의 삶이 나의 삶에 비해 어떤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벌써 12년전의 일이었다. 나는 그때 스무 살의 청년으로 서울에서 새로운 배움에 깊은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내 생활은 가난과 피곤으로 이어졌지만 배움이라는 단 하나의 희망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으며 세상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었다.

바로 그때, 광주의 5월은 시작되었다. 군부의 쿠데타와 민중의 항거가 계속되던 바로 그 시기, 역사가 꿈틀거리고 인간의 삶이 격동하는 바로 그 시기에 나는 서울에서 새벽까지 불을 밝히며 교과서를 들여다 보고 있었고, 광주에서는 나와 같은 동갑내기들이 손에 총을 잡았다. 한반도의 땅 위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가야만 했던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나는 절실하게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총을 잡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처절한 상황을 나는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사진과 비디오를 통해 볼 수 있었고 시민군의 증언과 기록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하늘 밑에서 이렇게 피의 살육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내가 철이 없었다면 광주에 있었던 나의 동갑내기들은 무슨 이유로 총을 들었고 장열하게 전사를 했을까. 그들도 철이 없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족을 학살하는 군부의 악랄함과 잔인함에 젊은 피가 끓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바로 역사의 현장에 있었기에 그들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고 젊은 생명을 아까와하지 않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자 자신의 피를 뿌렸다.

 

민청진: 1961.6.5일 생 - 1980.5.24일 전사

아아,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나와 생일이 하루 차이인 바로 이 벗은 도청앞 전투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장열하게 전사했다. 스무 살의 피끓는 나이. 부모님같은 노인들이 계엄군의 곤봉에 머리가 깨지고 동생같은 여학생이 계엄군의 칼날에 온 몸이 찢기는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분연히 총을 들지 않는다면, 총이 없다면 맨 주먹으로라도 내 가족을 학살하는 악마와 같은 군대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죽어버린 생명이다. 여기 동갑내기 민청진은 내가 서울에서 군부와 언론의 왜곡된 사실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외롭게 죽어갔던 것이다. 다른 많은 열사들의 무덤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 왔지만 정작 동갑내기들의 죽음 앞에서는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내 친구들, 얼굴도 모르고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지만 그들은 나의 벗들이었다. 몇 해전에 죽마고우 친구를 사고로 잃었을 때, 그 슬픔과 절망은 내 인생을 결정하고 말았다. 그런 마음으로 여기 망월동에 누워있는 벗들을 보면서 이렇게 살아있는 내가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김병연: 1961.3.7일 생 - 1980.5.22일 전사

김종연: 1961.10.11일 생 - 1980.5.22일 전사

김형영: 1961.7.17일 생 - 1980.11.7일 사망

백대환: 1961.5.23일 생 - 1980.5.22일 전사

 

지금 살아있다면 가정을 꾸리고 어쩌면 예쁜 딸과 아들을 앞세워 일요일이면 공원에 나가서 가족사진이라도 찍었을 그들이 지금은 차가운 무덤에 누워있다. 한창 피어오르는 젊은 나이, 스무 살의 초 여름에.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시간이 지났지만 바로 그 주인공들 앞에서 나는 외롭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역사가 그들을 의롭게 하고 이땅의 하늘과 땅이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두려운 것은 내가 그들을 잊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들만이 내게 일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역사의 현장에서 부릅뜬 눈으로 죽어간 그들을 기억하며 나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 땅에 다시 광주의 오월이 일어난다면 나는 바로 그 현장에 있으리라고, 내 묘비에 짧은 시간이 새겨진다 해도 두려움없이 깃발을 들고 그 자리에 서있겠노라고 초라하지만 당당한 무덤앞에서 나의 동갑내기 벗들에게 다짐했다. 오월의 싱그러운 바람과 꽃 향기, 그리고 제단 위에 받친 향내가 망월동 전사들의 무덤 위에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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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비엩남에 공식 사과해야 한다.  
        - 한국과 비엩남과의 수교를 보면서


  오늘(1992년 12월 22일) 한국과 비엩남 사이에 국교가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동안 미국의 경제재제 조치로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비엩남으로서는 어떻게하든 현재의 경제상태에서 벗어나 힘겨운 민중의 생활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보다는 현실적인 안목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전세계적으로 냉전이 사라지고 경제문제가 더 크게 각 국가의 경쟁이유가 되고 있는만큼 국가의 부를 축적하지 않고는 세계사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심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비엩남과의 국교수립은 참으로 환영할만한 일이다. 지난 시기 60년대 말과 70년대 초까지 이어지는 두 나라 사이의 적대적인 감정을 모두 없애고 미래의 보다 발전적인 관계를 이어가는데 있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는 이번 수교에 반대를 하는 사람은 없을듯하다. 
  그러나 한국과 비엩남과의 수교를 하는데 있어 한국은 비엩남 정부에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할 일이 남아있다. 사실, 수교를 하기 전에 이러한 일들은 모두 합의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쪽에서도 이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한 적은 없는듯 하다. 한국쪽으로 볼 때는 매우 거북하고 씁쓸한 기억이고 비엩남으로서는 그들의 너그러움과 함께 현실적인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정치적 발언을 자제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한국쪽에서는 먼저 비엩남 정부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했어야 했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당한 식민지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1965년 일본과 굴욕적인 수교를 할 때에도 보상문제가 거론되었으며 최근에 일본왕의 ‘유감’발언이 있을 정도로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감정을 삭히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감정은 조금도 나쁘지 않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제국주의이며 침략자인 일본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비난과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범죄를 비엩남에서 저지르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나의 이런 말에 반발을 할지도 모른다. 그 전쟁은 미국을 도와서 싸운 것이고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 ‘성전’이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틀렸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매카시의 화신이거나 정신병자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비엩남이 통일되기 전에 북비엩남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한 장군은 한국의 비엩남 참전을 가리켜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북비엩남이 남비엩남과 전쟁을 한 것은 외세가 우리의 땅을 침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적은 프랑스와 일본, 미국과 같은 외국 침략세력이었습니다.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투쟁을 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엩남에 가서 한 일은 무엇인가. 미국은 비엩남을 침략한 침략자 제국주의자였고 우리는 그 제국주의자들을 도운 그야말로 ‘괴뢰’였던 것이다. 당시의 박정희 군부독재는 미국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었으며 또한 비엩남에 진출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매우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젊은이들을 그 열대의 낯선 땅에 보내 외화를 벌었으며 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당시에 진보적인 잡지였던 월간 사상계의 사장이었던 장준하씨는 박정희 군사독재의 월남파병 승인을 반대하며 조목조목 따져 사설로 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옳은 소리도 냉전 이데올로기에 묻혀버리고 이 땅의 젊은이들은 폭염이 쏟아지는 낯선 땅에서 무려 4천 6백명 이상이나 죽어갔던 것이다. 그 피의 대가로 한국은 경제건설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제 어느정도 먹고 살만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조금은 민주화가 되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이제 잊혀지기를 강요 당했던 역사, 바로 비엩남의 침략사에 대한 재점검이 있어야 할 것이며 우리가 비엩남 민중과 정부에 정식으로 사과해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이며 우리의 지난 부끄러움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런 역사적 범죄를 일으키지 않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 땅에는 비엩남에서 받은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어떤 의미였는지 모른다. 아니,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냉전이데올로기에 의해 쇄뇌당해 있다. 마치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은 모두 ‘빨갱이’라고 몰아부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비엩남에서의 그들의 행위를 ‘반공’의 일선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지켰다는 자부심으로 남아있다면 그런 사람은 몸보다 더 큰 정신적 상처를 입은 것이다. 
  비엩남 민족해방전쟁은 우리의 남북전쟁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만일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가장 불행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한 나라의 민중들이 선택하는 이데올로기를 강요할 수 없다. 비엩남 민중들에게는 ‘호치민’이라는 참으로 존경할만한 인물이 있었으며 조국과 민족을 자신의 몸보다 더 사랑하는 수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른바 ‘베트콩’으로, 또는 ‘민족해방전선’의 투사로 전선에서, 생활 속에서 목숨을 바치며 투쟁했고 비엩남을 마침내 통일시켰다. 
  미국의 막강한 화력과 물질의 도움으로 정권을 버텨온 남베트남의 군부독재는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패와 타락의 속성으로 몰락해버리고 말았지만 가진 것은 없어도 순수한 열정과 불타는 조국애로 몸을 던진 북베트남은 승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북베트남의 젊은이들은 무려 90만명이 죽었으며 150만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에 비해 남베트남 젊은이들은 20만명이 죽었고, 90만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이름없는 민중들이 그 사이에서 죽어갔다. 이것이 바로 비엩남 민족해방 전쟁이다. 
  미국을 대표로 하는 수많은 외국의 연합군들이 비엩남에서 싸웠으며 명분없는 전쟁으로 괴로워했다. 미국에서도 ‘가장 극악한 범죄전쟁’이라고 규정한 이 비엩남 민족해방전쟁에서 우리나라는 얼마나 극악한 역할을 맡았던가. 비엩남에서 ‘따이한’은 잔인함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미국을 제외한 연합군의 수가 6만명일 때, 우리 한국군의 수는 무려 5만명이었다. 이렇게 많은 수가 참전하여 비엩남 민중의 염원을 방해하고 그들의 역사를 갈갈이 찢어놓고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어찌 죄스러움에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빈손만으로 해방의 깃발을 드높인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느나라 사람이건 상관없이 존경의 대상이다. 우리의 독립투사들을 우리가 지금도 존경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인 것이다. 시오니즘적 민족주의는 옳지않지만, 전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어느 나라이건 다른 나라를 침략할 수 없고 또, 침략 당해서도 안된다. 만일 그러한 것이 어떤 이유에서건 용납된다면 그것은 또다른 제국주의의 시작이며 나치즘의 발현인 것이다. 
  우리가 아직도 ‘공산주의’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편협된 사고와 경직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중국의 모택동 주석을 존경하고, 러시아의 레닌을 이해하며, 독일의 마르크스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제3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들을 주의깊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미국이 지원한 모든 제3세계국가들의 모습이 군사독재와 매판자본이었음을 상기하는 것이 어찌 우연의 일치이겠는가. 우리는 쿠바를 시작으로 니카라과, 살바도르, 칠레, 온두라스 등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에 주목을 해야 할 것이다. 
  옳은 것은 무엇인가. 옳은 것에는 분명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이 자신의 의식과 다르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무시하거나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개인의 이기주의는 그 자신의 피해로 막을 수 있지만 집단이나 국가의 이기주의는 결국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역사를 피흘리게 한다. 우리는 이제 그만 피흘려야 한다. 
  중국과 수교를 하고, 러시아와 수교를 하고, 비엩남과 수교를 했다. 모두 이른바 ‘공산주의’의 망령이 떠돌던 나라이다. 우리는 그 나라의 이데올로기를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 나라와 민중이 선택한 기준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이끌어온 모택동, 레닌, 호치민은 그 나라의 민중들에게 아직도 변함없이 사랑받고 존경받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그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으며 민족의 역사가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그 나라 민중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으며 정의와 자유와 평화가 무엇인지 깨닫게 했다. 우리는 이제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비엩남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우리의 자존심도 되찾아야 한다. 오천년 역사에 있어 고구려 때의 그 웅장함과 광활함이 있었던 시대는 있었을지언정 고통받는 나라를 침략하여 차마 못할짓을 한적은 없었던 우리 백의민족의 자존심을.


글쓴이 : 조금 시간이 지난 글이지만 요즘 베트남(정확한 명칭은 비엩남입니다.)에 관한 글이 올라오고 있어서 다시 올립니다. 그리고 저도 개인적으로 비엩남이라는 나라를 좋아하고 비엩남 민중들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자신의 조국을 지킨 민중이라면 당연히 받아야할 존경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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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다녀와서


 

 늘 마음 속에 외경과 신비로움과 역사의 고통으로 각인되어 있는 지리산의 웅장한 자태를 그리다가 마침내 그 품으로 뛰어들어가기로 결정을 했다. 혼자서는 섯불리 뛰어들기가 두려울만큼 자연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위대한 무게를 지닌 산임을 잘 알고 있는터라 함께 가기로 한 바른글 친구들과의 동행은 다행스럽고 즐거운 길이었다.
 8월 1일 밤 12시 광주행 우등 고속버스표를 예매해 놓았다는 전갈과 함께 터미널에 10시에 모여 서로의 짐을 확인하고 알맞게 다시 분배하기로 했다. 함께 가기로 한 일행은 모두 12명. 11시가 되기 전에 10명의 회원이 나왔고 한 명이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나오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반드시 나오겠다고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그것도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뜨리는 바람에 모두들 황당해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12시 5분 전까지 나타나지 않아서 모두의 마음을 졸이게 해놓고 아슬아슬하게 나타났다. 이렇게 처음부터 조짐이 않좋았던 출발은 결정적으로 버스표에서 드러났다.
 시간이 되어 버스에 오르자 그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버스표를 대조해보는 순간, 우리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예매표는 8월 2일 밤 12시였던 것이다. 하루나 일찍 나와서 서둘렀던 모든 사람들은 기운이 쪽 빠져서 넋을 잃고 말았다. 표를 예매했던 친구는 미리 표를 확인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1시 55분 차가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었고, 사람이 다 차지 않아서 우리 일행이 모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둥에서 일반으로 격이 낮아지긴 했지만 한밤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광주로 내려갈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새벽 4시 30분에 광주에 도착한 일행은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 다시 구례로 가야했다. 그런데, 버스표 예매로 한번 실수를 한 친구가 남원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구례로 가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1시간 30분이나 걸려서 남원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한번 황당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남원에서는 성삼재로 가는 버스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많은 일행이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동을 하는 데, 번번이 실수를 하자 그 친구의 발언권은 자제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없을테지만, 일단 구례로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구례에서 연료와 라면 등을 구입한 다음, 성삼재로 올라가는 버스를 탔다. 본래 지리산의 종주는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길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예전에 왔을 때는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매우 힘들게 올라갔었다. 그런데 이제는 버스로 노고단 바로 밑에 까지 올라갈 수 있으니 편해지기는 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불편하다. 지리산의 중턱을 깎아 도로를 만들어놓았으니 산은 산대로 망쳐놓고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지니 온갖 쓰레기와 인간의 손때로 산이 빠르게 죽어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산행을 시작하는 일행들은 매우 힘들어했고, 처음부터 산행을 포기하려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노고단 산장에서 점심을 해먹고 산행을 시작했다. 흐리고 구름이 뒤덮인 산은 주위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비가 오락가락하고 축축한 날씨였으나 산행하기에는 비교적 좋은 기후였다. 첫째날은 돼지평전, 임걸령, 노루목을 지나 뱀사골 산장까지 왔다. 산행의 초기단계는 매우 힘이 들기 마련이다. 산을 잘 오르는 사람도 적응이 안되었고 산을 잘 못타는 사람은 몹시 힘들어했다. 뱀사골 산장에서 저녁을 해먹기도 어려웠다. 산장 쪽에만 물이 나오는데, 물을 한번 길러가는 길이 너무 힘들었다. 사람은 매우 많아서 골짜기에 텐트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인간의 더러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계속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데다 사람들도 어제의 산행에 지쳐서 그만 포기하자고 말하는 사람도 생겼다. 우여곡절 끝에 느즈막히 다시 출발을 했다. 출발한지 오래지 않아 중간에서 합류한 한 동료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산을 잘 타는 이 친구 덕에 사람들은 힘을 얻어 둘째날은 상당히 많이 걸을 수 있었다.
 토끼봉, 총각샘, 연하천 산장, 삼각고지, 구벽소령, 신벽소령을 지나 선비샘에서 머물렀다. 선비샘의 야영장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어제의 경험으로 텐트도 일찍 쳤고 밥도 빨리해서 먹었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한다.
 아침 일찍 서둘렀으나 짐을 챙기는 시간이 많이 걸려서 결국 9시 30분이 되어서야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세석평전을 거쳐 촛대봉, 연하봉을 지나 장터목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3시 30분. 나는 일찍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았다. 일행들은 본래 천왕봉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세석평전에서 하산하기로 했었으나 모두들 장터목까지 왔다. 그리고 즉시 천왕봉에 올라 5시 30분이 되어 다시 장터목으로 돌아왔다. 힘겨운 산행을 한 것이다. 내일까지는 모두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이렇게 무리한 결정을 내렸다. 그래도 결국 천왕봉까지 오른 것은 잘한 일이다. 일행이 하산을 하고 나서 나는 호젓한 시간을 보냈다. 가지고 간 전상국의 [유정의 사랑]을 읽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빠르게 텐트를 걷고 빵 한조각과 따뜻한 물로 아침을 대신 한다음 천왕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장터목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제석봉이 나온다. 제석봉에서는 천왕봉이 바로 보이고 지리산의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사목들의 기묘한 모습들도 인상적이다. 어제 저녁에 날씨가 걷히고 달과 별이 나타날 때는 사람들이 모두 탄성을 질렀다.
 아침에도 비교적 날씨는 맑았다. 해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산 아래의 구름바다가 눈에 들어오고 지리산 줄기가 마치 섬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천왕봉까지는 한 시간이 채 못걸렸다. 천왕봉. 넉넉한 대지의 어머니. 온갖 역사의 고통을 끌어안고 피를 흘리며 앉아있는 대지의 신. 모든 외경과 존경과 아름다운 찬사를 한몸에 받아도 부끄럽지 않은 지리산. 천왕봉.
 발 아래 구름은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지고 광활한 하늘만이 거칠것 없이 드러나는 세계. 세상의 온갖 고뇌와 먼지같은 일상과 허장성세와 인간사이의 갈등과 반목과 이기심과 탐욕과 더러움과 협잡과 권력과 폭력과 추잡함이 한순간에 가시는 곳이다. 구름을 몰고 가는 바람이 있고, 산등성이를 타고 넘는 한덩어리 구름이 있고 오로지 자연의 신비함만이 존재하는 곳.
 그러나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은 여전히 더러웠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고 바위에 붙어 사진을 찍고 더러운 음식 찌꺼기를 버리고 자연 앞에 겸손하지 않고 이기적이다.
 천왕봉에서 진주 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해 걸어내려오기 시작했다. 적막함. 이렇게 혼자 세상에 서 있다고 느껴질 때 나는 까닭모를 서러움이 복받쳤다. 며칠째 무리한 발바닥에서는 물집이 생기고 땅을 디딜때마다 아파왔다. 천천히 산을 내려오면서 아마도 한동안은 산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중산리까지 내려오니 12시. 부산가는 버스를 탔다. 오후 4시에 사상터미널에 도착. 연안부두까지 1시간. 제주도가는 배는 오후 7시 30분에 있었다. 표를 끊어놓고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기다렸다. 이렇게 큰 배는 처음 타본다. 배멀미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약도 먹었고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양말을 벗어보니 물집이 양쪽 발에 커다랗게 잡혀있다. 물집을 짜내고 조용하게 책을 읽었다. 전상국의 [유정의 사랑]을 모두 읽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제주도가 보인다. 제주도. 이곳도 처음오는 곳이다. 박영옥 선생님이 계신 곳이어서 일부러 찾기로 작정을 했다.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왔다. 짐작으로 시청 근처에서 내린 것이 잘된 일이었다. 선생님네 가게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함께 먹고 관회와 함께 근처 함덕해수욕장으로 갔다. 하지만 이미 해가 저물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저녁이 되자 비가 많이 내려서 바다는 멀리서 구경만 하고 말았다.
 텐트에서 하루 자면서 제주도에 오래 머물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한라산에도 못올라가고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어디 움직일만한 곳도 없었다. 아침이 되자 비는 더욱 거세졌다. 바로 서울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먹고 항공편을 알아보았더니 비행기는 운행이 된다고 했다. 내리는 비 속에서 탠트를 걷고 택시를 타고 선생님댁으로 돌아왔다. 선생님에게 3만원을 빌어서 공항으로 나갔다. 8시 50분발 서울행 비행기를 탈려고 생각했으나 어처구니 없게도 요금이 부족했다. 비행기 요금이 무려 4만 7천원이었던 것이다. 만원이 부족해서 부산까지 가는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김해 비행장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시 갈아타고 나오면서 마음이 초조했다. 주머니에는 몇 천원밖에 없었고 은행에서 돈을 찾아야만 했다. 돈 만원때문에 엄청난 시간의 낭비와 고생을 하는 것이다. 부산진역 앞 국민은행에서 30만원을 찾았다.
 부산역에 도착하여 서울가는 기차편을 알아보았으나 모두 매진. 대구까지 입석을 사서 연장을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일단 표를 구입한 다음, 표를 환불하는 곳으로 가서 기다렸다. 표를 바꾸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서성이다가 새마을 표를 바꾸는 아가씨를 만났다. 예상이 적중했다. 조금 비싼 새마을이긴 하지만 시간이 아주 적당했다. 무조건 구입을 하고 조금 기다리지 않아서 새마을을 탔다. 그런데, 함께 탄 옆자리에 나에게 표를 판 아가씨가 앉았다. 알고보니 여행사 통역안내원이었다. 일본인 여행객의 안내와 통역을 맡고 있는 그 아가씨와 함께 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행기로 서울에 오지 못한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결과는 좋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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