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바보야 믿음의 글들 33
윤기 외 / 홍성사 / 198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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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바보야]를 읽었다. 
오래전에 이 책이 감동적이었다는 말을 얼핏 스쳐들었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 오늘 아주 우연히 책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책속에 빠져들었다. 

 고아들과 함께 살아온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글을 나는 오랫만에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읽었다. 내 눈물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었을까. 고아들에 대한 동정의 눈물은 아니었다. 그들이 불쌍하기는 했지만 어제 [아홉살 인생]에서 읽은 것처럼 불쌍한 사람이란 스스로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동의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렇다면 내가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읽은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렇다. 지금은 좀체로 볼 수 없는 바로 그 순수한 인간의 사랑, 그 사랑을 발견하면서 느낀 감동때문에 나는 울었던 것이다. 아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진정한 아름다움과 감동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살게 한다. 나와 가족, 친구들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선 나부터 다른 사람의 삶에는 관심을 갖지않는다. 내가 혼자 살아가기에도 숨이 차는 것을 핑계로 하든, 개개인의 불행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서 발생한다고 믿고 있든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흔히 만날 수 있는 많은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육교 밑에서 구걸하는 간난아이를 업은 아주머니, 한 주먹도 안되는 야채를 놓고 팔고 있는 머리가 하얗게 쇤 할머니, 다방이나 음식점으로 껌을 팔러다니는 할머니, 그리고 불구의 몸으로 수레를 끌고 다니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쟁고아들이 많이 생겼다. 그들이 먹고 입고 자기 위해 필요한 시설은 절대 부족했고 나라는 그 아이들을 보살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선다고 하는, 과소비로 고민을 하는 우리의 사회에서 불우한 사람들과 어린이의 문제는 해결이 된 것일까.
 오히려 문제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고 한다. 고아는 줄어들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는 늘어만 간다. 사회복지에 대해서는 나라에서도 신경을 쓰지않고 있으며 개인의 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차단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고 있을까. 
 오늘 읽은 책 [어머니는 바보야]는 또 하나, 어머니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 어머니는 언제 어느 때나 우리의 고향이다. 마음 속에서건 생활 속에서건 어머니라는 단어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우리들 영혼의 고향인 어머니, 그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의 마음이 그 속에 들어있어서 우리는 감동의 눈물의 흘릴 수 있는가보다. 좋은 책을 읽고 잠시나마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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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왕국
문영남 / 신원문화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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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바꾸고 돌아와서 소설 [분노의 왕국]을 읽었다. 제 1 회 엠비시문학상 당선작으로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여성이 쓴 작품이다. 몇 시간을 투자하여 읽고 난 느낌은 글을 재미있게 썼다는 것이다. 위사(僞史)라고 밝혔듯이 역사 속의 인간을 그렸는데 그 주제가 '왕'을 찾는 것이어서 특이했다. 구성이 탄탄했고 풀어나가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문장은 평범했지만 이야기의 전개가 지루하지 않고 짜임새가 있어서 쉽게 놓을 수 없는 장점이 있다. 소설이 허구의 세계임을 전제로 한다면 이 작가는 매우 훌륭한 허구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소재와 구성, 전개 등등 모두 일치하고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자면 왜 오늘날 '왕'을 찾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작가는 미리 답을 내놓고있다.'왕'이 상징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 세우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반면에 이데올로기가 우리 모두를 갈라놓고 있다고도 했다. 즉, 이데올로기의 대안으로 '왕'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위사라고는 해도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왕조에 너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스스로 역사를 왜곡하며 울부짖는 것은 '조선황제만세'였다. 
 오늘날 왕조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작가는 작품 속에서 '왕조가 굳건한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영국이 그렇고 일본이 그렇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 민중들 스스로가 왕조를 허물고 뜯어 내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분단이 되고 일본에게 경제적으로 예속 당하는 상태까지가 모두 왕족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이 하는 말이지만 결국 작가의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작가의 이러한 논리 전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생각은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글이, 더우기 소설이 하나의 사회적 기능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그만한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 소설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이 소설의 장점을 먼저 짚어보자.
 1. 재미있다.(내용)
 2. 특이하다.(소재)
 위의 내용은 소설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재미있다는 것은 작가의 역량을 드러내는 것이다. 탄탄한 구성과 매끄러운 문장력, 그리고 지루하지 않게 작품을 끌고 나가는 호흡 등등, 이런 정도면 많은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능력을 인정한다.
 소재를 이렇게 특이하게 잡은 것도 작가의 능력이다.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서 알게 모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엄청나게 많다. 평소에 꾸준히 공부를 하고 있으며 작가적 시각을 늘 잊지않고 살아가는 것도 좋은 본보기가 된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것을 그려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굳이 다른 점을 배우려 한다면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위에서 이 소설의 재미와 특이함을 얘기한 것은 그것과 반대급부의 가능성을 지적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이 소설의 재미라는 것은 좀 더 과장되게 말한다면 통속적인 재미이고 소재의 특이함은 자칫 소재주의로 떨어질 염려가 있다. 왜 이런 기우(?)를 하느냐면 '하연'의 일가족이 겪는 고통과 가족의 죽음 등이 너무 통속적이며 극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이미 널리 발표되어 있고 극적인 전개가 너무 심해서 실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적이지 못한 흠이 있다. 그럼에도 이 내용에서는 상당히 먹히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까지가 모두 작가의 능력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이런 통속성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없다.
 다음이 소재의 특이함인데 소재가 독창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노력이 들어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자칫 특이한 소재만을 고르다 보면 우리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소재주의로 전락하기가 쉽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의 하나가 바로 이 소재주의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중간쯤 읽다가 끝 부분을 상상해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꼭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자응이 '왕'을 모셔놓고 절을 하는 대목이 그곳인데, 독자들이 이런 상상을 하고 그것이 맞아 떨어진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상상력의 부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결말을 무조건 알 수 없게 만드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독자에 대한 예의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작가의 상상력 부족임을 인정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사실 이런 저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이 잘된 것임을 인정하는데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아무리 잘된 작품이라도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는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배우는 사람들이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잘된 작품도 한번쯤은 물어뜯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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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 개정판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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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철씨가 쓴 '아홉살 인생'을 읽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이미 저 멀리 아득한 추억의 숲으로 사라진 나의 아홉살 때 기억을 되살렸다. 나는 아홉살이 되어 그 책을 읽었고 마음에 잔잔한 슬픔이 고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아홉살은 슬픈 나이일까. 

아니다. 아홉살이 슬퍼서가 아니라 힘겨운 나날을 살아온 우리의 아홉살은 모두 슬펐을 것이며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민이는 - 주인공의 이름이 백여민이라는 사실이 더욱 나의 이야기같기도 했지만 - 건강하고 밝게 자란=다. 나의 아홉살은 어떠했던가. 수줍음과 부끄러움으로 맞은 2학년 시절, 내 짝은 여자아이였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앉은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의 이름을 나는 지금도 잊지않고 있다. 아주 가끔씩 졸업앨범을 펼치면 거기에는 그 시절의 나와 그 아이가 들어있다. 비록 반은 달랐지만 그 아이는 아주 예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나는 뭐가 못마땅한지 잔뜩 인상을 쓴 얼굴로 들어있다. 여민이가 장우림과 사귀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내 짝과 사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수줍을을 너무 탔고 열등감이 심했다. 나는 자라면서 서른이 되어서도 부끄러움과 수줍음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를 못했다. 나의 국민학교 2학년 짝이었던 여자아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우습지 않은가. 이미 많은 것이 변한 세월을 살면서 이제 그런 과거의 추억을 들쳐내어 아파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때는 꿈이 있었다. 나는 조금도 허황된 꿈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가장 큰 꿈이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선생님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홉살 인생'에서도 나오지만 바로 그 선생님때문이었다. 나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행운을 얻지 못했다. 왜 우리의 스승들은 제자들 보기를 돌이나 돈으로 생각했을까. 

내가 성적이 나쁘고 공부를 점점 못하게 된 이유를 겨우 선생님을 잘못 만났다는 핑계로 대신할려고 그러는 것이나 아닐까. 어쨌거나 나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신기종이 처럼 발이 까마귀 발처럼 새까매도, 공부를 지지리 못해도, 가난때문에 육성회비를 제 때에 못내도 매를 들거나 욕을 하거나 인간적으로 무시하거나 경멸하거나 부자집 아이들과 차별하지 않는 그런 선생님이고 싶었고 그런 선생님을 정말이지 만나고 싶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공납금이 밀렸으니 집에 가서 가지고 오라며 나를 되돌려 보냈다. 

나는 집으로 향하면서 매우 우울했거나 어쩌면 조금은 울었을 것이다. 무엇이 나를 우울하게 했는지, 나를 울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아홉살의 나이에 무엇을 알겠는가. 하지만 나는 열 네 살이 되어 같은 경험을 했다. 비록 학교는 아니었지만 가난때문에 울어야 했던 그 기억들......

 아홉살 인생은 나를 아홉살에만 묶어두지는 않았다. 산꼭대기 동네, 가난한 이웃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들은 =지금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음을 본다. 그리고 내가 세 번의 아홉살을 겪는 동안 그런 막연한 슬픔의 정체를 알았다는 것이 시간의 변화라면 변화일까. 

 위기철씨의 '아홉살 인생'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달았다. 

사실은 나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조금 시작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지금은 중단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도 나의 어릴적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나의 살아온 삶을 한번쯤은 뒤돌아 보고싶은 생각에서 이다. 

 위기철씨는 '아홉살 인생'을 아마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나 '어린왕자' 등을 염두에 두고 쓴 듯한 생각이 든다. 특히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와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까. 그리고 이건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문체가 마치 번역된 외국 소설을 읽는 듯 했다. 이것도 내가 뭘 모르기 때문일까. 과장된 표현과 말투들에서 그런 것을 느꼈는데, 이것은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느낀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아주 조금 위기철씨를 알고 또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야기 작가로 나선 위기철씨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어디있을까. 

나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아직은 먹는 것보다 굶는 것이 더 많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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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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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씨 이야기]를 읽고

 신간안내에 실린 [좀머씨 이야기]를 본 순간부터 나는 그 책을 읽고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것은 그 책이 무슨 특별한 내용이어서는 아니었다. 바로 그 책을 쓴 작가가 [향수]의 작가라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나는 무조건 그의 신간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파트린크 쥐스킨트. 그는 우리 문학계에 그리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현재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라는 점에서 우리 문학계도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을 것이다. [향수]는 매우 독특하고 신비롭기까지한 내용이어서 나는 그 책에 깊이 빠졌다. 16세기의 프랑스 사회상과 풍속도를 ‘향수’라는 매개물로 그려내는 이 소설은 이탈리아에서 ‘장미십자회’와 종교적 지하단체를 그린 [푸코의 추]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와 함께 나에게 모범적인 작가로 등장했다.
 [좀머씨 이야기]는 한 소년 - 작가 자신일수도 있는 - 의 성장기이다. 성장과정에서 그가 보았던 ‘좀머’라는 사람의 삶과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이야기이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어느나라 작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 사람. 쥐스킨트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가 자란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과 마을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좀머’라는 좀 이상한 어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빛내는 것은 쥐스킨트의 수채화같은 소설이지만 그와 함께 장 자끄 쌍뻬의 그림도 큰 몫을 한다. 장 자끄 쌍뻬는 프랑스의 만화가로 그 그림은 만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아는 작가이다.
 그의 수채화 그림으로 쥐스킨트의 소설은 더욱 살았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에서 [향수]와 같은 독특한 내용이나 신비스러움은 없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이다. 원고분량도 적어서 생각보다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없었다. 다만 쥐스킨트도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것과, 나도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에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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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1 (양장) - 제1부 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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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개미를 읽고

 

열린책들에서 나온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읽었다. 400쪽에 가까운 책을 반나절이 넘게 쉬지않고 읽으면서 개미의 세계를 넘어 지구와 우주에 대한 신비에 새로운 눈을 뜨는듯 했다. 이 책은 그동안 나온 독특한 소설들 가운데 하나로, 움베르토 에코, 파트리크 쥐스킨트 등과 함께 읽는 즐거움을 주는 소설이다.

소설의 구성도 매우 독특하게 꾸며져 있다. 전혀 관계가 없는 두 개의 이야기가 끝까지 가서는 하나로 만나도록 해놓았다. 추리소설의 기법을 도입한 것도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데 효과를 보이고 있다. 작가는 소설가이기 전에 개미박사여서 개미의 생태학적 보고가 매우 정밀하고 풍부하며 뛰어난 상상력과 함께 개미의 삶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생물학적 내용들이 문학과 만날 때, 작품은 뼈와 살을 얻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개미의 집단적,사회적 생활이 인간의 삶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으며 또한 오래도록 살아남으리라는 것은 일종의 예언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지구에서 살다가 사라지는 포유류의 한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개미는 깨닫게 한다. 인간은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에 도전을 하는 능력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정작 지구의 표면에 가까이 살고 있는 수천억의 곤충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인간만큼이나 다양한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 개미를 통해 인간과 대비시키며 공존을 해야하는 당위성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다른 어떤 생물과의 대화를 시도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였지만, 개미에서처럼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대화는 없었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다른 생물들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인간이 먼저 생물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는 것이다.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이 시도는 사실 전부터 있어왔다. 돌고래의 음파를 분석해서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지능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도 인간이다. 이처럼 인간들은 인간들끼리 나누는 상호소통의 기능을 확대하여 다른 생물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소설은 아직은 미래를 가상하고 있지만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개미의 생활은 매우 치밀하고 적확해서 독자가 마치 개미굴에 들어가 살고 있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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