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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왕국
문영남 / 신원문화사 / 1992년 3월
평점 :
절판
양복을 바꾸고 돌아와서 소설 [분노의 왕국]을 읽었다. 제 1 회 엠비시문학상 당선작으로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여성이 쓴 작품이다. 몇 시간을 투자하여 읽고 난 느낌은 글을 재미있게 썼다는 것이다. 위사(僞史)라고 밝혔듯이 역사 속의 인간을 그렸는데 그 주제가 '왕'을 찾는 것이어서 특이했다. 구성이 탄탄했고 풀어나가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문장은 평범했지만 이야기의 전개가 지루하지 않고 짜임새가 있어서 쉽게 놓을 수 없는 장점이 있다. 소설이 허구의 세계임을 전제로 한다면 이 작가는 매우 훌륭한 허구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소재와 구성, 전개 등등 모두 일치하고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자면 왜 오늘날 '왕'을 찾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작가는 미리 답을 내놓고있다.'왕'이 상징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 세우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반면에 이데올로기가 우리 모두를 갈라놓고 있다고도 했다. 즉, 이데올로기의 대안으로 '왕'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위사라고는 해도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왕조에 너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스스로 역사를 왜곡하며 울부짖는 것은 '조선황제만세'였다.
오늘날 왕조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작가는 작품 속에서 '왕조가 굳건한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영국이 그렇고 일본이 그렇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 민중들 스스로가 왕조를 허물고 뜯어 내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분단이 되고 일본에게 경제적으로 예속 당하는 상태까지가 모두 왕족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이 하는 말이지만 결국 작가의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작가의 이러한 논리 전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생각은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글이, 더우기 소설이 하나의 사회적 기능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그만한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 소설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이 소설의 장점을 먼저 짚어보자.
1. 재미있다.(내용)
2. 특이하다.(소재)
위의 내용은 소설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재미있다는 것은 작가의 역량을 드러내는 것이다. 탄탄한 구성과 매끄러운 문장력, 그리고 지루하지 않게 작품을 끌고 나가는 호흡 등등, 이런 정도면 많은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능력을 인정한다.
소재를 이렇게 특이하게 잡은 것도 작가의 능력이다.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서 알게 모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엄청나게 많다. 평소에 꾸준히 공부를 하고 있으며 작가적 시각을 늘 잊지않고 살아가는 것도 좋은 본보기가 된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것을 그려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굳이 다른 점을 배우려 한다면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위에서 이 소설의 재미와 특이함을 얘기한 것은 그것과 반대급부의 가능성을 지적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이 소설의 재미라는 것은 좀 더 과장되게 말한다면 통속적인 재미이고 소재의 특이함은 자칫 소재주의로 떨어질 염려가 있다. 왜 이런 기우(?)를 하느냐면 '하연'의 일가족이 겪는 고통과 가족의 죽음 등이 너무 통속적이며 극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이미 널리 발표되어 있고 극적인 전개가 너무 심해서 실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적이지 못한 흠이 있다. 그럼에도 이 내용에서는 상당히 먹히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까지가 모두 작가의 능력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이런 통속성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없다.
다음이 소재의 특이함인데 소재가 독창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노력이 들어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자칫 특이한 소재만을 고르다 보면 우리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소재주의로 전락하기가 쉽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의 하나가 바로 이 소재주의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중간쯤 읽다가 끝 부분을 상상해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꼭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자응이 '왕'을 모셔놓고 절을 하는 대목이 그곳인데, 독자들이 이런 상상을 하고 그것이 맞아 떨어진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상상력의 부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결말을 무조건 알 수 없게 만드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독자에 대한 예의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작가의 상상력 부족임을 인정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사실 이런 저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이 잘된 것임을 인정하는데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아무리 잘된 작품이라도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는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배우는 사람들이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잘된 작품도 한번쯤은 물어뜯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